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만 쳐다보지 말고 손가락도 들여다보라!”

1969년 내가 사학과로 전과할 때 서울 문리대 사학과가 국사학과, 동양사학과, 서양사학과로 분과되고 있었다. 그 해 신입생은 분과된 각 학과로 지원해 제1회 입학생이 되었는데, 2학년으로 전과한 나는 사학과의 마지막 회에 끼어들었다. 사학과 학생들은 기존 커리큘럼에 따라 학점을 이수하고 국-동-서 중 어느 분야라도 골라 졸업논문을 쓰게 되어 있었다. 분과되기 오래 전부터 세 분야의 연구실은 따로 운영되고 있어서, 학문에 뜻을 둔 사학과 학생은 원하는 연구실에서 공부하고 있다가 대학원 진학 때 전공을 확정하곤 했다.


당시 사학과의 선임 교수들이 한국 역사학계 “제1세대”로 흔히 지칭되는 분들로 대개 서울대 1. 2회(1947-48년) 졸업생들이었다.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대에 입학한 것이 아니라 일본 대학에서 공부하다가 해방으로 귀국한 이들이 서울대(또는 그 직전의 경성대학)로 전학해서 졸업 절차를 밟은 것이었다. 이들이 1952년 역사학회 설립의 주축이 된 데서 “제1세대”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김성칠, 1913-1951)가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이 제1세대에 어울리셨을 것 같다. 그분은 1941년 경성제대에 입학했다가 학병 문제로 졸업을 못한 채 해방을 맞은 후 1946년 봄 경성대학에 복학해 가을에 졸업장을 받았다. 서울대 제1회의 한 학기 선배였다. 그분이 조수(조교)로 있던 1946년부터 제1세대 역사학자들과 접촉이 있었다. 그중 고병익 선생(1924-2004)은 1993년 아버지 일기가 <역사 앞에서>(창비 펴냄)로 나올 때 “동양사연구실과 김성칠 선생”이란 회고를 붙여주었다.


동양사학과의 고 선생 외에도 국사학과의 한우근(1915-1999), 김철준(1923-1989) 선생, 서양사학과의 민석홍(1925-2001) 선생이 모두 아버지와 접촉이 있던 분들이었고, 그중에는 아버지에 대해 매우 각별한 마음을 품고 있던 분들도 있었음을 나중에 차츰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학부 다니는 동안 나는 그런 면을 별로 의식하지 못하고 지냈다. 1980년대 말 한우근 선생을 몇 차례 찾아뵌 일이 있는데, 그분이 아버지에 관해 말씀하는 것을 듣고 놀란 일이 있다. 


그 무렵 한 선생께는 정말 큰 가르침을 많이 얻었다. 제일 뚜렷한 가르침 하나가 자료를 대하는 자세에 관한 것이었다.


그 몇 해 전에 한문자료의 전산화 전망에 관한 조사 작업을 했었다. 고병익 선생이 정신문화연구원장으로 있으면서 컴퓨터의 학술적 이용이 확대되는 추세에 주목, 동양학 방면에도 컴퓨터가 이용될 가능성을 검토하도록, 컴퓨터란 게 뭔지 조금이라도 알 만한 내게 권한 것이었다. 1년간 한문자료 전산처리 방법을 검토한 결과 나는 한문자료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임박한 과제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에 따른 학풍의 변화 전망을 제시했다. 역사학도의 작업 중 자료 확보의 비중이 줄어들고 해석의 비중이 늘어나리라는 것이었다.


어느 날 한우근 선생을 모시고 앉았다가 이 조사 작업에 이야기가 미쳤을 때 내 열띤 설명을 유심히 듣던 한 선생께서 오래 전의 경험 한 가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1961년 하버드옌징연구소에 가서 1년간 지낼 때의 얘기였다. 그곳에서 중요한 자료를 수없이 많이 찾았는데, 당시에는 복사비가 무척 비쌌다고 한다. (아마 간편한 복사기가 아직 나오지 않았을 때의 거창한 제록스 탄소복사기였을 것이다.) 부득이한 경우 외에는 원하는 자료를 모두 손으로 베껴 와야 했고, 떠날 때가 되니 더 많이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 무척 애통했다고.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반전이 일어난다. 20년이 지나 퇴직하면서 돌아보니, 작은 분량이나마 손으로 베껴 왔기 때문에 그 자료의 의미와 특성을 속속들이 파악해서 그만큼이라도 활용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복사비를 마음껏 써서 그 열 배 분량의 자료를 가져왔더라도 그만큼 알뜰하게 활용할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자료와의 스킨십. 이것이 역사학도의 작업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진 것인지 배우면서 나는 큰 회한을 느꼈다. 이런 가르침을 주실 수 있는 선생님들을 일찍부터 접하고 지내면서도 배우는 내 자세가 부실했던 데 대한 회한이었다. 이 깨달음 덕분에 비로소 역사 공부의 길에 제대로 들어서게 되었다. 


