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7>

기사입력 2002-07-25 오전 9:14:20

  대한민국의 국체 성립과 유지미국처럼 큰 도움을 준 나라가 없다. 도움 정도가 아니라 미국의 뜻에 따라 만들어지고 움직여진 나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남 아닌 이 나라 사람들이 때로는 해야 할 정도다.
  
  한국 정부 욕하는 놈보다 미국 정부 욕하는 놈들을 더 엄하게 다스리던 80년대까지 되돌아볼 필요 없이, 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워싱턴부터 달려가는 행태나 이 나라에서 벌어진 이 나라 백성에 대한 미군의 범죄를 이 나라가 다스리지 못하는 사정이 변함없으니 그런 생각이 더러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광복절 기념행사에 미군을 앞장세우지 않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허기야 아무리 속으로는 상전 받들 듯하더라도, 그리고 실제로 작전지휘권까지 맡겨놓고 있다 하더라도, 명색이 독립국으로서 남의 나라 군대를 국경일 행진에 앞장세울 수는 도저히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나라가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것도 자존심 높기로 소문난 프랑스에서 지난 주 혁명기념일 퍼레이드 선두에 웨스트포인트 사관생도들을 나란히 걷게 했다는 보도를 보니, 어찌된 상황인지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다.
  
  파리의 친구 클레망텡 교수에게 메일 보내는 길에 이 일을 물어보았다. 며칠 후 답장에 뜻밖에 긴 설명이 들어 있었다. 무심히 넘겨 온 일인데, 막상 질문을 받고 보니 자기도 묘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면서 개인적 의견이라는 전제하에 설명을 해주었다.
  
  프랑스인, 특히 지식인들은 ‘미국’에 대해 널리 반감을 가지고 있는 데 반해 ‘미군’에 대해서는 호감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미국의 민간인 관광객보다 군복을 입은 미군 장병이 프랑스 어디서든지 더 친절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프랑스인들은 1944년 여름 프랑스 해방에 미군이 맡았던 역할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1944년의 프랑스 해방을 상징하는 장면으로 파리 시민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연합군 진입을 환영하는 모습, 기쁨에 겨운 한 젊은 여인이 여러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미군병사와 진한 키스를 나누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데 프랑스인들을 아직도 감격시키는 다른 장면을 클레망텡 교수가 말해 준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미군 지휘관이 “라파예트, 우리가 왔소! (Lafayette, nous voici!)”라고 외치는 장면이다. D-데이를 다룬 전쟁영화에는 꼭 나오는 장면이라고 한다.
  
  히딩크가 한국 최고의 외국인 영웅이라면 라파예트 후작(1757-1834년)은 미국 최고의 외국인 영웅이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으니 월드컵 4강과는 체급이 다른 영웅이다. 그래서 2백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국의 영웅으로 이름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1777년 7월, 독립전쟁이 발발한 지 2년이 넘은 시점에서 프랑스 명문 귀족 출신의 20세 청년이 독립군을 돕겠다고 찾아가 바로 장군에 임명되었을 때, 독립군 내에도 그 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바로 두 달 후 브랜디와인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고, 이듬해 봄의 배런힐 전투에서는 퇴각에서까지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779년에는 프랑스로 돌아와 루이 16세로부터 6천명의 파병을 받아냈고, 이듬해 다시 건너가 코널리스 경이 지휘하는 영국군을 제압함으로써 독립전쟁의 매듭을 지었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천재적 군사적 재능과 진보적 정치성향을 아울러 확인받은 라파예트는 프랑스로 돌아온 후 1789년 대혁명이 발발하자 그 초기단계에서 큰 역할을 맡았다. 혁명의 진행에 따라 왕정 유지를 옹호하던 그는 공화파의 숙청대상이 되어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가 나폴레옹이 집권한 뒤에야 귀국하는 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1830년 루이필립 왕 즉위에 이르기까지 시민계층 중심의 정치발전에 꾸준한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
  
  1917년에도 1944년에도 미군은 프랑스의 해방군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러 온 것이 아니라 독립전쟁의 은혜를 갚으러 온 것이라고 선전했다. 미군 병사들의 사기 앙양을 위해서도 효과적인 선전이었고 프랑스인의 협조적 태도를 유도하는 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태도였다. “은혜를 갚으러 왔소!” 참혹한 전쟁에 시달려 온 피점령국 백성의 마음을 얼마나 기쁘면서도 편안하게 해주는 말인가.
  
  프랑스의 선물,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의 상징이자 미국의 상징으로 버티고 있는 배경에는 근대세계 최초의 공화국 미국의 탄생을 두 번째 공화국 프랑스가 도와주었다는 자랑스러운 신뢰관계가 깔려 있다. 그래서 경제적-군사적 위축 속에서도 프랑스인들은 자존심을 지키며 대범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 후손들이 미국을 해방시켜 주러 가서 “샘, 우리가 왔소!” 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