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전유인(盤前有人)’의 바둑 자세

이번 연길 체류 중 한 가지 일과가 자리 잡았다. 마작이다. 아내와 언니 세 분, 4자매가 별다른 사정 없으면 점심 후에 큰언니 댁에 모여 저녁 전까지 판을 벌이는데, 나는 후보 선수다. 주전 선수가 다 있을 때는 4시경에 가서 휴식 원하는 분을 교체해 드린다. 한 분이 사정이 있으면 나도 선발 선수로 뛰는데, 내 일하는 시간을 보장해 주기 위해 개장을 3시경까지 기다려준다. 


마작에 실제로 접하기 전 마작에 대한 내 상상에는 신비감이 곁들여 있었다. 담배연기인지 아편연기인지 모를 연기가 자욱한 어둑신한 마작굴. 아편에 버금가는 중독성. 19세기 말 이래 중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소품으로 거듭거듭 그려져 온 그림의 잔상(殘像) 하나일 것 같다. 


막상 배워보니 별 것 아니다. 카드놀이 중 브리지게임과 비슷한 원리다. 마작의 전설적인 중독성은 놀이의 성격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여건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독성을 약간 뒷받침해 주는 것은 골패의 무게 정도일 듯. 호주머니에서 꺼내 가볍게 놀다가 치울 수 있는 카드에 비해 한 보따리 되는 마작패는 놀이도구를 넘어 놀이시설에 가까운 성격을 가졌다. 그 묵직한 짐을 풀어 한 판 차릴 때는 꽤 긴 시간 놀 태세가 이미 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보다 간편한 놀이는 훙스(紅十)다. 역시 브리지게임의 일종인데, 중국에서 카드는 이 놀이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공원이든 길가든 아무 데서나 네 사람 둘러앉아 판을 벌인다. 수준 높은 선수들의 판에는 관객이 많이 둘러선다. 우리의 고스톱보다 더 확실한 ‘국민스포츠’다. 나도 연변에 오자마자 이 놀이부터 배웠는데 금세 ‘조양천’이란 별명을 얻었다. 연길로 들어오는 바로 앞의 기차역이 조양천역인데, 그 역에서 정차시간이 너무 길다고 불평하는 마음에서 동작 굼뜬 것을 놀릴 때 여기서는 “조양천 역전이네!” 하는 것이다. 


자동마작기가 나오면서 마작도 무척 간편해졌다. 간이식탁 크기의 기계가 좀 거창하기는 하지만, 이것만 갖춰놓으면 생각날 때 둘러앉아 스위치만 누르면 된다. 마작놀이의 특징적인 동작, 백여 개 골패를 뒤집어놓은 상태에서 와글와글 섞은 다음 성벽 쌓는 것처럼 늘어놓는 과정을 기계가 대신해 준다. 가정집보다는 골목마다 있는 ‘노년활동실(老年活動室)’이란 이름의 마작방에 보통 갖춰놓는 것인데, 연전에 큰 동서가 세상 떠난 후 어머니 심심하지 마시라고 큰딸이 장만해준 것이다.


어느 놀이에나 급수가 있다. 운만 바라며 아무렇게나 패를 버리는 선수는 바둑으로 치면 5급 이하의 초짜다. 확률을 생각해서 가능성이 큰 쪽으로 패를 맞추고 버리는 패도 너무 쉽게 ‘훌러(好了)’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할 정도면 놀이의 개념이 잡힌 수준이다. 어떤 패가 나오고 있는지 살펴보며 진퇴를 판단할 수준이면 아마고수에 해당된다. 패가 나온 순서만이 아니라 하나하나의 패가 나올 때의 상황까지 음미해 가며 다른 선수들의 가려진 패까지 읽는 단계가 되면 세미프로를 넘어 프로의 경지를 바라보게 된다. 물론 한 판 한 판은 운에 따라 승부가 결정되지만 판이 쌓일수록 종합성적은 기량에 따라 갈라진다.


