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의 ‘해방’까지 조선은 35년간 식민지 상태에 놓여있었다. 1910년 8월의 ‘합방’으로부터 계산한 것이다. 합방 이전 5년간의 ‘보호국’ 상태도 식민지 상태에 준하는 것으로 본다면 넓은 의미의 식민지시대는 40년에 걸친 것이었다.

 

조선의 해방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였고, 건국도 그 여파 속에서 이뤄진 일이었다. 2차 대전은 조선만이 아니라 전 세계 수많은 나라들의 독립을 가져왔다. 해방과 독립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2차 대전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된 전쟁이었는지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2차 대전에 대한 서술은 전승국 입장에서, 그리고 냉전의 진영논리에 따라 이뤄진 것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냉전이 끝나고 21세기로 접어든 지금에 와서는 되짚어볼 필요가 많이 있다.

 

2차 대전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의 3국동맹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 세력과 이에 대항한 연합국 세력 사이의 전쟁이었다. 크게 보아 제국주의 세력 사이의 전쟁이라 할 수 있고, 그 점에서 1차 대전과 마찬가지였다.

 

1차 대전이 일어난 1910년대와 2차 대전이 일어난 1930년대 세계정세의 차이를 생각하면 두 전쟁의 기본 틀이 같았다는 것이 그리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20세기로 들어오는 시점에서 인류의 갈등은 민족모순(민족 간 대립)과 계급모순(계급 간 대립)으로 집약되고 있었다. 1차 대전 때는 계급모순이 아직 국가 간 대립 수준으로 자라나지 않고 있었으므로 민족모순으로 전쟁이 일어난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1차 대전 중에 공산주의국가 소련이 탄생한 후로는 계급모순이 갈등의 주축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민족모순에 입각해 일어난 2차 대전은 당시 인류의 갈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것이었고, 그 전쟁이 끝나자 계급모순을 중심으로 한 냉전이 바로 펼쳐지게 된 것이다.

 

소련과 자본주의국가들 사이의 갈등을 한강으로 본다면 같은 자본주의국가인 추축국과 연합국 사이의 갈등을 샛강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샛강에 홍수가 크게 나서 한강이 얼마동안 보이지 않게 된 셈이다. 미국, 영국 등 자본주의국가와 소련은 같은 연합국으로 전쟁에 임하면서도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사이였다. 연합국의 승세가 분명해짐에 따라 전쟁 후 상황에 대비한 상호견제가 시작되었다. 냉전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에서 연합국 승리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나라가 소련과 미국이었다. 소련은 몸으로 때운 셈이고, 미국은 돈으로 때운 셈이다. 3천만 명에 육박하는 소련의 인명 피해는 다른 연합국 피해를 다 합친 것과 맞먹는 수준이었고, 미국이 제공한 전쟁물자는 다른 연합국 제공을 다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 그리고 소련은 유럽에서 독일 제압에 중심 역할을 맡았고 미국은 아시아-태평양에서 일본 제압의 주체가 되었다.

 

종전 직후 만들어진 유엔에서 연합국의 5대 강국이 안보리 이사국으로 특권을 차지했는데, 종전 당시 미-소 두 나라와 다른 세 나라의 위상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중국과 프랑스는 나라를 빼앗길 정도의 심한 위기에 처해 있다가 연합국의 승리 덕분에 ‘해방’된 셈이었다. 영국은 그보다 좀 나은 형편이었을 뿐, 승리의 주체였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과 소련이 종전 후 가장 큰 국제적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의 주변부에서 뒤늦게 근대화를 이루고 열강 대열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던 두 나라가 2차 대전을 통해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것이다.

 

방대한 자체 영토를 가진 두 나라가 전 세계에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상황에서 식민지 해방의 바람이 몰아쳤다. 추축국의 세력을 깎아내기 위해 그 식민지를 독립시킨 것은 물론이고, 연합국 식민지도 종전 후 십여 년 사이에 대부분 독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연합국 식민지의 독립에는 몇 가지 조건이 어울려 작용했다. 긴박한 전쟁 상황 속에 종래의 식민지 보유국들은 동원 극대화를 위해 자치와 독립의 약속을 서둘러야 했다. 식민지 주민들도 지배국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에 독립의식을 키웠다. 그리고 초강대국으로 등장한 두 나라가 식민지체제의 해체를 원한 것이 또 하나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전 세계적 프롤레타리아연대를 추구하는 소련이 식민지체제의 해체를 바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자본주의국가인 미국이 자본주의의 산물인 식민지체제의 존속에 반대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자본주의의 ‘버전-업(version-up)’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은 미국이 열강 중 2류 국가에서 1류 국가로 올라서고 있던 1차 대전 때였다. 당시 미국 외의 1류 국가는 모두 식민지 보유국이었다. 방대한 자체 영토를 가진 미국에게 식민지체제 해체는 경쟁력의 상대적 우위 확보를 위한 첩경으로 인식되었다. 2차 대전 후 미국의 영향력을 확장, 강화하는 국제자본주의체제가 식민지체제를 대치함에 따라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이 보장되었다.

