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오랑캐가 중원을 점령해 통치체제 운영하는 것을 ‘정복국가’라 한다면 초기의 당나라는 정복국가의 성격을 다분히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실을 비롯한 초기 당나라의 지배집단은 ‘관롱(關籠)집단’ 출신인데, 북위에서 형성된 관롱집단은 호-한(胡漢) 2중성을 가진 집단이었다. 고조와 태종에게는 정복국가의 성격이 분명했으나 고종 이후의 문민화로 그 성격이 사라졌다. 앞 회에 언급한 태자 승건(承乾)이 태종의 뒤를 이었다면 아마 좀 더 오래갔을 것이다.


당나라 조정은 측천무후의 장악 아래 관료조직으로 성격을 바꿨다. 고종을 보좌하도록 태종에게 탁고(託孤)의 명을 받은 장손무기(長孫無忌, ?-659)와 저수량(褚遂良, 596-659)의 행적에서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장손무기는 태종의 처남이고 고종의 외삼촌이었다. 앞에서 당률소의(唐律疏議) 편찬을 맡은 일을 언급한 바 있거니와 태종 후기의 조정에서 최고의 권위를 가진 공신이었다. 그런데 조카인 고종의 성공에 너무 집착한 탓일까? 그의 평생 경력에 최대의 오점으로 남은 일이 고종 즉위 몇 해 후인 653년에 있었다.


‘방유애(房遺愛) 모반’사건이라고 하지만, 방현령(房玄齡)의 아들 방유애의 문제라기보다 그 아내 고양(高陽)공주의 문제였다. 태종의 17녀 고양공주는 이런저런 문제로 태종의 미움을 받아 궁궐에 출입도 못하는 신세였는데(태종이 죽을 때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종 즉위 후 황제가 똑똑치 못하다는 소문이 돌 때 황제 바꿨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주변에 꺼내다가 걸려든 일 같다. 이 사건의 조사를 장손무기가 맡았다.


이 사건에 중요한 공신과 종실 여럿이 연루되어 처벌받았는데, 역할이 줄어든 공신들이 뒷방에서 쑥덕댄 정도 일을 갖고 새 황제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지나치게 부풀렸던 것 같다. 조사를 맡은 장손무기가 이제 외척의 위치에서 동료 공신과 그 자제들을 가혹하게 처분함으로써 많은 지탄을 받았다. 특히 태종이 태자를 새로 정할 때 고종 대신 거론되던 셋째 아들 각(恪)은(장손무기의 외조카, 즉 황후 소생이 아니었다.) 연루된 정황이 확실하지 않은데도 서둘러 죽인 것 때문에 장손무기의 사심 때문이라는 의심이 짙었다. 이각의 억울함은 장손무기의 실각 후 인정되었다.


2년 후인 655년 황후 바꾸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고종이 원로대신 몇 사람을 불러 의견을 청했다. 저수량은 결연히 반대했고, 장손무기는 직언을 삼갔지만 은근히 반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에 앞서 고종이 무측천(武則天)과 함께 선물을 싸 들고 장손무기의 집에 찾아가 회유하려 애쓴 일이 있었기 때문에 실망이 컸을 것이다. 


무측천이 황후가 된 후 저수량은 지방관으로 쫓겨났다. 처음에는 담주(潭州, 지금의 후난성) 도독으로 나갔다가 2년 후에는 멀리 계주(桂州, 지금의 광시성)로 쫓겨가고 얼마 후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지금 베트남 땅인 애주(愛州)에 귀양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저수량이 죽던 해에 장손무기 역시 모반으로 몰려 귀양갔다가 자살을 강요당했다.


정관 17년(643)에 태종이 세운 능연각(凌烟閣)은 아름다운 군신관계의 표상으로 일컬어진다. 황제가 늘 가까이 하고 싶은 24명 공신의 초상을 진열해 놓은 곳이었고, 첫 번째 자리가 장손무기였다. 16년 후 장손무기의 몰락은 공신 집단의 전멸을 고한 사건이었다.


653년 방유애 사건을 그 과정의 한 고비로 볼 수 있다. 태종이 주재할 때였다면 고양공주 한 사람만 처벌하고 방유애에게 부인을 새로 얻어줬을 것 같다. 그런데 능연각 24공신 중 여러 집안이 파탄을 맞음으로써 당 조정에서 공신 집단의 위상이 무너지고 말았다. 서열 1위 공신인 장손무기는 이 사태에 편승해 종실의 명망 있는 인물을 해쳤다는 혐의까지 받고 6년 후 스스로 억울한 죽음에 몰렸으니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몰랐던 것일까? 아니면 공신 아닌 외척으로서 새로운 입지를 모색한 것일까?


공신 집단의 몰락을 주도한 인물 허경종(許敬宗, 592-672)의 모습을 대비시켜 보면 그 몰락의 의미가 잘 드러나는 측면이 있다. 허경종은 수나라에서 과거를 통해 관직에 들어섰다가 개인의 글재주와 계략을 통해 서서히 지위를 높인 사람이었다. 655년 무측천의 황후 책봉을 앞장서서 지지함으로써 그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권력을 쥐게 되었다.


허경종이 역사상 최악의 간신 중에 꼽히게 된 데는 그와 대립했던 공신 집단을 영웅호걸로 흠모하는 후세 사람들의 편견도 작용했을 수 있다. 그러나 전해지는 구체적인 행적을 보면 여색과 사치를 좋아하고 이기심이 강한 소인배였다는 사실에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호걸과 소인배의 취향 문제를 넘어 제국 경영의 과제를 놓고 무후(武后)의 관점을 생각해 보자. 무후가 탄압한 공신들은 각자 나름의 신망을 갖고 따르는 무리를 거느린 사람들이었다. 공신들의 발언권이 큰 조정은 권력과 권위, 어느 측면에서나 ‘분권(分權)’ 상태라 할 수 있다. 황제의 권위와 권력이 방대한 제국의 구석구석까지, 그리고 오래도록 침투하기 위해서는 ‘집권(集權)’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허경종 같은 소인배는 문제를 일으켜도 그 한 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제국의 권위-권력 구조에 큰 위협이 되지 않는 것으로 무후는 보았을 것 같다. 태종이 호걸들을 이끌고 제국을 일으킨 것이라면 무후는 소인배를 동원해서 제국을 관리하는 길을 찾은 것이라고 하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