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말에 아시아를 여행한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가 쓴 <동방견문록>은 당시 유럽인에게 중국에 관한 놀라운 수준의 정보를 제공한 책이다. 흥미로운 내용 덕분에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대부분 독자들은 이 책을 재미있는 이야기책으로 여겼을 뿐, 그 내용이 사실을 담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폴로는 원나라 치하의 중국을 카타이(Cathay)’라고 불렀는데, 16세기에 유럽인의 활동이 인도양을 거쳐 중국 해역에 이를 때까지도 중국이 카타이라는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1583년 중국에 들어간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利瑪竇, 1552-1610)가 그 가능성을 떠올리기 시작하고 1598년경부터 인도의 고아에 있던 예수회 지역본부에 그 의견을 알렸다.

 

고아의 예수회사들은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카타이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리치가 알려주는 명나라와는 다른 곳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포르투갈인 수사 벤토 디 고이스를 상인으로 꾸며서 카타이를 찾아가도록 파견했다. 1602년 말 인도를 떠난 고이스는 3년 만에 감숙성의 숙주(肅州)에 도착했으나 입국 허가를 받지 못했고, 그가 보낸 편지를 북경의 리치는 근 1년 후에야 받아볼 수 있었다. 리치가 보낸 중국인 수사가 16073월 숙주로 찾아왔을 때 고이스는 병이 위중한 상태였고 불과 며칠 후에 죽었다.

 

마르코 폴로의 시대에 중국을 방문한 유럽인은 상당한 숫자였다. 원나라에 체류한 유럽인이 1천 명 수준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명나라로 바뀌면서 유럽인의 발길이 끊겼다. 17세기 들어 폴로의 카타이가 중국으로 확인된 것은 이제 중국에서 유럽인의 활동이 다시 상당 수준에 이른 사실을 말해준다. 예수회사들이 북경에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면 고이스의 탐험 성과도 역사에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희대의 허풍장이로 통한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의 사실성이 오랫동안 의심받은 근본적 이유는 사실과 다른 내용이 많다는 데 있다. 그런데 밝혀진 오류의 대부분이 4부 중 제1부에 집중되어 있다. 중국에 도착하기까지 4년간 중동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관찰한 내용이다. 2부 이후에는 오류가 훨씬 적다.

 

이 차이는 폴로가 기록을 남긴 방법이 달라진 결과다. 17세에 베네치아를 떠난 폴로가 중국에 도착할 때까지는 아버지와 숙부를 따라다니며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중국 도착 후 안정된 조건 속에 주체적 활동을 시작하면서 상황을 주동적으로 판단하게 됨에 따라 정확한 기록이 가능해진 것이다.

 

스티븐 호는 <마르코 폴로의 중국(Marco Polo’s China)>(2006)에서 폴로가 쿠빌라이칸의 친위대원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직접 증거는 없더라도 유력한 추측이다. 친위대(Keshig)는 몽골제국에서 경호실만이 아니라 비서실의 기능도 겸한 기구였다. 쿠빌라이칸을 종종 알현하고 그 외교사절로 활동했다는 폴로의 서술도 많은 의심을 일으켜 온 대목이지만 이 추측 위에서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친위대는 인질제도로서 의미도 가진 것이었다. 친위대에 뽑힌 각지 유력집단의 자제들은 자기 출신세력과 중앙부 사이의 관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맡다가 때가 되면 출신지로 돌아가 지도자가 되었다. 폴로를 친위대에 뽑았다면 그의 배경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동방견문록> 수준의 고급정보가 유럽에 전해진 것은 폴로 개인의 역할에 앞서 원나라가 유럽을 잠재적 동맹 상대로 여길 만큼 당시 중-서 관계가 활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서 관계를 새로 연 예수회 선교사들

 

원나라 쇠퇴와 함께 중-서 관계가 쇠퇴하면서 더 이상 중국에 관한 정보가 유럽에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동방견문록>의 별명 Il Milione끝없는 [허풍]”이란 뜻으로 오랫동안 통했다. 3백 년 후 중국에서 예수회의 활동을 통해 카타이의 정체가 확인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서 관계가 되살아난 결과였다.