처형 집 마작판은 운을 바라보고 재미로 치는 판이다. 나는 작년에 처음 배워 잠깐 초짜 노릇을 했지만 금세 익혀서 재미있게 어울리기 시작했다. 마음먹고 놀면 성적을 더 올려 처형들 골려드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럴 동기를 느끼지 않는다. 함께 노는 선수들과 편안하게 어울리는 것이 그냥 좋다. 향상심 없어지는 것도 퇴각로의 한 현상인지.


오래 전 읽은 놀이에 관한 책에서 놀이를 떠들썩하게 즐기는 종류(hilarious game)와 차분히 몰입하는 종류(studious game)로 구분하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대개의 놀이는 양쪽 성격을 함께 갖고 있어서, 노는 사람들의 태도에 따라 이쪽이 될 수도 있고 저쪽이 될 수도 있다. 마작도 성적에 집착하면서 치면 몰입하는 놀이가 되고, 집착이 덜하면 떠들썩한 놀이에 가깝게 된다.


나는 몰입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놀이 중에 바둑을 제일 가까이하며 살아왔다. 놀이 좋아하는 외할아버지 덕분에 코흘리개 때부터 화투도 배우고 장기도 배웠지만, 초등학교 상급반 때 바둑을 배운 뒤로는 거기에만 매달렸다. 중학교 졸업 무렵 관철동에 있던 한국기원에 구경 갔다가 공인3급을 땄으니, 시중의 ‘대충 1급’ 수준이었다.


그 시절에는 아마(추어) 단위 제도가 없어서 아마추어 고수는 모두 1급이었다. 프로바둑 수준의 향상에 따라 1급의 폭이 자꾸 넓어져, 약한 1급이 석 점 붙여야 하는 ‘세미프로’까지 생겼다. 그래서 약1급, 중1급, 강1급, 세미프로의 비공식 위계질서가 형성되었다. 나는 대학 시절부터 중1급 정도로 통했다. 


1970년대에 아마 단위 제도가 생겨 과거의 1급을 흡수하게 되었지만 바둑꾼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등록비까지 내며 굳이 따려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어쩌다 단위를 딴 사람도 기원에서는 “강1급”, “중1급”으로 그냥 행세했다. 홍보를 위해 단증을 다소 남발한 감이 있어서 신뢰감을 얻지 못한 것 같다. 1980년대 초에 내가 받은 5단도 그렇게 남발된 단증의 하나였다.


1981년 내가 계명대 전임강사로 부임할 때는 졸업정원제 실시에 따라 교수 임용이 활발해서 ‘입사 동기’가 많았다. 그중에 강1급에서 중1급 수준의 바둑선수가 나까지 네 명 있고 모두 김 씨여서 ‘계명대 4김방’으로 불리게 된다. 마침 대구-경북 직장대항 바둑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는데, 3명씩 붙어 두 판 이기는 쪽 올라가는 방식이 계명대 팀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우리가 어쩌다 우승을 놓치면 ‘이변’이라고 할 만큼 승승장구했다.


그 대회 주최 측의 섭외력이 좋았는지, 우승팀 주장에게는 아마 5단, 다른 두 선수에게는 아마 4단이 주어졌다. (등록비도 면제!) 계명대 팀은 해마다 주장을 바꿔 나가서 4김이 모두 5단을 받았다. 그렇게 몇 해 지내는 동안 나처럼 중1급 수준이던 선수의 실력도 늘어 5단 단위에 제법 어울리게 되었다. (당시에 실력으로 5단을 따려면 확실한 강1급이라야 했다.)


1984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교토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몇 달 체류할 때, 어쩌다 또 하나의 5단위를 따게 되었다. 떠날 무렵 일본기원 칸사이지부 주최의 아마추어바둑대회가 열렸는데, 최강자들의 챔피언전과 5단까지 딸 수 있는 승단대회가 나란히 진행되었다. 그 동안 다니던 기원의 사에키 사범이 권해서 5단을 노리는 4단으로 출전했다.


