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 4. 09:44

2002년 가을, 객원으로라도 여러 해 걸치고 지내던 신문사를 빠져나와 중국에 가서 두어 해 지낼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신문사에서 함께 일하다가 얼마 전 그만두고 프레시안을 차리고 있던 이근성 씨가 류 선생을 소개해 줬다. 김 선배가 중국에 관심 가지는 방향에 도움 될 만한 분이 마침 서울 와 있으니 한 번 만나보라는 것이었다.

중국 조선족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을 때였다. 류 선생 얘기 들으며 개념이 잡힘에 따라 흥미가 끌린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중국을 관찰하더라도 한국인의 입장에서 관찰하려는 것인데, 대학까지 갖추고 있는 백만 인구의 조선족사회가 존재한다면 중국 관찰의 출발점으로 생각할 만한 곳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샘플의 품질로 보아 조선족사회 그 자체도 관찰의 가치가 클 것 같았다.

그래서 그 해 연말 연길을 방문해 십여 일 지내본 다음 바로 연길 체류 계획을 세웠다. 류 선생의 가까운 동료 리혜선 선생과 우광훈 선생, 그리고 신화서점의 리명호 경리와 면을 텄는데, 너무 심심한 곳이 될 염려는 바로 접어놓을 수 있었다. 일단 1년간은 그곳에서 지낼 결심을 하고 봄부터 지내도록 아파트 구해놓을 것을 부탁하고 서울로 돌아왔다. 체류기간 동안 비치하고 지낼 책을 골라놓는 것이 필요한 준비라면 준비였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터졌다. 박 여사가 이혼을 요구한 것이었다. 7-8년간의 결혼생활에 나는 큰 불만이 없었는데 그는 불만이 매우 컸다는 사실을 그 무렵에 비로소 알게 되어 의아해 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중국 가서 2-3년 지낼 계획을 세우려니 중국어학원도 열심히 다니고 해서 불만을 채워줄 만한 시간 여유는 있겠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가자는 곳이 북경도 아니고 상해도 아니고 연길 구석이라고 하니까 바로 이혼하고 혼자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혼을 해놓고 연길로 가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홀몸이 되어 연길에 나타난 것을 보고 류 선생이 책임감을 느껴서 그렇게 여자 붙여주려고 애썼던 것인지, 아니면 원래 노는 게 그런 식인지. 굳이 판단한다면 원래 그런 식으로 노는 건데, 내게는 좋은 인연 만들어줬으면 하는 마음이 그 위에 조금 겹쳐진 정도 아니었을까. 매주 한두 차례 한 잔 함께 하려고 만나면 꼭 여성들을 불러다가 함께 놀자고 했다.

류 선생은 언행,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극도로 어긋나는 사람이다. 말하는 것으로는 세상에 이런 잡놈, 이런 패륜아가 다시 없다. 그런데 행동은 도덕군자 정도가 아니라 천사처럼 순결한 인간이다. 욕심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원하는 것이 있고, 원하는 것을 잘 챙기기도 한다. 그런데 무엇을 원한다는 사실에 대해 아무 죄의식이 없다. 죄의식을 느낄 만한 욕망에 대해서는 자기검열을 철저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받은 전체적 인상은 건전한 욕심이 너무 크고 강해서 다른 욕망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이다.

함께 술 마시고 놀기 위해 류 선생이 불러낸 여성이 수십 명이 되는데, 직업도 품성도 참 각양각색이다. 그런데 한결같은 것은 류 선생 있는 자리에서 함께 노는 것을 다 나름대로 편안해 하는 것이다. "나름대로"라고 한 것은 노는 방식도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그중에는 류 선생을 한두 번밖에 보지 않은 것 같은 분들도 있었는데 모두 거리낌없이 류 선생을 편안하게 대한 것을 생각하면 그 사회에서 자기류의 풍류남아로서 평판을 가졌기 때문이 아닐지. 그리고 류 선생도 편안하게 대할 만한 상대를 알아보는 눈썰미가 좋았던 것이 아닐지.

내 아내가 될 리 여사는 리명호 경리와 함께 신화서점에서 일하고 있었고, 류 선생과도 잘 아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 동료들 거의 모두와 술자리에서 사귀는 동안 나는 리 여사와 대면을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류 선생이 불쑥불쑥 자리에 없는 리 여사를 언급한 이런저런 말이 쌓여 내 마음속에 하나의 인상을 빚어내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도 아직 잘 모르겠다. 그가 얼마나 그 사람을 내 짝으로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그런 언급들을 했던 것인지. 무슨 일을 하든 허허실실의 묘미가 워낙 넘치는 사람인지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