 

-서 관계를 새로 발전시킨 주역이 예수회였다. 1540년에 결성된 예수회는 종교개혁에 대응하는 가톨릭개혁의 핵심 조직이었다. 학술연구와 교육사업에 큰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항해활동의 확장에 발맞춰 해외선교에 앞장섰다. 1580년대 이후 중국에 예수회 활동이 자리 잡은 것은 예수회가 동원할 수 있던 다양한 자원 덕분이었다. 유능한 선교사들로 나타나는 인적 자원이 두드러져 보이지만, 장기간 활동비를 투입한 물적 자원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고, 중국에서는 특히 문화적 자원이 큰 빛을 발했다.

 

예수회의 문화적 자원 중 가장 크게 빛을 본 것이 유럽에서 빠르게 발달하고 있던 천문학이었다. 마테오 리치가 1605년 본부에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끝으로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 천문학에 조예가 깊은 신부나 수사 한 분을 파견해 주십사는 겁니다. 기하학, 해시계, 관측기구 같은 것들은 저도 다룰 수 있고 책도 갖고 있습니다만 중국인들이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행성의 운동과 일월식의 계산 등 역서(曆書) 편찬에 필요한 기술입니다.”

 

리치는 학창시절 로마대학에서 당대 최고의 수학자 클라비우스에게 배운 기하학을 중국에서 지도 제작 등에 활용했고, 유클리드 수학서의 번역에도 큰 공을 들였다. 중국의 제국체제에서 역법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착안해 더 높은 수준의 기술을 들여오는 데 애쓴 것이다. 그의 청원에 따라 테렌츠(鄧玉函, 1576-1630), 아담 샬(湯若望, 1591-1666), 페르비스트(南懷仁, 1623-1688) 등 일류 과학자의 자격을 가진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청나라 역법인 시헌력(時憲曆)의 제작과 관리에 참여함으로써 예수회의 교두보가 마련되었다.

 

 

적응주의 노선을 파탄시킨 전례논쟁

 

예수회 선교사들이 동원한 문화적 자원은 천문학만이 아니었다. 리치가 <서국기법(西國記法)><교우론(交友論>으로 유럽의 기억술과 윤리관을 소개한 것은 유럽 문화가 존중받을 만한 수준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리치의 가장 중요한 저술은 기독교 교리를 유교의 관점에 저촉되지 않는 것으로 해설한 <천주실의(天主實義)>였다.

 

<천주실의>의 논지는 기독교가 유교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는 것이라는 보유론(補儒論)’이었다. 다른 문화와의 공존과 포용을 추구하는 적응주의(accommodation) 노선의 적극적 표현이었다. 이슬람과의 적대관계 외에는 다른 문명권과 접촉이 없던 유럽인이 대항해시대를 통해 다양한 문화에 접하게 되면서 유연한 태도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선교사업의 최전선에 나선 예수회의 신학자들이 그 필요에 따라 적응주의 노선을 세운 것이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보유론 입장에서 현지 관습과의 갈등을 최소화했다. 조상과 공자의 숭배를 종교적 의미 없는 사회적 관습으로 규정함으로써 중국인, 특히 관원들의 입교를 쉽게 해주고 선교사 자신들도 관직을 맡을 수 있었다. 청나라 초기에서 중기까지 선교사들이 흠천감(欽天監) 등 여러 부서에 종사하며 예수회 활동의 근거를 만들었다.

 

세월이 지나 다른 교단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전례논쟁(Rites Controversy)’이 일어났다. 적응주의-보유론에 입각한 예수회의 선교노선이 기독교의 본질을 벗어난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1640년대부터 시작됐다.

 

문제는 중국 현장에서 제기됐지만 교황청을 중심으로 복잡한 논쟁이 이어지다가 1715년에 보유론을 부정하는 클레멘스 11세 교황의 칙령이 나왔다. 이 논쟁에는 교황과 군주들 사이의 관계 변화가 영향을 끼쳤다. “교황의 근위사단으로 불리던 예수회가 군주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1773년 해산에 이르는 과정은 영화 <미션>에도 나타나 있다. 예수회의 몰락은 중-서 관계의 쇠퇴를 가져와 19세기의 충돌을 더 험악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다. 1930년대에 일본이 만주국을 세운 후 이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1939년 비오 12세 교황이 공자와 조상에 대한 교인들의 경배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할 때까지 계속된 상황이었다.