1패 한도 안에서 4승을 올리면 승단이 된다는 규칙이었다. 무패면 등록비 면제. 교토대 농학부에 유학 중이던 송해범 선생과 함께 가서 나란히 등록했는데, 그 바람에 첫 판을 송 선생과 붙게 되었다. 그 결과 송 선생은 4승 무패, 나는 4승 1패의 성적을 올려 5단 자격을 갖췄다.


그런데 시상식이 한참 지체되더니 주최 측에서 송 선생과 나를 찾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우리 두 사람은 정식 4단증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5단증을 발급해 드릴 수 없고, 5단 자격을 확인한 데 만족하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기원의 ‘정신적 5단’이 되었다.


정신적 5단은 몇 해 후 다른 곳에서 또 따게 되었다. 프랑스에서였다.


1985년 이래 파리에서 한두 달씩 체류하는 일이 종종 있다가 1990년 여름 교수직을 그만둔 뒤 반년 남짓 장기체류를 하게 되었다. 오래 지내려니 손이 근지러워져 바둑 둘 곳을 찾아보니 퐁뇌프 부근에 꾼들이 모일 것 같은 곳이 하나 있었다. 보통 바둑클럽은 카페에서 점심시간과 저녁시간 사이에 열리는데, 이곳은 무슨 복지시설을 이용해 일과 후부터 밤늦게까지 여는 곳이었다. 


찾아간 날로 앙드레 무사 선수와 마주쳤다. 그와 판을 벌이니까 모두들 두던 바둑 그만두고 모여들어 구경에 열중했다. 앙드레는 피에르 콜메즈와 함께 프랑스의 양대 고수였으므로 나는 그와 짱짱하게 어울림으로써 바로 고수 자격을 획득한 것이었다.


몇 주일 후 바둑대회에 참가했다. 프랑스의 바둑대회는 체스대회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매주 주말 도시를 옮겨가며 대회를 열고 선수 각자의 성적 중 가장 좋은 것 몇 차례를 합산 비교해서 순위를 정한다. 마침 파리 가까운 위성도시에서(이름은 잊었다.) 열리는 대회가 있어서 찾아갔다.


등록할 때 프랑스 단위 제도를 모르기 때문에 1급(일본 발음을 음사해서 “1 kyu”라 함)으로 적었더니 퐁뇌프의 클럽에서 봤던 사람들이 그러면 안 된다 하고 잠깐 쑥덕쑥덕하더니 5단으로 등록하라고 했다. 알고 보니 프랑스바둑협회의 5단으로 앙드레와 피에르 등 너댓 명이 최고단자였다.


그 날 앙드레는 오지 않았고 피에르와 처음으로 마주쳤다. 빡빡한 상대인데 그 날은 내가 이겨 우승을 차지했다. 며칠 후 피에르와 고등사범 수학과 동창인 동료 아니크에게 피에르가 무척 약올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프랑스인도 아니고 고등사범 출신도 아니고 수학자도 아닌 선수에게 내가 지다니!” 앙드레는 고등사범 물리학과 출신이다. 피에르가 말은 그렇게 했다지만 마주칠 때마다 나와의 대국을 즐겨 마지않았다.


또 한 차례 참가한 대회는 캉에서 열린 것이었다. 프랑스에 꽤 오래 있으면서도 파리 외에는 가본 곳이 별로 없었는데 노르망디 지방도 한 번 구경하고 싶어서 캉으로 갔다. 앙드레에게 져서 준우승에 그쳤지만, 잊을 수 없는 친구 피에르 콜송을 만나는 행운이 있었다.


