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해문집에서 이 책의 원고를 파일로 보내주며 발문을 청했다. 애써 내는 책의 발문을 청해준다는 것이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원고를 훑어보고 잠깐 생각한 다음 사양하는 답장을 보냈다. 중요하게 보이는 내용이 너무 많이 담겨 있어서 격식을 갖춘 짤막한 발문보다 넉넉한 길이의 서평을 마음대로 쓰고 싶어서였다.
그래서 나온 책을 이제 막 받아 하던 일 제쳐놓고 서평을 쓴다. 식민지시대 한일관계 관련 주제들을 탐구해 온 여덟 사람을 소개하는 책인데(그중 조동걸 외에는 모두 일본에서 활동한 이들이다.) 나는 일단 미야타 세쓰코 얘기만 하겠다.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도 흥미로운 점이 많지만, 내가 서평을 꼭 쓰고 싶어 한 것은 미야타 때문이었다.
1935년생의 미야타는 1958년 와세다대학 졸업논문에서 3-1운동을 다룬 이래 식민지시대 한국사 연구를 계속해 온 분인데, 50년 연구생활을 통해 출간한 연구서가 두 권뿐이라면(<조선민중과 황민화 정책>(1985)와 <창씨개명>(1992, 공저)) 생산력이 시원찮은 연구자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불세출의 업적을 이뤄낸 연구자다.
그 업적이 <미공개자료 조선총독부 관계자 녹음기록>이다. 대학을 갓 졸업한 미야타가 중심이 되어 4년간(1958~62년) 전 조선총독부 간부들과 젊은 학생들이 함께 한 수백 회의 세미나 녹음자료다. 나는 이 자료 내용도, 그에 대한 서지적 설명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종전 후 십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선 통치 관계자 여러 명의 자발적 증언을 이렇게 집중적으로, 그리고 체계적으로 이끌어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해방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어떤 자료를 어떻게 없앴는지 구체적으로 밝힌 연구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자료가 파기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면사무소와 주재소에서까지 서류 태우는 연기가 피어올랐다고 한다. 일본은 몇 달 전부터 항복을 예견하고 대비책을 세워놓고 있었으며, 조선의 행정과 경찰은 8월 15일 이후에도 20여 일간 총독부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없애고 싶은 자료를 없앨 시간은 충분했다.
없애고 싶은 자료만이 아니라 없애고 싶지 않은 자료도 많이 없앴을 것이다. 사상범 탄압 관계 자료를 생각해 보자. 사상범 탄압 과정에는 범죄적 행위가 많았으므로 점령군에게 추궁당할 것이 두려워 없애고 싶었을 것이다. 일선 주재소에서 제일 먼저 태워 없앤 것도 사상범 수배 자료였다고 한다.
그런데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 지휘부의 반공 성향은 9월 8일 도착 전부터 총독부에 알려져 있었다. 일본인으로부터 조선 통치를 물려받는다는 생각을 가진 하지 사령관은 일본인을 우대하며 도움을 청했다. 이북에 있던 일본인들이 소련군에게 받은 냉대와 박해에 비해 이남의 일본인은 우대와 보호를 받았다. 미군의 성향과 노선이 밝혀지면서는 자료 파기의 강박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사상범 관계 자료 같은 것을 미군에게 넘겨주면 책임 추궁은커녕 고마워하며 사례했을 것이다.
미야타 세쓰코가 조선총독부 출신 노인들과 세미나를 시작한 1958년이 어떤 때였는가?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으로 전쟁 책임에서 벗어난 지 7년, 자본주의 진영의 동아시아 거점으로 든든한 자리를 잡고 있을 때였다. 군국주의 일본의 주류 세력이 “부국강병책은 역시 옳은 노선이었어.” 자부심을 되찾고 ‘잃어버린 10년’을 아쉬워하고 있을 때였다. 미야타가 만난 노인들이 조선 통치의 역할을 자랑스럽게 회고하고 있을 때였다. 경황 중에 없애버린 자료들을 아까워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24세였던 미야타의 상대역은 70세 노인 호즈미 신로쿠로(穗積眞六郞, 1889-1970)였다. 내 <해방일기> 작업에서도 특이한 역할이 눈에 띄었던 인물이다. 해방 때 경성전기 사장으로 있다가 일본인의 순조로운 조선 철수를 돕는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이다. 이제 알고 보니 당대 일본의 손꼽히는 명문가 출신으로 청년기부터 조선총독부에서 근무, 식산국장까지 지낸 사람이었다.