 

 

[박스] 조선의 서학(西學)’<천주실의> 등 보유론에 입각한 중국 서학서를 근거로 1770년대에 일어났지만 당시 교회는 보유론을 부정하고 있었다. 정약용의 친지 몇이 교회의 바뀐 방침을 따르다가 폐제훼주(廢祭毁主)’의 죄로 처형되었다. (1791, 진산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정약용은 신앙으로서 서학과 거리를 두고 실용적 목적의 서학만을 표방했다.

 

https://en.wikipedia.org/wiki/Marco_Polo#/media/File:Marco_Polo_portrait.jpg 노년의 마르코 폴로 초상

https://en.wikipedia.org/wiki/Marco_Polo#/media/File:Route_of_Marco_Polo.png 마르코 폴로의 행로(1271-1295)

https://en.wikipedia.org/wiki/Marco_Polo#/media/File:ColombusNotesToMarcoPolo.jpg 콜럼버스가 1492년 항해 때 갖고 있던 <동방견문록>. 메모가 적혀 있는 것을 보면 책 내용의 사실성에 당시로는 이례적인 큰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https://en.wikipedia.org/wiki/Matteo_Ricci#/media/File:Matteo_Ricci_2.jpg 마테오 리치는 중국 활동 처음에 승복을 입다가 십여 년 지난 후 유삼(儒衫)으로 바꿨다. 이 초상에는 서적, 천문기구, 풍금 등 문화적 자원이 소품으로 등장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Kunyu_Wanguo_Quantu#/media/File:Kunyu_Wanguo_Quantu_(%E5%9D%A4%E8%BC%BF%E8%90%AC%E5%9C%8B%E5%85%A8%E5%9C%96).jpg 1602년 마테오 리치가 제작한 <곤여만국전도>의 일본 복제판.

https://en.wikipedia.org/wiki/Kunyu_Wanguo_Quantu#/media/File:Kunyu_Wanguo_Quantu_(%E5%9D%A4%E8%BC%BF%E8%90%AC%E5%9C%8B%E5%85%A8%E5%9C%96).jpg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의 문화와 학술을 유럽에 소개하는 역할도 맡았다.

 

 

Posted by 문천

 

 

지구 표면의 모든 육지는 7개 대륙으로 구분된다. 면적 순서로 아시아, 아프리카,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남극, 유럽, 오세아니아다. 대륙과 대륙 사이는 바다로 갈라져 있는 것이 원칙이지만, 좁은 지협으로 이어진 남북 아메리카나 아프리카는 별개의 대륙으로 볼 수 있다. 그래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유럽과 아시아의 구분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의 유라시아대륙으로 본다면 세계 육지 면적의 36.5%, 다음으로 큰 아프리카(20.3%)의 갑절 가까이 되고 인구가 53억여 명으로(2018 통계) 세계 인구의 70%를 차지하게 되니 두 개 대륙으로 가르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불균형이 너무 심하다. 아시아의 면적은 유럽의 4.5배이고 인구는 6배다. 유럽을 떼어내고도 아시아 인구는 세계 인구의 60%를 점한다.

 

