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사법당국의 피노체트 체포, 그리고 그에 이어진 고등법원과 상원의 처리과정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독재정권의 인권유린은 우리도 뼈아프게 겪어 본 일이고 세계 여러 곳에서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범죄적 인권유린의 책임은 지금까지 국가주권을 중심으로 처리돼 왔다. 그 동안 국가를 파탄에 몰고 간 여러 독재자들이 퇴출과정에서 후속정권과 협상을 벌여 최후의 극한상황을 피하는 대신 편안한 여생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그런데 이제 피노체트의 경우를 보면 본국의 후속정권을 제쳐놓고 제3국들이 그의 ‘통치행위’를 심판하러 나선 것이다.

 

피노체트 체포의 이유는 물론 칠레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스페인인 살해에 있다. 그러나 타국의 전 국가원수며 종신직 상원의원인 인물을 체포하는 이례적인 조치는 그를 명예로운 국가원수가 아니라 추악한 독재자로 보는 시각이 배경에 깔려 있지 않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당장은 칠레 정부가 그의 석방을 요구하며 펄펄뛰고 있지만 칠레의 국론은 결국 그의 처벌을 수긍하는 쪽으로 기울리라 예상하기에 선전포고 같은 극단적 사태는 걱정하지 않고 체포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제3세계 권력자들 중에는 불안해 할 사람들이 많다. 지난 주 유럽여행에 오른 콩고의 카빌라 대통령은 선발대를 앞세워 보내 행여 체포영장이 나와 있는 것은 없는지 알아보고 난 뒤에야 길을 떠났다는 소문이 돈다. 격렬한 내전을 통해 작년에 권력을 장악한 카빌라는 내전의 참상을 조사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을 가로막고 있는 인물이다.

 

인권옹호를 위한 노력이 국경의 장벽을 넘어서게 된다는 점에서 피노체트 체포를 환영하는 여론이 높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려도 있다. 순조로운 퇴출의 길이 막힌 독재자들이 ‘목숨을 걸고’ 자리를 지키려 듦으로써 더 참혹한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대국의 약소국 주권침해에 인권의 기준이 무기로 쓰일 가능성도 지적된다.

 

선진국들이 대개 피노체트 처벌에 동의하는 가운데 유독 미국만은 반대 입장이다. 1973년의 칠레 쿠데타에서 미국이 행한 역할이 밝혀질 것을 꺼릴 뿐 아니라 많은 미국인의 해외여행이 어려워지리라는 관측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퇴임한 뒤 어느 회교국가에 여행하다가 오폭(誤爆)으로 인명을 잃은 수단 정부의 요청으로 체포되는 일이 일어나면 어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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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