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는 8월 7일 밤을 기해 삼엄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서울신문> 1946년 8월 9일자의 “제1관구경찰청, 극비밀리에 좌익계 인사 검거·취조” 기사가 이 사태를 보여준다.


제1관구경찰청에서는 7일 밤 여덟시 장택상 지휘아래 시내 10개 경찰서원 중 정예분자 3백여 명을 비상동원시켜 활동을 개시하여 정계의 중요인물 수 명을 검거한 후 취조를 개시하고 있는데 경찰청에서는 청장실 차장실 수사과장실 수사계원실의 출입을 엄금하고 일찍이 볼 수 없는 엄중한 경계를 하는 한편 계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려 사건을 극비밀리에 부치고 있다.

8·15 해방기념일을 앞두고 정계가 자못 긴장하여 가는 때인 만큼 경찰에서 극비밀리에 취급중인 이 사건의 내용은 각 방면의 주목을 끌고 있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위폐 사건 공판 날 발포소동 끝에 죽은 전해련 군의 사회장 집행에 관련한 사람이 속속 호출되어 문초를 받고 있는 점에 비추어 이날 검거된 사람들이 도화선이 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며 또한 반일운동자구원회의 이영이 검거된 것과 좌익요인 이강국 김오성 제씨가 7일 밤 가택수색을 당한 것과 역시 이날 인민당 김세용의 가족이 소환되어 문초를 받은 사실 등 이 모든 점이 이 사건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사건에 관하여 경찰청장 장택상은 경찰로선 지금까지 가장 중대한 사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사건내용은 후일 발표할 것이다. 이 사건에 관련된 자는 그대로 못나갈 것이라고 말할 뿐 일체 함구불언하고 있는데 경찰청 내 출입금지는 2·3일간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이튿날의 <서울신문> “제1관구경찰청, 좌익계 모종음모 사건 관련자 김세용 등 검거에 주력” 기사를 보면 좌익만이 아니라 독촉국민회의 신익희, 한민당의 백관수 등 우익 인사들의 가택수색도 있었다 하니 시민들의 불안감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인민당 조직부장이자 좌우합작회담 비서인 김세용이 경찰의 제1 표적이었는데, 본인은 피신하고 모친, 부인과 처제가 연행되었다고 한다.


8월 11일자 <동아일보>에는 장택상 경기도(제1관구) 경찰부장의 말이 실려 있다. 엄청난 사건을 적발했다는 것이다.


“8월 15일은 조선이 해방을 한 기념일인 동시에 또한 세계의 민주주의가 결정적으로 승리를 획득한 의의 깊은 역사적 기념일이다. 이날을 이용하여 감히 모종기관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려는 것은 이 날을 모욕하는 것이다. 사건은 다만 조선자체에 한한 것이 아니고 연합국과도 관계가 있는 극히 중대하고 광범위의 사건으로 그 규모는 간단히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사건의 중심인물인 김세용을 체포코자 방금 사복 정복경관 3백 명을 동원중인데 그의 체포는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현재 남조선 전체에도 비상경계망을 펴고 있다.”


<한국사데이터베이스>의 “한국 근현대사 신문자료”에는 이 시기의 신문으로 <동아일보>와 <자유신문> 두 가지가 수록되어 있다. “김세용”을 검색어로 이 사건 관련기사를 찾아보았다.


동아일보 1946-08-10 02 01 “모 기관 파괴를 계획, 신당정서 무기압수”

동아일보 1946-08-11 02 01 “지하실에서 튀어난 좌계중심의 음모사건”

동아일보 1946-08-13 02 01 “김세용 등의 대음모사건 연루자수사에 계속활동”


자유신문 1946-08-10 02 04 “좌익 요인들의 검거는 합작에 방해 안 될까?”

자유신문 1946-08-11 01 10 “좌우회담은 당분간 불능, 원세훈 씨 담”


날자 다음의 숫자는 면과 단을 가리킨다. <동아일보>의 세 기사는 모두 상단 기사이고, 매우 큰 기사다. <자유신문>의 두 기사는 하단의 작은 기사이고, 초점이 경찰 측 선전이 아니라 좌우합작의 지장에 놓여 있다. 어느 쪽 신문의 보도가 정치적으로 편향된 것일까? 양쪽 다일까?


이 사건의 낙착을 보면 두 신문의 보도 자세를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유신문> 1946년 10월 13일자의 “현장검증 증인신청 / 김세용씨 부인 공판” 기사와 10월 16일자 “김세용 부인 집유” 기사를 보면 불법무기소지죄로 기소된 김세용의 부인 김영애가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이인환이라는 사람에게 권총 한 자루를 받아 가지고 있었다는 혐의였다. 이인환은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 <동아일보>에서는 이 판결에 관한 기사를 찾지 못했다.