아시아-유럽 구분은 유럽중심주의의 역사적 산물이다. 16세기 이후 유럽인의 활동이 전 세계로 확장되면서 많은 곳에 자기식 이름을 붙였고, 19세기 이후 유럽의 학술이 (지리학 포함) 세계를 휩쓸면서 그 이름이 통용되게 된 것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처음으로 유럽과 구분해서 의식한 것은 그리스인이었다. 동쪽의 페르시아를 아시아, 남쪽의 이집트를 아프리카, 자기네 유럽과 구별했다. 아프리카와의 사이는 지중해로 갈라져 있고, 아시아도 처음에는 에게해-흑해 건너편으로만 생각되었다. 그러나 흑해 북쪽까지 활동이 넓혀지면서 육상 경계선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육상 경계선을 헤로도토스는 카프카스산맥 부근의 파시스강으로 생각했으나 로마인들은 돈강으로 생각했다. 동로마제국 시대에는 아시아와 유럽의 구별에 큰 의미가 없다가 그 멸망 후 이슬람권과 기독교권 사이의 차이가 분명해지기 시작했고, 18세기 초 표트르대제가 러시아제국을 일으키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범주에 확실히 넣기 위해 아시아와의 구별을 강조했다. 우랄산맥-우랄강-카스피해-흑해로 이어지는 지금의 경계선은 표트르대제의 후원 아래 러시아 지리학자들이 제창한 것이다.

 

 

새로 그려보는 동-서양 경계선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농업문명의 전파가 남북보다 동서 방향으로 쉽게 이뤄졌다고 <, , >에서 설명했다. 위도가 비슷한 지역으로 나아갈 때 발원지와 기후조건이 비슷한 곳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유라시아대륙은 동서로 펼쳐진 거리가 다른 대륙들보다 몇 배 길어서 농업문명 발전의 주무대가 되었다는 설명이다.

 

유라시아대륙의 역사를 개관할 때 동양서양의 흐름을 나눠 살펴보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워낙 길게 뻗쳐진 대륙이라서 그 양쪽 끝에서 독자적 발전의 여지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의 구분은 유럽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쥔 근대 상황에만 적합한 것이다.

 

대륙의 중간쯤 동경 90도 자오선 부근에 문명사의 경계선을 설정하면 어떨까? 그 언저리는 동토지대-사막-산악-아열대우림으로 이어진 넓은 폭의 인구희박지역이었다. 이 경계선의 양쪽 사이에는 교통량이 매우 적었다. 실크로드가 각광받는 것은 교류가 적던 양쪽 사이에 이례적으로 조그만 통로나마 존재했다는 희소가치 때문이다. 어느 시기에도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는 각각의 지역 내 교류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 경계선을 사이에 두고는 군사적 충돌도 적었다. 한 무제 때 대완(大宛)을 정벌한 후로는 큰 충돌이 없다가 당나라가 탈라스전투(751)에서 패퇴한 일이 있었을 뿐이다. 13세기에 몽골제국의 흥기 과정에서 동서를 넘나드는 군사활동이 크게 일어났지만 4칸국의 분열 후로는 도로 사그러졌다. 한편 해로를 통한 동서간 교역이 8세기경부터 서서히 늘어나다가 19세기에 유럽인의 증기선이 나타나 동서간 장벽을 무너트리기에 이른다.

 

 

동양의 천하제국이 오래간 까닭

 

18세기까지 이 대장벽의 양쪽에서 각각 진행된 역사의 흐름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이 매우 적었다는 점에서 나는 이것을 동-서양의 경계선으로 본다. 서양, 즉 유라시아대륙 서반부에는 농경에 적합한 지역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문명의 통합력이 약하고 중심지역이 옮겨다니거나 병립하는 일이 많았다.

 

반면 동양에서는 황하-장강 유역의 농업화가 완성되어 중원(中原)’으로 자리 잡자 그 규모가 주변 지역을 압도하게 되었다. 진 시황의 통일 이후 중원을 장악하는 세력이 천하의 주인을 자처하는 천하제국의 전통이 세워져 근세까지 이어진 것은 중원의 압도적인 생산력이 주변부의 도전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따금 주변부 세력이 중원을 정복하는 일이 있었던 것은 제국의 운영시스템 교체를 위한 일시적 현상 정도로 볼 수 있다.