미야타가 주도한 세미나에 참석했던 강덕상은 호즈미를 ‘은사(恩師)’로 생각한다고까지 말했다. 그가 교활한 식민주의자가 아니었냐는 저자의 물음에 강덕상은 이렇게 답했다.
아니다. 식민지 시절에는 관료로서 여러 가지 일을 했겠지만 인간성은 좋은 사람이다. 나는 대학 선생들한테는 하나도 배운 것이 없지만 이 사람은 내 은사라고 생각한다. 우방협회 세미나에서 간토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문제와 관련해 발표한 적이 있다. 호즈미는 발표 내용을 듣고 나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며 공부를 더 하라고 말했다. (...) 자신을 설득할 수 있어야 다른 일본인들이 납득할 것이라고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내 연구가 더 탄탄해졌다고 본다. 내가 일본인을 비난하고 나서는 조선 놈이라는 의식이 호즈미에게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게 아양을 떠는 조선 사람은 싫다고 했다.(97쪽)
호즈미는 관료 등 조선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모임인 우방협회(友邦協會)의 이사장이었다. 1957년에 미야타가 졸업논문을 위한 귀중한 자료를 우방협회에서 발견하고 자주 드나드는 동안 그 공부하는 자세를 눈여겨보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조선 통치기의 자료를 모으는 자기네 작업에 함께 할 것을 제안했고, 미야타는 강덕상 등 동료 연구자(라기보다 학생)들을 모아 조선근대사료연구회를 만들고 우방협회 회원들과 세미나를 열게 된 것이었다.
미야타는 이 세미나를 “오월동주(吳越同舟)의 세미나”로 회고한다. 우방협회 회원들은 군국주의 노선을 애국적인 것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들이었고 모두가 호즈미처럼 열린 마음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반면 젊은 학생들은 설령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일반적이었다. 이질적인 두 집단 사이의 접점을 만들고 유지시키는 데 호즈미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미야타는 회고한다.
우방협회 내부에서는 호즈미가 왜 빨갱이 같은 젊은 애들에게 총독부의 모든 자료를 공개하느냐며 뒷전에서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호즈미에게 대놓고 불만을 얘기하지는 못했다. 호즈미가 명문가 출신으로 요직을 지낸 데다 패전 후 본국으로 황급하게 철수하는 일본인 지원 모임을 만들어 식량, 의료, 숙소 등의 편의를 제공하는 등 헌신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국에는 만주, 북조선 등에서 오는 일본인들로 넘쳐났다. 호즈미는 일본 패전 후 바로 귀국하지 않고 온갖 경로를 통해 자금을 모아 일본인 귀환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그러다 전복 음모를 꾸민다는 혐의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잠시 수감된 적도 있다고 들었다.(154쪽)
해방 후 조선에서 호즈미의 세와노카이(世話會) 활동이 미야타가 여기 적은 것처럼 인도적인 성격만 가진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끝에 적은 형무소 신세 이야기가 아마 ‘김계조 사건’에 연루된 일일 것이다.(<해방일기 2> 373-377쪽) 호즈미 등 일본인 거물들이 친일파 사업가 김계조에게 거금을 제공해 댄스홀을 만들어 미군정 간부들을 끌어들이는 등 일본인에게 유리한 ‘공작’을 시킨 사건인데, 이것이 간첩행위로 적발되었던 것이다.
이런 정치공작의 측면이 호즈미의 권위를 그 그룹 안에서 더욱 높여주었을 것이다. 우방협회에서 그 권위는 식산국장과 경전 사장 정도의 경력을 훨씬 뛰어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근대사료연구회 세미나 출석을 호즈미가 부탁하면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고, 정무총감을 지낸 사람도 셋이나 출석했다고 한다.