단일 사건에 경찰 3백 명으로 ‘특별수사대’를 조직하고도 모자라 “3-8 이남 각도 경찰부도 이 사건 혐의자 검거에 총동원”했다니, 세상이 뒤집어질 일이 아닌가. <동아일보> 보도는 경찰의 뜻에 완전히 부합했다. 8월 11일자 이 신문 제2면은 이 사건 관계기사로 도배가 되었는데, 그 제목은 이런 것들이었다.


“경찰 탐지에 총피신 / 인(민), 공(산) 양당 주요 간부를 지명수사 / 3백 명의 수사대를 배치”

“선동 파괴의 지령서 / 합작 여의치 않을 때는 요인을 암살 / 전율! 압수된 서류내용”

“8-15 중심의 음모 / 김세용 검거는 시간문제 / 장 경찰부장 담”


8월 10일자 <동아일보> 기사 중에는 김세용의 집 “찬광 지하실에서 발견된 무기는 사과궤로 한 상자나 되는 권총 기타 흉기”라고 했다. 그런데 두 달 후 재판에서 문제되는 것은 권총 한 자루뿐이다. “사과궤로 한 상자”는 <동아일보>의 작문이었을까? 그럴 것 같지 않다. 그 동안 장택상의 언행으로 보아 장택상의 작품일 것 같다. <동아일보>는 경찰 발표를 검증 없이 받아들인 것일 뿐으로 보인다. <자유신문>과 달리.


장택상이 8월 12일에 이런 담화를 발표했다고 한다. 8월 13일자 <자유신문>의 “악질 流言은 엄중 처단” 기사에서 뽑은 것인데, 서면으로 발표했다는 이 담화문이 “자료대한민국사”에(<조선일보>, <서울신문> 1946년 8월 13일, 14일자) 실린 내용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자료대한민국사”의 정확성에 많은 문제가 있거니와, 그 정도가 심한 사례다.


“최근 8-15, 즉 우리 해방 기념일을 앞두고 갖은 유언비어가 유포됨에 대하여 나는 가장 유감으로 생각한다. 음모니 모략이니 하여 마치 현 기구에 대한 쿠테타 밀모가 모 인물과 모 단체 가운데 있는 것같이 전파되어 내외인에게 공포심을 주고 있음은 매우 한심한 일이다.

나는 동포시민 제위에게 거듭 선언하노니 이런 사태는 전연 없다. 여러분은 추호도 이와 같은 모략적 선전에 빠지지 않고 8-15를 앞둔 치안상태는 매우 안온하다고 생각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더구나 김원봉 장건상 양씨 구금설은 마치 경찰이 애국지사를 음해할 계획을 미리 입안되어 있는 것같이 허위를 양심 없이 시민에게 퍼뜨리고 유포함은 이야말로 악질적이요 모략적임을 굳게 믿는다.

이후로 경찰에 관한 허위보도는 상부 승낙이 있는 만큼 취체를 엄중히 할 방침이다. 이번 김세용 사건에 관하여 모 신문에서는 연합국과 관련 운운 하였으나 이 같은 말은 경찰에서 하등 발표한 일도 없는 일종의 날조기사에 불과하니 나는 전적으로 이것을 부정한다.”


3백 명의 특별수사대를 풀어 서울 시내를 발칵 뒤집어놓고는 치안상태가 안온하다고 생각해 주기 바란다니, 머리가 나쁜 건지 너무 좋은 건지 모르겠다. 끝 문단에서 “연합국과 관련” 운운은 소련을 가리킨 것일 텐데, “경찰에서 하등 발표한 일도 없는 날조기사”라며 부정한다는 것은 믿어 달라는 뜻인지 믿지 말아 달라는 뜻인지 판별하기 힘들다.


해방 1주년을 앞두고 긴장된 분위기가 느껴진다. 3-1절 기념행사를 좌우가 따로 열면서 적지 않은 충돌과 혼란이 있었다. 8-15 기념행사도 군정청 광장의 조-미 합동 행사와 서울운동장의 민전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경찰과 <동아일보>의 합동 조작사건은 좌익을 위축시키는 데 기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왜 굳이 김세용을 표적으로 했는지는 따로 생각할 점이 있다. 그는 좌우합작회담의 좌익 측 비서였다. 하지 사령관이 좌우합작회담을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군정청과 우익에서 아무도 좌우합작을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반대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있었고, 좌익 음모사건 하나를 조작하는 김에 그를 찍음으로써 좌우합작에 타격을 가하려는 뜻이 작용한 것은 아닐지.


몇몇 우익 인사의 가택수색과 몇몇 좌익 인사의 검거가 ‘김세용 사건’에 겹쳐져 민심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그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좌익 인사들의 검거는 7월 29일 정판사사건 재판정 시위 때 죽은 전해련 군의 사회장에 관련된 것이었다. 군정청은 정판사사건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노이로제 수준의 격렬한 반응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익희와 백관수 등 우익 인사의 가택수색은 경찰이 아니라 미군 수사대(CIC)에서 행한 것으로, 한민당 탈당자에 대한 테러사건의 조사로 보인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