 

강력한 중심부의 존재 여부가 동-서양 역사의 패턴에 차이를 가져왔다. 유럽인들은 로마제국의 위대한 통합성을 팍스 로마나로 치켜세우지만, 전성기 로마제국도 지중해세계를 통합해서 페르시아제국의 대륙세력과 맞섰을 뿐이다. 8-9세기 이슬람제국이 서양의 천하제국에 가장 접근한 사례였으나 그 또한 오래지 않아 분열로 돌아간 것은 생산력의 근거지가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문명의 통합력은 언어(문자)-종교-정치조직의 여러 층위에서 나타난다. 동양에서는 문자와 정치조직에서 강력한 통합이 이뤄지고 종교의 역할이 작았던 반면, 서양에서는 종교가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종교는 한편으로는 통합의 기제로 작용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대립의 기제가 되었다. 서양 주요 종교들이 모두 유일신을 받든다는 사실이 통합의 염원을 반영하면서 또한 그 현실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권에는 내부의 통합보다 외부와의 대립을 강조하는 경향이 매우 강했다. 기독교 내 다른 교파에 대한 박해가 다른 종교권에서 받는 박해보다도 더 심했다. 동화될 수 없는 타자(他者)’에 둘러싸여 있다는 불안감이 널리 깔려 있었다. 외부를 모두 적으로 보고 그와의 투쟁을 통해 생존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근대유럽의 열린 세계관은 이 불안감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컴퓨터기술이 불러온 한자의 새옹지마

 

16-17세기 유럽에서 근대를 향한 세 가지 큰 변화가 일어났다. 종교개혁, 주권국가 중심의 베스트팔렌체제 성립, 그리고 방언(vernacular)의 국어로의 발전이다. 종교개혁과 베스트팔렌체제는 기독교세계의 통합성을 상징하던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권위를 무너트렸다. 방언의 발전은 각국의 내부 결합력을 강화하면서 만국의 만국에 대한 투쟁의 길을 열었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세계정복은 유럽의 경험을 세계 각지로 확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 분립이라는 종교개혁의 성과와 베스트팔렌체제에 입각한 근대국가의 형태가 유럽의 영향력이 닿는 모든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유럽의 학술과 사상이 근대화를 지향하는 모든 지식인의 표준이 되었고, 그에 따라 유럽 언어들의 역할도 자라났다.

 

이 근대화 풍조의 허실을 돌아보게 하는 재미있는 사례가 토머스 멀레이니의 <漢字無罪, 한자 타자기의 발달사>에 보인다. 중국의 근대화 선각자들에게 한자는 고약한 장애물로 보였다. 전보를 치더라도 글자 하나하나를 네 자리 숫자로 전환해서 보내고, 받는 쪽에서 이 숫자를 다시 전환해야 했다. 정보처리 능률이 알파벳문자보다 몇 배 떨어졌다. 그래서 한자 폐지논의까지 나왔다.

 

그런데 새옹지마랄까? 컴퓨터기술이 발달한 21세기 상황에서는 한자의 정보처리 능률이 알파벳보다 우월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Chinese typewriter” 입력에는 19타가 필요한데, “汉字打字机를 입력할 때는 각 글자 핀인의 첫 음소만 “hzdzj”로 치면 화면에 다섯 글자가 나타나고 엔터키로 확정하면 된다. 6타뿐이다.

 

정보처리에서 한자의 유-불리가 정보세계의 개방성과 폐쇄성에 달려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지금 입력방법에 나타나는 한자의 장점은 프로그램에 담겨있는 한자 조합의 사례 안에서 유효한 것이다. 방대한 사례를 담을 수 있는 기술발달 덕분에 한자가 유리하게 된 것이고, 이 사례를 벗어나는 새로운 조합을 시도할 때는 알파벳문자보다 능률이 못하다.

 

여기서 열린 세계관닫힌 세계관의 차이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무한한 외부의 존재를 생각할 때는 과거의 경험보다 새로운 상상이 더 중요하고, 역사학의 의미는 과거의 설거지에 그친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있는 세계를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세계로 생각한다면 과거의 재생(re-living)에서 지혜의 원천을 찾게 된다.