한 예로 석사과정부터 열심히 읽어온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생각해 본다. 나는 그 자료를 내 연구의 도구 하나로 생각했다. 현대 지성이 중국 고대사를 파악하는 데 이용하는 수단으로 여긴 것이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고대사’가 아닌 ‘현대사’ 자료로 <사기>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 내용이 상고시대부터 사마천 자신의 시대까지 천여 년 역사를 담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한나라 초기 백년의 서술이 전체 내용의 3분의 2를 점한다. 사마천은 그 시대의 현대사, 아니 어쩌면 그 자신의 ‘현재사’를 서술하기 위해 그 배경으로 삼황오제에서 춘추전국에 이르는 이야기를 펼쳐놓은 것 아닐까? <사기> 서술에 주관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그 신빙성을 비판하는 관점이 있는데, 나는 바로 그 주관성에서 <사기>의 가치를 더 크게 보게 되었다.


초년의 나는 자료를 대할 때 내가 설정해 놓은 목적을 위한 이용 가능성을 기준으로 자료의 가치를 따졌다. 자료 남긴 사람의 의도는 생각지 않고 남긴 결과물만을 본 것이다. 그 관점이 바뀌었다. 남긴 사람의 의도를 인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 내가 이해하는 만큼 자료의 가치가 살아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말을 흔히 하는데, 나는 손가락을 보는 데 역사 공부의 기본 의미를 두게 되었다.
손가락에 관심을 모으며 공부를 해 나가다 보니 근대적 학문 자세에 대한 반성이 되었다. 근대적 자세란 ‘정복’의 자세였다. 공부의 대상을 타자화(他者化)하는 것이다. ‘과학적’ 방법으로 숨겨져 있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역사 연구라고 생각한 것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우근 선생도 50세 나이에 옌징연구소에서 복사기 마음껏 쓰지 못하는 것을 애태울 때는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정복의 자세가 학문을 직업으로 삼는 데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옛 선비들은 역사 공부의 동기를 “호고지심(好古之心)”으로 표현하곤 했다. 문명사 공부의 진척에 따라 근대적 세계관의 편협성에 눈을 뜨게 되면서, 이 호고지심이 역사 공부를 통해 시야를 넓히는 중요한 열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대 이전 학인들의 세계관에서 지금 학인들이 배울 것이 많다는 생각이었다. 근년에 집중하고 있는 주제 ‘세계질서’의 고찰도 근대적 가치체계를 넘어서는 관점을 얻기 위해 옛사람들의 세계관을 살펴보는 작업이다.


한우근 선생만이 아니라 소위 ‘제1세대’ 역사학자들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주는 압력에 한편으로 억눌리면서도 원초적 ‘호고지심’을 나름대로 지킨 면모를 종종 느낄 수 있다. 그에 비해 다음 세대 교수들은 “Publish or Perish!”의 전투적 분위기에 압도된 느낌이다. 그분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도 비판적인 시각에 치우친 것이 배은망덕한 자세인 것 같기도 하지만, 제일 직접 마주쳤던 민두기(1932-2000) 교수와의 곡절은 나 자신의 반성을 위해서도 많이 돌아보게 된다.


1969년 내가 사학과로 전과할 때 민 교수가 동양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고병익 선생도 있었지만 고 선생은 학과 밖의 일에 관여하는 것이 많아서 민 교수 혼자 학과를 운영했다. 나는 3-4학년 때 동양사연구실에서 공부하다가 중국 천문역법에 관심을 모으게 되었는데 민 교수는 승인해 주지 않을 눈치였다. 그 방향 공부를 하려면 미국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병역 문제가 있어서 당분간은 혼자 공부를 더 해두겠다는 생각으로 경북대 석사과정으로 진학했다.


3년 후 군 입대를 앞두고 고민 끝에 서울대 박사과정에 입학수속을 밟았다. 유학 전망도 확실치 않으니 공부할 곳을 정해둬야겠는데, 석사과정은 그렇다 치고 박사과정까지 혼자 공부하는 길로 갈 수는 없겠다는 판단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 군 복무를 마칠 때, 박사과정에 복학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육군 졸병 노릇 하면서 온갖 일을 겪다 보니 “내 팔자는 험하게 살 팔자인가보다, 고상한 학문의 길에 미련 갖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회사도 다녀보고 서점도 꾸려봤는데, 내 재간으론 어느 것도 신통치 못했다. 그런 차에 어느 대학 전임강사로 들어오라는 권유를 받고 생각을 다시하게 되었다.


1979년에 졸업정원제 시행으로 교수 정원이 대폭 늘어났다. 사학과 선배들은 보통 석사과정 마치고 몇 해 시간강사 하다가 전임교수 자리 얻는 게 관례였는데, 그 해에는 여러 해 묵은 재고까지 바닥났다. 역사학 분야에서는 박사과정에 적을 둔 것이 채용 요건이었다. 


그래서 내게까지 권유가 온 것이었고,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인터뷰까지 했다. 다른 일 해봐도 신통치 않은데 이런 기회까지 생겼으니 학문의 길로 돌아갈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 길로 바로 교수직에 들어갈 용기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만족해하는 그 학교에는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전업 학생이 되기 위해 서울대에 복학했다. 1980년 3월이었다.