 

소련의 위상도 2차 대전을 통해 크게 상승했다. 전쟁 전까지 소련은 유일한 공산주의국가로서 자본주의국가들의 집중견제 아래 국가 지탱이 힘겨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극렬한 반공주의를 내건 추축국과의 투쟁 속에서 각국의 공산주의 세력이 성장했다. 우익 세력 중에는 추축국의 파시즘에 대한 호응이 상당히 있었음에 반해 대 파시즘 투쟁에 투철했던 좌익 세력이 인민의 신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공산권에 편입된 동유럽국가 중 루마니아와 폴란드 외에는 소련군의 진주가 아니더라도 좌익이 우세한 상황이 빚어져 있었다. 서유럽국가에서도 공산당 등 좌익의 세력이 전쟁 전에 비해 크게 자라나 있었다.

 

2차 대전을 통한 좌익의 성장은 유럽만의 일이 아니었다. 종전 후 소련의 세력 확장 노력은 동유럽에 집중되었다. 중국과 베트남에 공산주의국가가 일어서는 데 소련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국가가 자력으로 일어선 것은 반제국주의 투쟁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이 두드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피압박 제 민족에게는 민족 해방과 제국주의 극복이라는 두 가지 과제가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해방-독립 운동에서 사회주의 성향이 크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다.

 

조선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좌우합작 민족운동이라 할 수 있는 신간회가 1931년 해체된 후 우익의 상당 부분이 친일 전향 또는 타협노선 등 여러 형태로 투쟁 대열을 벗어났다. 그리고 군국화한 식민통치자들은 일체의 민족운동을 ‘좌익’이란 이름으로 탄압했다. 그래서 해방 당시 조선에서는 ‘좌익’의 이름이 민족운동의 맥락에서도 큰 존중을 받고 있었다.

 

2차 대전 종전 시점에서 두 초강대국은 각자 세력 확장의 조건을 갖고 있었다. 미국은 향후 10년 동안 전 세계 공업생산의 절반을 맡을 만큼 막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었고, 소련에게는 선진국에서 후진 지역까지 전 세계에 걸쳐 강화된 좌익 세력의 발판이 있었다. 군사력에서는 대략 대등했다. 종전 한 달 전까지 대등했다.

 

1948년 7월 16일, 포츠담의 연합국 정상회담 개막 바로 전날, 미국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 사실을 트루먼은 7월 25일에야 스탈린에게 알렸다.(처칠에게는 그 전에 알렸다.) 전쟁과 관련해서도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사실에 관한 정보를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동맹국 원수에게 8일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두 나라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칠 이 정보를 가장 효과적 순간을 기다려 터뜨린 것이다.

 

핵폭탄의 이론적 가능성은 2차 대전 발발 직전에 밝혀지고 있었다. 독일, 영국과 미국 과학자들이 그 이론에 접근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나자 개발 사업이 미국에서 진행되고 영국 과학자들이 합세했다. 맨해튼프로젝트로 귀결된 이 사업에 영국은 미국에 협력했지만 소련은 배제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상세한 첩보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포츠담에서 트루먼이 “강력한 새 무기” 얘기를 꺼냈을 때 스탈린의 태연함에 트루먼이 오히려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스탈린이 불같이 화를 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포츠담회담의 첫째 주제는 유럽의 전후 처리 방침이었고, 둘째 주제가 일본과의 전쟁 마무리였다. 독일과의 전쟁에 전력을 기울여 온 소련은 독일 항복(5월 8일) 후 석 달을 쉰 다음 일본과의 전쟁에도 참여하기로 연합국 사이에 의논이 되어 있었다. 결국 소련이 8월 8일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이 의논에 따른 것이었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은 일본의 마지막 저항을 잠재우고 전쟁을 일찍 끝내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거기에는 소련이 참전을 통해 지분을 늘릴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뜻이 있었다. 원자폭탄은 소련의 참전을 전후한 8월 6일과 9일에 투하되었고 일본은 즉각 포츠담선언 수용의 뜻을 전해왔다. 일본이 벼르고 있던 최후 항전에 나섰다면 몇 달간의 전투가 예상되고 있었는데, 그 동안 소련군이 조선과 일본의 상당 범위에 진격했을 것이고, 전후 점령지역 설정에 큰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소련의 대 일본전 참전이 형식적 수준에 그치기는 했어도 2차 대전 전체에 대한 공헌을 감안하면 미국의 일본 단독 점령과 조선 분할 점령에 소련이 동의한 것은 대단한 양보였다. 미국 측 실무자들이 소련의 동의에 놀라며 좋아했다는 증언도 있다. 이 시점에서 소련의 양보에는 원자폭탄의 존재를 의식한 이유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 소련의 군사력은 대등한 수준이었는데 원자폭탄의 등장으로 갑자기 현격한 차이가 생겼다. 종전 후 소련은 도처에서 서방과 갈등을 일으켰지만 마지막 단계에서는 예외 없이 물러섰다. 1949년 8월 소련의 첫 핵폭탄 실험 때까지 그랬다. 그 시점까지 소련의 대외정책은 미국의 핵무기 독점을 배경으로 해야만 이해할 수 있다.