 

https://en.wikipedia.org/wiki/History_of_Europe#/media/File:Europe_map_1648.PNG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 당시의 유럽 국가들. 동양에서는 이렇게 복잡한 정치지도가 춘추시대 이후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https://en.wikipedia.org/wiki/Typewriter#/media/File:Chinese_typewriter.jpg 2450개 자판의 한자 타자기. 아무리 숙련된 타자수라도 알파벳 타자기의 능률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자 입력은 알파벳 자판을 쓰면서 훨씬 더 높은 능률을 올릴 수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Typewriter#/media/File:Japanese_typewriter_SH-280.jpg 2268개 자판을 갖춘 일본 타자기.

https://en.wikipedia.org/wiki/Asia#/media/File:Anaximander_world_map-en.svg 기원전 6세기 그리스인들이 생각한 세 대륙의 위치.

https://en.wikipedia.org/wiki/Europe#/media/File:Europa_Prima_Pars_Terrae_in_Forma_Virginis.jpg 유럽 여왕(Europa Regina)”(1582). 16세기에 유행한 그림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Pamir_Mountains#/media/File:Pamir_World_Wind.jpg 파미르고원의 위성사진.

https://en.wikipedia.org/wiki/Taklamakan_Desert#/media/File:Taklamakan.png 타클라마칸사막의 위성사진.

https://en.wikipedia.org/wiki/Mount_Narodnaya#/media/File:Mont_Narodna%C3%AFa.jpg 북위 65도에 위치한 해발 1894미터의 나로드나야산이 우랄산맥의 최고봉이라는 사실은 1927년에야 확인되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Pamir_Mountains#/media/File:Karakorum-d04.jpg 서쪽에서 바라본 파미르산맥. 북위 25~45도 사이에서 유라시아대륙은 세계에서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로 갈라져 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83604

 

[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16세기 급팽창한 유럽, 아시아 따로 떼내 구별짓기

대륙과 대륙 사이는 바다로 갈라져 있는 것이 원칙이지만, 좁은 지협으로 이어진 남북 아메리카나 아프리카는 별개의 대륙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로마인은 어떻게 구분했나 유럽과 아시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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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

 

역사학에서 고대-중세-근대의 3분법이 약화되고 있다. 3분법은 르네상스를 겪은 유럽인들이 빛나는 고전시대와 그 빛이 가려진 암흑시대를 거쳐 빛을 회복하는 시대로 들어선다는 자부심에서 시작한 것이었다. 근대역사학이 자리 잡은 뒤에는 노예제의 고대, 봉건제의 중세, 시민사회의 근대로 규정하는 기준이 3분법의 틀에 맞춰 널리 유행했다.

 

이 유럽산 시대구분법을 다른 지역에도 적용시키는 것이 얼마 전까지 각 지역 역사학계의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유럽 자체에도 이 기준의 엄밀한 적용이 어렵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왔다. 후기 중세와 초기 근대의 경계선이 어디인가? 유럽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시차가 있을 뿐 아니라 각 시대의 여러 특성이 질서정연하게 가지런히 바뀐 것도 아니다.

 

인간사회의 변화 경로에 지역에 관계없이 일정한 법칙성이 있으리라는 추정은 어느 정도 수긍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근대역사학에서는 이 법칙성에 대한 믿음이 지나쳤다. 유럽과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많은 지역으로 역사학의 관심이 넓혀지는 데 따라 시대구분 3분법은 규범적 법칙이 아닌 편의적 관행으로 바뀌어 왔다.

 

 

--3개 왕조의 연속성

 

나는 중국사 공부를 하면서 일찍 3분법을 버렸다. 시대구분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공부가 충분히 되기 전에 억지로 할 일은 아니라 생각하고, 일단 전통적 방식대로 왕조 기준에 따라 공부했다. 왕조 교체는 당시 사람들에게 하늘이 뒤집히는 것 같은 큰일이었던 만큼 실제로도 큰 변화의 계기였다.

 

그러다 보니 그중 큰 굴곡들이 서서히 떠오른다. 예를 들어 한나라 멸망에서 수나라 통일에 이르는 이른바 위--남북조 시대. 분열의 시대가 5백년 가까이 계속된 것은 통상적 왕조교체와 차원이 다른 변화였다. 그래서 진-한 제국과 수-당 제국 사이에 중화제국의 성격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티머시 브루크가 최근 <대국: 중국과 세계(Great State: China and the World)>에서 내놓은 시대구분 시도도 흥미롭다. 원나라를 기점으로 중화제국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관점이다.