1942년 5월에서 1944년 7월까지 정무총감을 지낸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의 태도가 미야타에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다나카는 “자기가 답변할 수 없을 정도로 공격해 들어오라며” 도발적으로 나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선에서 했던 일에 대해 당당한 태도는 우방협회 회원들이 모두 공유한 것이었다.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무조건 정당화하려 하지 않았나?” 하는 저자의 질문에 미야타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지 않은 것이, 그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잘못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좋은 일을 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식민지라는 말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에 받은 가장 큰 충격은 식민지라고 말하면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혼이 났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는데, 식민지라는 것은 영국의 인도 지배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한 적이 없다.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하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한 것뿐이다.”(151-152쪽)
조선 통치기의 공식 이데올로기였던 ‘내선일체’ 주장을 그들은 그대로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패전의 충격이 일본사회에 일으킨 군국주의 반성에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 지금 일본의 극우파가 유럽 극우파와 달리 군국주의 시대 이래의 연속적 전통을 가진 측면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앞세워 일본 지배를 정당화하는 뉴라이트 현상도 같은 맥락에 들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호즈미 같은 사람의 조선 지배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내선일체’에 대한 맹목적 믿음 정도는 뛰어넘은 사람이었을 것 같다. 일본의 조선 지배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도, 절대적으로 그른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자기처럼 그에 종사한 사람들에게 잘한 일도 있고 못한 일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미야타가 1963년경 공산당 기관지 <아카하타(赤旗)>에 기고한 글 때문에 우방협회 회원들의 비난을 받을 때 호즈미가 보인 반응에서 그런 느낌이 든다.
호즈미는 얘기를 듣고 나서는 “그런 것을 얘기하는 우방협회가 나쁘다. 신경 쓰지 마라.”라고 했다. 그렇게 큰 전쟁을 치르고 패전하고 나서 아무도 반성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너희들이 공산주의의 어디가 나쁘냐고 정색하고 물으면 대답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까지 하더라.(156쪽)
강덕상이 호즈미를 스승으로 여긴다고 했는데, 이런 대목을 보면 그에게 역사학자의 스승 자격이 있다고 나도 생각된다. 그는 조선 지배와 군국주의의 정당성에 맹목적인 믿음을 가진 우방협회 다수 회원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스승’의 자격까지 얘기할 것이 없다. 내가 탄복하는 것은 자신보다 생각이 덜 열린 동료 회원들을 더 열린 쪽으로 이끌어가려는 자세다.
조선 통치의 주역으로서 우리 경험을 감추려 들기보다 당당히 내놓고 우리 스스로 그 의미를 잘 새기자고 호즈미는 동료 회원들에게 권한 것이다. 자기 동료들이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반대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 동료들이 좌익의 군국주의 비판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서 본능적 방어 심리로 ‘빨갱이’를 미워하는 데 반해, 호즈미는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는 자신감을 갖고 비판을 환영한 것이다.
한국 사회의 읽을거리에서 솔직한 회고록의 비중이 작은 것이 생각할수록 심각한 문제다. 두드러진 역할을 맡은 사람들 중 자신의 행적에 근본적인 자신감을 가진 사람이 적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의 하나다. 일본에도 솔직한 공개를 어려워하는 문화적 풍토가 있는데, 호즈미처럼 자기 경험만이 아니라 동료들의 경험까지 털어놓도록 이끌어낸 것은 대단히 소중한 역할이다.
미야타 세쓰코의 인터뷰 이면에서 나는 호즈미 신로쿠로의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인터뷰의 직접 대상이 아닌 인물까지도 이처럼 생생하게 그려낸 저자의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호즈미의 인상이 너무나 강렬해서일까, 나는 미야타 자신의 이후 활동에서도 호즈미의 모습이 겹쳐지는 느낌을 거듭해서 받는다. 미야타가 자기 개인 연구보다 조선사연구회, 일본조선연구소 등 동료들의 조직적 활동을 돕는 데, 그리고 우방협회 세미나 자료를 잘 살려내는 데 큰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이 호즈미의 취향을 닮은 것처럼 보인다. 교수직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에 몰두해 온 근본적 자신감도 그렇다.
호즈미와 미야타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자료를 나 자신 활용하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자료가 존재할 수 있게 해준 사실 자체에 대해 두 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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