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뜨자마자 이 선생 메일 받아보고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지난 주 메일은 빨리 보내고 싶어서 좀 거칠게 썼는데, 잘 소화해 준 것 같아서 반갑고요.
내가 저술활동에 몰두한 게 5년 전 <밖에서 본 한국사> 집필에 들어가면서부터였습니다. 그때까지는 칼럼과 번역 정도로 아웃풋에는 힘을 별로 쓰지 않고 공부를 넓히는 데만 매달려 있었죠. 그때 내가 바라본 공부 방향이 중국에서 형성되는 담론을 살펴보는 것이었고, 나 자신 그 담론 전개에 끼어들 가능성을 가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밖에서...>가 <뉴라이트 비판>으로 이어지면서 한국사 방면에서 할 일을 찾음에 따라 저술에 주력하게 되면서 공부를 넓히는 길은 접어놓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이나 체력의 한계에 맞춰 잘 돌아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제대로 정리하는 게 이제 내 몫이고, 더 넓은 공부는 이 선생처럼 연부역강한 분들께 맡겨놓아야지요.
1990년대까지도 중국에서 나오는 글로 읽고 싶은 것을 찾기 힘들었어요. 중국의 우리 연배는 문혁으로 초토화되어 있었습니다. 90년대 들어 짭짤한 얘기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는 게 마치 폐허에서 잡초가 자라나는 것 같았습니다.
2000년대 들어서면 중국의 학술담론이 무성하게 일어날 것을 예상했고, 또한 그 양상이 대단히 혼란스러우리라는 점도 예측했지요. 그래서 그 난장판에 뛰어들 야심을 품고 2002년 중국으로 건너갈 결심을 했던 겁니다.
그런데 공교로운 인연으로 연변을 둘러 중국에 들어갈 마음을 먹게 되었고, 연변에서 예상 외로 오래 머물다가 국내로 돌아오게 되었네요. 몸만 돌아온 게 아니라 공부와 일까지.
중국 사상계에서 손잡을 상대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판단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곳은 심한 혼란이 당분간 계속될 것이고, 근대성을 따라잡는 여러 형태의 노력이 표면상 주류를 이룰 것이라고 나는 봅니다. 탈근대 질서를 꾸준히 추구하는 노력은 이제 겨우 맹아 상태를 넘어서 마이너리티 단계로 나아가고 있지 않을지...
내가 끼어들 야심을 품은 것은 중국에서 탈근대 담론이 자라나는 데 공헌하고 싶은 뜻이었습니다. <밖에서 본 중국사> 이야기를 하는 식으로. 지금 <유럽...>과 <중국...> 작업을 생각하는 것도 그 뜻에서 이어진 것이죠. 중국어로 번역될 책을 쓰는 게 목표입니다.
우리 세대로서는 중국 사상계의 재활에 기여하는 길이 문혁을 겪지 않은 외부인 입장에서 외부 요소를 입력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마땅한 ‘연대’ 대상이 없었으니까요. 이 선생 세대에선 당연히 연대 노력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그곳의 혼란 상태를 생각하면 연대를 당장 해야겠다는 강박을 갖기보다 적당한 대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자세가 낫지 않을까, 그때까지는 독자적인 공부의 틀을 키워나감으로써 연대의 주체가 될 준비를 하는 자세가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후쿠야마의 담론은 리뷰를 통해 살펴보며 관심을 키우고 있습니다. “역사의 종말” 얘기에는 직업상 반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후의 담론에서는 실질을 잘 갖춰왔다는 인상이 듭니다. 국가의 기능 문제에는 근년 나 자신 생각이 많이 머물고 있어요.
‘질서’와 ‘발전’이 근본적으로 상치되는 명제라는 생각을 굳히고 있습니다. 물론 ‘발전’의 뜻을 넓게 보아 질서와 양립이 가능한 범위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발전’에 대한 현대인의 통념이 아니죠. 정치조직으로서 국가는 ‘질서’에 기본 기능이 있는 것인데, 국가가 ‘발전’의 도구로 인식되는 것은 인간문명의 기본 원리에서 벗어난 근대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인간에게는 발전을 지향하는 속성이 있죠. 고르게 발전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겠는데, 발전을 위한 동력이 사회의 일부분에 편중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보니 절제 없는 발전은 행복보다 고통을 더 많이 가져오고 사회의 안정성도 해칩니다. 유교적 국가 원리는 이 유력계층에게 도덕의 굴레를 뒤집어씌움으로써 발전을 억제하면서 안정성을 지키는 데 요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류문명은 이런 국가 원리의 세계적 실현을 필요로 하는 단계에 와 있는데, 미국이 주도한 유엔의 역사에서 지금까지 노력의 한계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 한계를 뛰어넘는 ‘탈근대’ 원리 모색의 자원을 ‘전근대’에서 찾는 것이 자연스러운 추세이고, 그중에서도 유교 원리가 가장 풍성한 자원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상대화가 하나의 중요한 열쇠가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항상적인 카오스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해 민주주의가 채용 내지 고안되었다는 점, 내 생각을 잘 풀어주네요. 카오스의 시대, 즉 발전과 팽창의 시대에 적합하지만 비용이 크기 때문에 정상상태(normal state)에서는 적합성이 떨어진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민주주의의 미덕에는 아끼고 지켜야 할 것들이 있지만 근대민주주의의 프레임에서는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유교 원리가 과연 득세한다면 그 입장에서는 바로 ‘일치일란’의 과정이 되겠지요. 그러나 거기 끌려들어가는 ‘오랑캐’의 입장에서는 그런 반복이 아닌 ‘대전환’이 될 거고요. 역사상의 일치일란 현상도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매번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으로 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내 <중국...> 프로젝트에서 중점을 두고 싶은 명제입니다.
오늘 올리는 글에 독도 이야기를 하며 옛날 글을 재활용하려니 어제 노동량이 적어서 잘 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좀 한가롭게 앉아 보내준 글에 바로 답장을 보낼 수 있네요. 늘 그러지는 못할 겁니다. 이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