1박 2일의 대회가 끝나기 전에 주최 측에 부탁했다. (각지의 대회는 그 도시 바둑협회에서 주최한다.) 이틀쯤 더 묵고 싶으니 적당한 모텔을 추천해 달라고. 잠시 후 막일꾼 같은 허우대와 차림새의 사내 하나가 찾아와 말한다. 괜찮다면 자기 집에 모시고 싶다고.


어리둥절했지만 호의를 물리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대회가 끝나고 자기 차에 태우는데, 차 모양새를 보고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제 카라반’이라고 할까? 큼직한 밴에 싱크대와 침상 등속을 튼튼하지만 엉성하게 설치한 것이 주인 솜씨 같았다. 아마 건축 분야 일꾼일 것이라고 마음속으로 짐작을 굳혔다.


막상 집에 도착해 보니 아주 아담하게 가꿔놓은 오래된 집이었다. 저녁 밥상에 앉은 뒤에 피에르가 신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직업이 의사인데 놀기를 좋아해서 진료시간을 최소한으로 한다고 했다.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윈드서핑이고, 근년 들어 바둑을 그 다음으로 좋아하게 되었다고. 몇 주일 전 내가 우승한 파리 근교의 대회에도 갔었는데, 그때 내 대국 자세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한 수 둘 때마다 대국자 본인이 시계를 누르는데, 내가 시계를 천천히 누르는 느긋한 동작에서 독특한 여유를 느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바둑애호가 중에는 바둑을 하나의 놀이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뭔가 큰 원리를 바둑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초보 수준 실력으로 온갖 기이한 실험을 반상에 시도한다. 아이들 노는 모습 같아서 웃다가도 이따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기도 했다. 승부를 다투는 기량과 관계없이 원리를 추구하는 자세. 너무 익숙해져서 원리를 잊고 사는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면이 있다. 피에르도 그런 사람의 하나였다. 그의 영어도 내 프랑스어도 원활하지 못했지만 그랑 함께 하는 시간이 즐거워서 이듬해 프랑스에 갔을 때도 그의 집에 다시 찾아가 며칠 쉬는 시간을 가졌다.


열 살 무렵 바둑을 배운 이래 60년 바둑 인생 중 프랑스 체류가 전환점이 되었다. 그 후로는 ‘더 잘 두기’ 위한 노력이 줄어들었다. 결과는 ‘물바둑’이다. 그 전보다 한 점은 약해졌고, 더 늘지도 않고, 두는 판수도 줄어들었다.


그래도 바둑의 즐거움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더 잘 두기’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 것뿐이다. 바둑 잘 두는 자세를 가리키는 말로 ‘반전무인(盤前無人)’이란 말이 있다. 상대방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집중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는 반대 방향, ‘반전유인(盤前有人)’의 길로 접어들었다. 상대와 교감 없이는 두는 재미가 없다. 예전에는 대회바둑에서 새로운 상대와 마주칠 때의 긴장감이 즐거웠는데, 지금은 피곤하기만 하다. 그래서 온라인바둑을 두지 않게 되었다.


인간이란 향상심을 가진 존재다. 뭐든 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은 본능이 있고, 이 본능이 문명 발전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더 잘하려는 노력이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도 많다. 싸움을 더 잘하려는 노력. 돈을 더 잘 벌려는 노력. 향상심이 외면으로만 치우치면서 내면이 황폐해지는 일이 개인 차원에서도 사회 차원에서도 흔히 벌어진다.


호모 루덴스 Homo Ludens. 유희를 인간의 한 본질로 보는 관점을 나는 지지한다. 그런데 유희를 죄악시하는 문화는 어떻게 빚어진 것인가. 유희에 이 악물고 달려드는 풍조는 어떻게 일어난 것인가. 유희를 유희답게 즐기며 살지 못한 자세를 반성하며 바둑에 얽힌 일들을 돌아본다. 그런데 잠자기와 책읽기 다음으로 내 시간을 많이 쏟아 부었던 바둑에 관한 생각은 한 차례로 정리되지 않는다. 다음에 더 써야겠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