 

브루크가 제시하는 이유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원나라 이후 난세(亂世)’가 짧아진다는 사실이다. “합친지 오래되면 갈라지고 갈라진지 오래되면 합쳐진다(合久則分 分久則合)”는 말처럼 중국사를 치란(治亂)의 반복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 관점이다. 그런데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의 쇠퇴가 장기간의 분열로 이어진 것과 달리 원나라 이후에는 왕조 사이의 교체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이다.

 

난세가 짧아진다는 것은 중화제국의 구심력이 커진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의 질서체계를 대표하는 왕조가 무너질 때 질서체계의 조속한 회복을 원하는 민심이 강하면 웬만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는 밴드왜건 효과가 일어난다. 그런 효과가 아니라면 명나라나 청나라가 자리 잡는 데 훨씬 더 긴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이 구심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시장경제의 발전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송나라 때 지역 간 분업이 크게 발달한 결과 정치적 분열이 경제를 해치는 정도가 달라졌다. 원나라가 쇠퇴할 때 주원장 세력을 지지한 사람들은 어느 세력이 정의로운가?” 따지기보다 어느 세력이 세상을 더 빨리 평온하게 만들어줄까?”를 더 많이 생각했을 것 같다.

 

 

왕조교체기가 짧아진 중화제국

 

아리스토텔레스가 진공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자연은 공백을 싫어한다고 말한 것처럼 원나라 이후의 중국은 권력의 공백을 싫어하게 된 셈이다. 그렇다면 명-청 교체에도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했다기보다 중국에 흡인되었다고 볼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원나라를 몰아내고 천하를 차지한 명나라는 몽골을 가장 큰 외부의 위협으로 보았다. 실제로 1449년에는 정벌군이 궤멸하면서 황제가 오히려 포로로 잡힌 일이 있었고 1550년에는 몽골군이 북경 일대에 침공한 일이 있었다. 그에 비해 만주족은 명나라 멸망 50년 전까지도 명나라와 몽골세력 사이에 끼어있는 미미한 존재였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세운 뜻은 명나라에게 조공국으로 인정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을 거부하고 정벌에 나선 명군이 사얼후전투(1619)에서 대패한 후 후금 세력이 크게 자라났지만, 1636년 대청제국을 선포할 때까지도 천하를 통째로 빼앗을 뜻은 없었다. , , 서하가 송나라와 천하를 나눠가진 것처럼 자기네는 만주지역의 주인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민란으로 무너졌다. 1644319(당시 역법 기준) 북경이 이자성(李自成)의 농민군에게 함락당할 때까지 청군은 오삼계(吳三桂)의 명군과 지리한 대치를 계속하고 있었다. 오삼계가 청나라의 도움을 청하자 도르곤(多爾袞)의 청나라 주력군이 49일 심양에서 출발해 422-23일에 산해관에서 이자성군을 격파하고 52일 북경에 입성했다. 이 엄청난 진군 속도에서 당시 명나라 관-민이 청군을 적극 배척하지 않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명나라의 통치력이 무너지면서 많은 관리와 장수들이 청나라에 투항했다. 부득이한 경우도 있고 이기적 선택도 있었지만 청나라를 천하 질서를 위한 대안으로 여긴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의 현실세력 가운데 농민반란군은 질서에 대한 근본적 위협이었고 몽골은 오랫동안 적대해 온 이질적 존재였다. 그에 비해 만주족은 농경문명을 많이 수용하고 명나라가 우월한 입장에서 관계를 맺어 온 상대였다. 원나라가 무너질 때 주원장 세력이 가장 덜 나쁜 대안이었던 것처럼 이제 청나라가 가장 덜 나쁜 대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대륙에서 해양으로 옮겨간 변화의 축

 

북경은 이자성군이 점령한 지 불과 달포 후 청군에게 넘어갔다. 청군은 도중에 산해관 전투를 치르고도 심양에서 북경까지 2천 리가 넘는 거리를 23일 만에 주파했다. 전투능력보다 그 행군능력이 돋보이는 신속한 정복이었다. 그리고 북중국을 휩쓸던 농민군을 그 후 1년 동안에 대략 평정했다.

