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동안 글을 아끼고 지내면서 충전을 엄청 해놓은 모양입니다. 몇 차례 계속 '골 때리는' 글을 쏟아내고 있네요. 연말에 올린 글 보고도 바로 메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실록> 구상의 틀을 막 잡아내고 있어서 틈을 내지 못했어요. 그러다 오늘 올라온 글을 보니'점입가경!'의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실마리는 내가 제공한 건 줄 알겠어요. 그런데 몇 달 동안에 그처럼 완벽하게 소화한 것을 보며 어안이 벙벙할 뿐입니다. 최근 세 편의 글에서도 단계가 느껴집니다. 12월 초의 글이 반가운 정도였다면 연말의 글은 놀라웠고, 오늘 글은 정말 어안이 벙벙합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해온 문제들이 두루 담겨 있는데다가 활발하면서도 탄탄한 표현을 보면 이 선생 생각이 나를 앞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자연과학 개념의 적극적 활용도 반갑습니다. 사람들에게 별로 익숙지 않은 생각을 내놓는 데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죠. 스스로 생각을 다듬는 데도. 자기 자신에게 잘 표현할 수 있어야 생각이 잘 다듬어지니까. 전보다 과학 개념 많이 활용하는 것도 내게 물든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하면서, 역시 놀랍기도 합니다. 워낙 자연과학 쪽 감각이 있기 때문에 내 생각을 잘 접수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동아시아의 20세기> 과제를 나보다 이 선생 같은 분이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그 동안 조금씩 해 왔는데, 오늘 글 보고 두 손 들었습니다. 이 선생이 훨~ 잘하겠어요.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다듬어온 구상의 범위 안에서는. 더 좋은 다른 일거리 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장점이 많은 과제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몇 주 전부터 과제로 떠올리고 있는 <실록>도 "한국의 20세기 후반"을 핵심 내용으로 삼을 전망입니다. <실록>은 구상이 늦게 떠오른 과제이지만 일단 떠올리고 보니 피할 수 없는 과제란 생각이 듭니다. 주어진 때와 장소에 묶이지 않으려고 발버둥깨나 쳤지만,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기분입니다. 넓은 공부를 더 하지 못한 능력과 노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해놓은 공부라도 풀어놔야죠.
 
<해방일기>에서는 지나친 사명감 때문에 몸이 굳었달까, 내 공부의 강점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직한 자세를 지킨 덕분에 하나의 '입장'을 세울 수 있었죠. <실록>은 <동아시아의 20세기>로 하고 싶었던 일을 이 입장에 맞추는 것이라 할 수 있죠. 이게 내 분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분수를 깨닫는 참에 내 하고 싶었던 일 잘 할 선수를 보게 되다니, 이게 우연한 일일 뿐인 것인지...
 
<실록>은 1948~1987년의 매 1년에 대해 8꼭지씩의 에세이를 쓰는 것으로 구상을 다듬고 있습니다. 총 3백여 꼭지를 4년간 쓰는 거죠. 아마 그 3분의 1가량이 한국에 국한되지 않는 주제를 다루게 되겠죠. 꽤 즐거운 작업이 될 것 같아요. 2017년이 되어 그 일 끝낼 때쯤 되면 시간을 확장해서 21세기까지 계속 내려올지 공간을 확장해서 다시 동아시아로 향할지 판단을 할 수 있겠죠. 그 판단에는 그 동안 이 선생이 어떤 일을 해왔는지도 중요한 참고사항이 될 것 같은데요?
 
새해에 계속해서 공부가 잘 풀리시기 빕니다.
 
김기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