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기 박정희가 일본관동군에 있었다는 사실은 세인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연변역사학계에서는 그가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 있었다는 것과 아니면 목단강부대에 있었다고 하는 두 가지 설이 엇갈리고 있다. 그러나 1980년로부터 1990년대까지만 해도 특설부대설이 정설로 되어 왔다. 그것은 특설부대 출신의 사람들의 증언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처음 간도특설부대설을 내놓은 사람은 역사학자 차상훈선생이다. 그는 안도현에서 공작하면서 특설부대 출신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증거를 장악하고 1987년에 안도현 조선족역사발자취총서 <<겨레 발자취>>(제1집)에 발표하였다. 그 후 1991년에는 조선족역사학계의 인정을 받아 그 글이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 제4집 <<결전>>에 전재되기도 했다.

그런데 1990년대 말부터 한국과의 역사교류가 빈번해지면서 몇몇 조선족 역사학자들은 간도특설부대설을 부정하고 나왔다. 그 이유는 문헌자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 설 중에서 나는 특설부대설이 진실에 가깝다고 인정한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일제시기 박정희가 일본관동군에 있었다고 하지만 겨우 중대장급에 불과한 인물이므로 당시의 기록에서 그의 행적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첫 번째 설에 대해 부정할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기록에 없다는 그 한가지로써 당시 박정희와 부대생활을 같이 했던 사람들의 증언을 일소해버리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더구나 박정희가 한국에서 만주로 와서 안도 명월구에서 특설부대에 참가하였다고 하는데 그 사실 여부를 당시의 문헌자료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당시 특설부대 성원은 700명도 더 되었고 현존의 특설부대 서류에는 특설부대 성원 모두가 명부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국에서는 일제시기의 박정희에 대해서는 역사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가 자못 궁금하다. 박정희 자신이 생전에 한 말이나 그의 동료들의 증언에 기초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조작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일대의 독재자인 박정희에 대해 감히 누가 오점을 건드릴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박정희가 특설부대에 있었는가 아니면 목단강부대에 있었는가 하는 데 따라서 박정희의 친일의 유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박근영씨가 박정희가 특설부대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죽은 아버지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검찰에 신고까지 하였다고 하는데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정희가 목단강부대에 있었다고 가설해 보자. 특설부대 역시 일본관동군 목단강부대의 소속이다. 그리고 목단강부대가 열하에가서 팔로군토벌에 참가하면서 안도에 주재했던 특설부대도 열하로 출전을 했다. 가정하여 박정희가 특설부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본군에 근무하면서 팔로군토벌에 참가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특설부대의 팔로군토벌은 친일이고 다른 부대의 소속으로 있으면서 팔로군을 토벌한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그것은 일찍 박정희 독재통치시기에 일본군이 빨갱이인 공산당 팔로군을 토벌하고 박정희 역시 일본군을 따라 빨갱이인 공산당 팔로군을 토벌하였으므로 일본군에도 죄가 없고 박정희에게도 죄가 없다는 식의 사유의 변종이라고 생각된다. 둘 다가 친일을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박정희는 대통령으로 있을 당시 일본군 군관으로 공산당토벌을 한 것을 자랑으로 여겨 반공용사로 둔갑을 하고 국민 앞에 나섰다고 한다. 분명 열하에서의 토벌 대상은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부대였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팔로군은 어떤 부대인가? 팔로군은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부대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폭발하자 장개석이 영도하는 국민당과 모택동이 영도하는 공산당은 일치 단결하여 일본침략자를 몰아내기 위하여 국공합작을 이루었고 중국 방방곡곡에서 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공산당의 노농홍군은 국민혁명군 제 팔로군으로 편성되었던 것이다. 그 속에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인 조선의용대가 있었다. 국민혁명군의 통수는 장개석이고 팔로군 총사령은 공산당의 주덕이었다.

보다시피 팔로군은 공산당 부대이기 앞서 항일군이었다. 그 유력한 증거로 백퇀대전(百團大戰) 하나만 예로 든다. 1940년 8월부터 12월까지 팔로군 115개 퇀(團: 연대와 같음) 40만 대군이 화북전선에서 일본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였다. 무려 3개월 반 동안 진행된 이 전역에서 팔로군은 1,800여 차의 대소 전투를 하였고 일본군과 괴뢰군 4만 3천 여명을 섬멸하였다. 이 전역에서 대패한 일본군은 그 다음부터 토벌의 예봉을 팔로군한테 돌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팔로군을 토벌한 것을 반공이라고 하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것이다. 1945년 8.15광복 전의 반공은 철두철미한 친일이다.

바로 박정희는 자원하여 일본군에 참가하였고 나중에는 일본군 군관의 신분으로 열하에서 팔로군토벌에 참가하였다. 그는 분명히 친일을 한 것이다. 그런데 특설부대를 들먹이면서 명예훼손을 들먹이는 것은 당시의 중국의 항일투쟁에 대한 모독이며 일본침략자들과 함께 중국침략을 미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 역시 장개석의 국민정부의 지지성원으로 건립되었고 국민혁명군의 통일적인 영도하에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만약 박정희의 명예훼손이 성립된다면 김구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항일구국투쟁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과거 침략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일본군국주의자들과 오늘 날 일본 내 극우세력들의 비열한 수단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반공으로 친일을 미화하는 것 역시 한국 친일파들과 그 의발을 이어받은 한국 극우세력의 상투적 수단이다. 지금도 일본의 군국주의 세력들이 침략을 발동하여 아시아 여러 나라에 막대한 재난을 입히고도 사죄를 하지 않고 있듯이 한국 내 어느 친일파가 사과를 한 적이 없고 그 어느 자손이 부끄러워한 적이 있는가? 오히려 그 자손들이 재산 찾기에 분분하고 명예훼손죄로 고소하면 법이 손을 들어주는 것이 한국의 현실임을 안타깝게 지켜본다.

2005년 4월 8일 

박청산(朴靑山)
1959년 중국 길림성 연길현 태생
1985년 동북사범대학 역사학부 졸업
1985년부터 현재까지 연변인민출판사 역사편집, 부편심.
<<20세기 중국 조선족 역사자료집>> 편집 위원회 위원.
저서:
<<력사지리사전>>
<<상용지식편람>>
<<이야기 중국 조선족역사>>
<<연변항일혁명사적지 답사연구>>
<<내 고향 연변>>
그 외 역사논문 다수


차상훈(車相勛)
1937년 11월 6일 길림성 화룡시 남평진 태생
1962년 동북사범대학 역사학부 졸업
1962년 8월부터 1966년 5월 연변주 량식처 간부
1966년 5월부터 1971년 안도현 영경향 량식관리소 간부
1971년부터 1976년 안도현 영경공사 당위 선전위원
1977년부터 1980년 안도현 조직부 간사
1980년부터 1983년까지 안도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판공실 주임
1984년부터 1994년까지 안도현 정치협상회의 문사자료판공실 주임.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