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일만이천봉이 눈 아니면 옥이로다.

헐성루 올라가니 천상인 되였거다.

아마도 서부진화부득(書不盡畵不得)은 금강인가 하노라.”

 

백여년 전의 가객(歌客) 안민영(安玟英)의 시조는 금강산을 그린 수 없는 글과 그림으로도 금강산의 영기(靈氣)와 아름다움을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음을 설파한다. 일제시대의 화가 모리타 류코(守田龍光)도 “금강산의 경치는 화가의 머리로 도저히 구상할 수 없는 그림이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변하니 그만 붓을 던질 수밖에 없다.”고 탄식했다.

 

금강산이 역사에 뚜렷이 나타나는 것은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때 마의태자가 이에 불복,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풀을 뜯어먹으며 일생을 마쳤다는 대목이다. 그리고 장안사, 표훈사 등 금강산의 유서깊은 절들은 앞서 6-7세기에 신라 승려들이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금강산이 시인-묵객들의 명소로 떠오르는 것은 고려말 이후다. 몽고 지배에서 벗어나고 중앙정부의 지방통제가 안정되면서 신진 사대부계층의 국토유람이 자유롭게 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금강산유람기로 가장 오래된 것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李穀)이 1349년에 쓴 것이다.

 

이 무렵 금강산의 아름다움은 해외까지 알려진 모양이다. 중국 사신들이 모두 금강산 유람을 원해 태종이 신하들에게 까닭을 물으니 화엄경에 “해동에 보살이 사는 금강산이 있다”고 한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한다. 성종 때는 일본사신으로 온 승려가 금강산 유람을 원해 조정에서 논의 끝에 거부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이 눈앞에 닥쳐오며 부정적 견해도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겨레의 명산에 접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 휴전선을 뛰어넘게 된다는 상징성만으로 감격에 겨웠던 몇 달 전 분위기와 비교하면 사람의 마음은 간사하기도 하다. 그래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는 것일까.

 

입산료 3백 달러가 많다고 탓하고 북측이 보여주는 길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고 투정하는 사람들은 금강산도 금세 설악산, 지리산 꼴이 되기를 바라는 것인가. 조선시대 사람들이 금강산 유람을 위해 들인 수고는 3백 달러 어치가 훨씬 넘는다. 지금 북한사람들도 금강산 구경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금강산이 지금 상태라도 지켜온 것은 자본주의와 격리된 통제사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덕분이다. 우리가 금강산을 어떤 모습으로 후손에게 남겨주게 될지 걱정을 시작할 때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