 

이제 해방 당시 조선이 처해있던 국제적 상황으로 시야를 좁혀본다.

 

종전 후 조선의 독립에 대한 연합국의 방침은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그 무렵 연합국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었다. 조선과 오스트리아 독립 방침이 이때 나온 것은 일본제국과 독일제국의 내부 균열을 노린 전략적 조치였다.

 

카이로회담 직전 연합국 외상회담에서 나온 모스크바선언에서 미-영-소 3국은 “자유롭고 독립된 오스트리아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밝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독일과 같은 편에서 전쟁을 수행한 데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최종 결정에서 자신의 해방을 위한 오스트리아 스스로의 노력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오스트리아인의 독일에 대한 항쟁을 촉구하는 단서가 붙어있다.

 

오스트리아는 2차 대전 직전인 1938년 봄 독일에 합방된 나라였다. 압도적 국민투표를 통해 자발적으로 합방했다는 점에서 조선과 차이가 있지만 연합국 입장에서 볼 때는 조선과 가장 비슷한 조건에 놓여있던 나라였다. 연합국은 두 나라의 독립을 미끼로 두 나라 사람들의 연합국에 대한 협력을 유도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두 나라 모두 연합국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우리는 ‘광복군’의 전통을 내세우고 북한에서는 ‘빨치산’의 업적을 자랑하지만, 폴란드인 수십만 명이 연합국과 함께 싸운 데 비하면 체면이 안 선다. 종전 당시 영국군에만 약 20만 명의 폴란드인이 편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는 연합국이 진주한 뒤에야 임시정부를 꾸려 독일 항복 직전에 독일제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고, 조선은 일본 항복 때까지 일본제국 안에 머물러 있었다.

 

조선과 오스트리아에 진주한 연합국 군대는 겉으로 ‘해방군’이면서 ‘점령군’의 성격도 가진 것이었다. 두 나라를 전범국의 피해자로 보는 공식적 관점과 함께 전범국의 일부로 보는 실질적 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나라 모두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한 데는 전범국에 대한 협력을 응징하는 의미가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좌우합작 정부를 세워 10년간의 신탁통치를 받은 다음 1955년에 중립국으로 독립한 반면 조선은 극심한 좌우대립 끝에 분단건국과 전쟁의 비극을 맞았다.

 

조선 주변의 두 큰 나라 일본과 중국은 해방 조선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전범국으로 점령통치 아래 놓여 있던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은 ‘5대 연합국’의 간판이 무색할 정도로 무기력한 형편이었다. 일본 격파에 별다른 공로도 없이 종전을 맞은 국민당정부는 극심한 부패로 안팎의 신뢰를 잃고 공산당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다른 연합국들은 전쟁 피해로 국력이 쇠퇴한 상황에서 각지의 식민지 독립운동을 맞아 자기 앞 가리기가 벅찬 형편이었다. 해방 조선의 운명에 적극 개입할 나라는 결국 미국과 소련, 점령군을 보낸 두 나라뿐이었다.

 

두 나라 중 동아시아지역에서 주도권을 쥔 것은 미국이었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중심 역할을 맡은 미국은 일본 본토를 점령했을 뿐 아니라 중국 국민당정부에게 절대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소련은 중국공산당을 적극 지원하지도 못할 만큼 동아시아지역에서는 위축되어 있어서 일단 점령했던 만주까지 국민당정부에 돌려주어야 했다. 조선 북부를 3년 가까이 점령하고 있으면서 우호적인 정권을 키워낸 것이 소련에게는 이 지역의 교두보였다.

 

 

 

일전에, 해방공간 3년을 '실록' 방식으로 서술하려면 이런 주제들을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뽑아보다가, "실록" 작업을 해방 시점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방일기"가 끝나는 시점부터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다시 생각하니 해방 시점부터 일관된 포맷으로 서술하는 게 옳겠습니다.

 

"실록" 작업을 수행할지도 다시 생각해보고 있는데, "해방일기" 3년간을 "실록" 방식으로 정리하는 것은 어차피 바람직한 일이겠죠. 건국 후를 대상으로 "실록" 작업을 하더라도 익숙해져 있는 3년간을 대상으로 워밍업을 하고 들어가는 것이 여러 모로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틈 나는 대로 3년간에 대한 "실록" 방식 서술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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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