3.

오랑캐에 대한 중화제국의 굴욕적인 자세는 송나라에 와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한나라도 초기에 흉노에게 눌려 지냈고 당나라도 초기에 돌궐의 눈치를 살폈다. 당 태종이 돌궐을 복속시키고 ‘천가한’으로 천하를 호령했지만 오랑캐에 대한 중국 황제의 위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돌궐 등 오랑캐를 중국 군사력에 편입시키고 유지하는 데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비용은 두 가지였다. 눈에 보이는 비용은 군대 경비로 지출한 막대한 양의 비단이었고, 보이지 않는 비용은 제국 체제에 대한 위협이었다. 후자의 비용이 755년 안록산(安祿山)의 난으로 터져 나오면서 당 제국은 파산 상태에 빠졌다. 난국 수습을 위해 위구르(回纥)의 도움을 받은 데서 이 파산 상태가 드러난다. 그때까지 기미정책을 통해 활용해 온 오랑캐의 군사력을 동원할 비용이 없어서 제국의 통제 밖에 있던 위구르를 끌어들인 것이었고, 그에 대한 보상은 757년과 762년 낙양에 대한 약탈을 며칠 동안 허용하는 식으로 이뤄진 것이다.


780년부터 시행된 양세법(兩稅法)을 놓고 재정국가로의 전환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여름(6월)과 가을(11월) 두 차례 걷는다 하여 ‘양세’라 부른 이 제도는 종래의 조-용-조(租庸調)를 대신해 납세를 간결하게 한 것이다. 안록산의 난으로 인구 이동이 많고 문서가 산실된 상황에서 효율적 징수를 위해 채택된 제도였다.


조-용-조는 북위(北魏) 이래 균전제(均田制)의 일환으로 시행되어 온 것인데, 농지세인 전조(田租)와 인두세인 요역(徭役), 그리고 지역 특산물인 조(調)를 부과한 것이다. 내용이 여러 갈래인 데다 현물로 납부했기 때문에 관리가 꽤 복잡했고, 인구 이동이 많은 전란 상황에서는 제대로 시행하기 어려웠다. 농지세 하나로 묶어 돈으로 납부하게 한 양세법이 능률적인 개혁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국가제도에서 능률이 모든 것이 아니다. 조세제도는 국가와 인민의 관계 중 경제적 측면을 담은 것이다. 중국의 농업사회 발달에 따라 농지를 주된 조세 근거로 삼는 경향은 일찍부터 나타났지만 그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춘추(春秋)> 선공 15년(기원전 594)조 "초세무(初稅畝)“ 기사에 대한 <좌전(左傳)>의 비평에 나타난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다. (임금이) 재산을 늘리더라도 곡식을 내가는 것이 힘 빌리는 것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初稅畝 / 非禮也 穀出不過藉 以豐財也] 

원래 주(周)나라 봉건제도는 백성이 영주의 보호를 노동력으로 갚는 것이었는데, 이제 재물로 갚는 제도가 시작됨으로써 그 관계가 타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백년 후 노(魯)나라에서 이 제도를 시행하려 할 때(기원전 483) 요직에 있던 제자 염구(冉求)가 의견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군자의 행동은 예법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 베풀 때는 두텁게 하고, 섬길 때는 치우치지 않게 하고, 거둘 때는 가볍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나도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예법의 원리를 등지고 한없이 욕심만 차리려 한다면 설령 전부(田賦)를 행한다 하더라도 끝내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계손씨가 일을 올바르게 하려 한다면 주공의 전범을 따르면 될 것인데, 만약 자기네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내 의견은 청해서 무얼 하겠는가?"

공자는 임금과 백성 사이가 물질적 거래 아닌 서로 돕는 정신으로 맺어지는 것을 이상적 제도로 생각했다. 도덕적 의미를 앞세운 관념이었지만, 실제적 효과도 가진 제도였다. 임금과 백성이 서로 돕는 사이라면 임금의 힘은 백성의 충성에만 근거를 둔다. 그러나 이 관계가 물질적 거래가 되면 임금의 힘은 쌓아놓은 재물에 근거를 두게 된다. 임금이 백성보다 재물에만 관심을 쏟게 되면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기 힘들 것이라고 공자는 생각한 것이다.


당나라의 균전제에도 나름의 윤리적 원리가 담겨 있었다. 많은 농민이 적정 규모의 경작지를 갖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양세법은 누가 얼마나 많은 농지를 어떻게 가졌는지 따지지 않고 면적에 따라 세금을 거둘 뿐이었다. 인민을 바라보지 않고 재물만 바라보는 변화였으니, 이것도 ‘재정국가’의 한 면모라 할 것이다. 11세기 후반 송나라 신종(神宗, 재위 1067-85) 때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 운동에도, 조선 후기의 대동법(大同法)에도, 같은 성격의 문제가 있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