관악산으로 옮긴 학교에 다니러 봉천동에 전세방까지 얻고 지내다가 두 학기를 지낸 후 대구로 떠날 때는 서울대 박사과정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 1년 동안의 불미스러운 사연을 되살리고 싶지 않지만 ‘학점’ 문제만은 공공성을 띤 것이므로 밝혀두겠다.


첫 학기 중간에 학교 문이 닫혔다. 학교 폐쇄가 오래 가자 민 교수가 자기 과목을 리포트 제출로 끝내겠다고 방침을 내렸는데, 그 방침을 나는 제출 시한이 지난 직후에 전달받았다. 전달받자마자 이미 써둔 리포트를 제출했는데, 시한을 어겼으므로 실격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방침 전달이 늦은 사실을 밝혔더니 불가항력을 인정하고 학점을 주었다. 그런데 리포트를 제출한 모든 수강생에게 A-를 주도록 조교에게 알려둔 방침을 바꿔 모두 B+로 떨구는 것이었다.


리포트 내용을 살펴보지도 않고 일률적인 학점을 준다는 데도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강좌를 제대로 운영할 여건을 부여받지 못한 데 대한 항의의 의미를 인정할 여지는 있다. 그런데 김아무개가 빠진 수강자 집단은 A-인데, 그가 포함된 집단은 B+라는 건 무슨 뜻인가. 내가 주변에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동료 수강생들이 생각하기를 바란 것인가? 


다음 학기에는 민 교수의 제도사 강의에 B-를 받았다. 민 교수의 학점 횡포가 워낙 악명 높았고, 특히 동양사학과 아닌 사학과로 입학했던 고참 대학원생들에게 두드러지게 가혹했으므로 그만하면 선방했다고 주변에서 축하해 줬다. 그러나 나는 고심 끝에 민 교수 연구실로 찾아갔다. 한 학기 동안 그 한 과목에 전력을 집중했고, 내 과제만이 아니라 매 시간 강의 운영에도 기여했다고 자부했기 때문이다.


“이번 강의에 저는 최선을 다해 임했습니다만, 그래도 부족했던 점이 있었다면 짚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 학점이 불만이라고 따지는 건가?”
“아닙니다. 앞으로 더 잘할 길을 가르쳐주십사는 겁니다.”


녹취록은 없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내 간곡한 태도에 마음이 움직였는지 민 교수도 모처럼 대화에 성의를 보여주었다. 좋은 평가를 해줄 수 없었던 것은 천문역법제도의 과제 선택이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었다며, 학계의 동향에 맞춰 중요성이 큰 주제와 과제를 택하는 자세를 권했다. 그의 권유에 나는 감동을 느꼈다. 내가 석사과정에서 자기 지도를 피해 ‘도망’까지 다니며 천문역법에 집착해 온 과거를 묻어주고 진짜 ‘제자’로 받아주겠다는 너그러운 제안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수학-과학 분야에 어두운 역사학계의 사정 때문에 잠재적 중요성을 가진 주제들이 파묻혀 있는 현실에서, 학계의 동향을 따라다니기보다 새로운 영역의 개발에 나서고 싶다는 내 뜻을 굽힐 수 없었다. 그리고 과제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다면 최초보고나 중간보고 때 지적해 주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을 말했다.


그분이 50세 전후, 내가 30세 전후일 때의 일이었다. 근 40년 동안 여러 차례 마음속에 떠올랐던 이 장면에 대한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한다.


학부 시절 읽은 민 교수 초년의 논문 “〈大義覺迷錄〉에 대하여”는 동양사 분야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글 중 하나다. 역사학과 문학의 경계선 위에 올라탄 글이다. 그런데 그 후의 그분 글 중 그만큼 좋은 것이 더 없다. 많은 연구를 행하고 많은 글을 발표해서 명성과 권위를 쌓았지만 마음이 더 커지거나 깊어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내게 권했던 그대로 스스로도 학계의 동향에 맞춰 중요성이 큰 주제와 과제를 택하는 자세를 취한 결과가 아닐까? 그가 학문 수행을 일종의 군사작전처럼 여긴 것은 소년에서 청년에 이르는 시기를 전쟁 속에 겪었기 때문일까? 그가 키워낸 제자들을 흔히 “민두기 사단”이라 부르는 것이 내게는 어색하지 않다. 그는 제자들에게 작전 임무를 맡기듯 연구 과제를 맡기곤 했다. 낙오병에게는 ‘권총’질(F학점)을 서슴지 않았다. 


내가 민 교수의 대오에서 낙오하지 않고 한국 동양사학계에서 하나의 역할을 잘 맡았을 경우 지금의 나보다 형편없는 존재가 되었으리라고 단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이 나이까지 이만큼의 건강, 특히 정신건강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 역사를 보고 인간을 보는 시야를 넓힌다는 초지(初志)를 웬만큼 관철할 수 있었다는 데 다행함을 느낄 뿐이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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