 

북중국의 장악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반면 남중국의 평정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피도 많이 흘려야 했다. 남명(南明)의 저항이 10여 년간 지속될 만큼 남방에는 저항을 위한 인적-물적 자원이 있었던 것이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반감은 남북 간에 큰 차이가 없었을 텐데, 남방의 저항이 훨씬 더 끈질겼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남방 지방세력의 경제력이 눈길을 끈다. 남방의 농업생산력은 당나라 때 북방을 능가했고 송나라 때 촘촘한 수로를 갖추면서 시장경제가 발달했다. 게다가 해로를 통한 교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명나라 때 막대한 양의 은()이 중국으로 수입되었는데 중국에서 은의 교환가치는 다른 지역보다 1.5배 수준이었다. 그 차익의 대부분이 남방 지방세력의 손에 들어갔다.

 

민란이 북중국을 휩쓸고 북경을 함락시킬 때까지 남중국에서는 질서가 지켜지고 있었다. 이 질서의 주체가 지방세력이었다. 남방 지방세력은 강한 민병대를 조직할 재력을 갖고 있었다. 반란군에게 유린당한 북방 지방세력은 청군을 해방군으로 받아들였지만 자기 실력으로 자기 지역을 지킨 남방 지방세력에게는 청군이 침략군이었다. 3(三藩) (1676-1681)을 거쳐서야 남중국에는 청나라의 지배가 확립되었다.

 

-명 교체는 오랑캐의 지배를 몰아냈다는 점에서, -청 교체는 다시 불러들였다는 점에서 중국의 전통적 역사서술에서 중시되었다. 흉노 이래 북방 유목민의 위협을 중시해 온 관행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청 세 개 왕조를 통해 제국의 권력구조에도 사회경제적 구조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눈에 쉽게 보이는 북방의 위협보다 남방의 경제적 변화가 중화제국에 더 큰 위협을 키워가고 있었다. 해상활동의 확장에 따라 변화의 축이 대륙에서 해양으로 옮겨진 결과였다. 해외교역의 이득을 선점한 남중국의 경제력은 원-명 교체기에도 명-청 교체기에도 큰 힘을 보여줬고, 19세기 말 청나라 쇠퇴기에도 다시 존재를 드러낸다.

 

https://en.wikipedia.org/wiki/Transition_from_Ming_to_Qing#/media/File:Battle_of_Shanhai_Pass.png 산해관 전투 개념도

https://en.wikipedia.org/wiki/Hong_Chengchou#/media/File:%E6%B4%AA%E6%89%BF%E7%95%B4.jpg 1642년 청나라에 투항한 후 청나라의 정책에 영향을 끼친 홍승주(洪承疇, 1593-1665)에게는 매국노[漢奸]와 경세가의 평가가 엇갈린다.

https://en.wikipedia.org/wiki/Shi_Kefa#/media/File:%E5%8F%B2%E5%8F%AF%E6%B3%95%E5%BD%A9%E5%83%8F.jpg 사가법(史可法, 1601-1645)은 청군의 남진에 가장 치열한 저항이었던 양주(揚州) 전투를 지휘하고 순절했다. 백년 후 건륭제가 충정(忠正)’의 시호를 내린 것은 청나라에 대한 남방의 반감이 그때까지 남아있었음을 보여준다.

https://baike.baidu.com/pic/%E5%90%B4%E4%B8%89%E6%A1%82/253974/1/86d6277f9e2f0708550487b7ea24b899a901f200?fr=lemma&ct=single#aid=0&pic=b7003af33a87e950911171d813385343fbf2b404 오삼계(吳三桂, 1612-1678)는 명-청 교체과정의 여러 단계에서 열쇠 노릇을 한 인물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Transition_from_Ming_to_Qing#/media/File:Qing_Empire_circa_1820_EN.svg 청나라의 중국 평정과 주변부 확장 연대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