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0년 돌궐 제1제국이 무너진 후 돌궐 군사력의 대부분은 ‘천가한’ 당 태종의 휘하에 들어왔다. 태종은 이 군사력을 이용해서 당 제국의 강역을 크게 넓혔는데, 중요한 정복 대상 하나가 고구려였다. 태종이 시작한 고구려 정벌은 고종이 이어받아 668년에 완결되었다.


한반도는 중국의 주변 지역 중 중국 중심부와 가장 비슷한 기후조건을 가진 곳이다. 따라서 중국문명의 본질인 농업문명이 전파되기 좋은 곳이었다. 그런데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는 당시의 농업기술을 적용하기 어려운 만주 지역이 있었다. 고대의 역사에서 만주 지역과 반도 지역 사이의 관계를 나는 <밖에서 본 한국사>(돌베개, 2008)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금속기문명이 대륙으로부터 처음 전파되던 시절에는 대륙에 가까운 위치의 만주가 당연히 한반도보다 선진지역이었다. 고조선 수도의 남하, 부여에서 고구려의 파생, 고구려에서 백제의 파생이 모두 선진문명의 남진 현상을 보여주는 상황들이다. (...) 그런데 기원전 3세기 이후 중국 방면으로부터 철기를 바탕으로 한 집약적 농업문명이 본격적으로 전파되면서 문명의 북고남저(北高南低) 상황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온난한 기후의 한반도가 그 단계 농업문명의 정착에 유리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7세기 신라 통일 무렵에는 저울추가 남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10세기 이후 고려시대에 들어서서는 만주에 대한 한반도의 문화적 우위가 확연해져 있었다.” (34쪽)


중국문명의 한반도 전파는 역사를 통해 꾸준히 이뤄져 온 일이거니와, 중국에 강력한 제국이 세워져 동쪽을 침공할 때 전파 속도가 획기적으로 상승한 일이 몇 차례 있었다. 그 인과관계에는 양면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명-기술의 전파가 빨라졌기 때문에 침공의 이유가 생긴 측면이 있고, 침공 때문에 전파가 더욱 빨라진 측면도 있는 것이다. 기원전 2세기 말 한 4군(漢 四郡) 설치가 첫 번째 계기였고, 7세기 초-중엽 수-당 제국의 고구려 정벌이 두 번째 계기였다. 그 후에는 13세기에 몽골의 침공이 있었다.


한 4군은 문명 전파의 송유관 노릇을 한 것으로 나는 본다.


“낙랑 등 군현을 설치한 것은 변방 내지 역외를 중국의 의지대로 통제하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지원이 제대로 지속되지 못해 자립을 강요당하는 상황에서 이런 뜻은 관철될 수 없었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주변 세력에게 봉사하며 그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기술 전파 측면도 그렇다. 조선을 평정한 후 그 지도층을 사민(徙民)시킨 데는 기술 보유 집단을 현지에서 제거함으로써 중국과의 기술 격차를 좁히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 있었다. 그러나 지원 끊긴 낙랑군이 자립 생존을 위해 팔아먹을 것이 기술 말고 무엇이 있었겠는가. 기술이란 원래 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성질을 가진 것인데, 낙랑이라는 통로가 있음으로 해서 그 과정이 더욱 촉진되었을 것이다.” (같은 책 79쪽)


만주와 한반도 사이의 ‘북고남저’ 상황은 고구려까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농업 발달과 인구 증가에 따라 고구려의 중심도 한반도로 남하하고 백제와 신라가 국력을 키움으로써 한반도의 ‘삼국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삼국시대라 하여 3국의 대등한 병립(竝立)을 떠올리는 것은 후세의 관점이고 신라의 관점이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이었고 백제와 신라는 그 뒤에 붙어 있던 작은 나라들이었다. 백제는 고구려의 한 갈래로 출발한 나라였고 신라는 고구려의 비호 아래 백제-가야-왜의 압력을 견뎌내고 일어선 나라였다. 당나라가 정벌의 필요를 느낀 대상은 고구려였고, 신라와의 ‘동맹’은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술책일 뿐이었다.


고구려 격파 무렵 당 제국이 공격적 대외정책을 거두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 한반도의 독립 유지를 위한 조건이 되었다. 정벌 당시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적극적 경영의 의지를 보였으나 결국 느슨한 기미 정책으로 물러선 이유는 신라 측의 견결한 저항에도 있었겠지만 당나라 조정의 문민화가 그 배경조건이 되었다.


전성기의 고구려는 상당 규모의 농경사회도 품고 있었으나 만주 지역의 다른 세력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성격의 사회를 포괄하는 복합국가였다. 고구려가 사라진 자리에서 신라와 발해가 당나라의 기미정책 아래 발전해 나갔는데, 그중 신라가 고려로 이어지며 소중화(小中華)의 길로 향하게 되는 것은 농경에 적합한 기후조건 때문이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