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10월의 일기를 담은 <해방일기> 제1권 출간 준비가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그 책의 머리말을 쓰며 작업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마음속으로 되새겨 보았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의 조선 해방에는 두 가지 의미가 겹쳐져 있었다. 경술국치로부터 35년, 을사조약으로부터는 40년 만에 일본인의 지배를 벗어나는 민족 해방. 그리고 군국주의 체제로부터 벗어나는 자유 회복.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민족 해방의 측면을 앞세워 생각했다. 그때까지 겪어 온 억압과 불의를 모두 ‘왜놈’들의 책임으로 여겼고, 왜놈들이 물러간 이 땅에는 더 이상 억압과 불의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유 회복은 민족 해방에 당연히 따라올 것으로 보았다. 같은 민족끼리 살아가는 데 ‘일본 제국주의’ 같은 횡포는 나타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방된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독립하지 못하고 ‘일제시대’보다 더한 참극을 겪게 된 결과에 비추어보면 분명히 지나친 낙관이었다. 지나친 낙관이 참극을 막지 못한 중요한 조건이기도 했다.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민족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낙관의 정체를 밝힐 필요가 있다.


50년 전 내가 초등학교에서 배운 한 가지 이야기를 지금 초등학생들도 배우고 있다. 해방 때 온 민족이 기쁨을 함께 했다는 이야기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처럼 머릿속에 굳어 있어서 더러 그렇지 않았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생각이 미칠 때면 아주 이상한 사람들, 극히 예외적인 사람들이었으리라고 바로 생각해 버리게 된다. 민족 구성원 자격이 없는 ‘반민족 분자’로 여기게 된다.


근년 들어 한국 사회의 양극화와 특권구조를 생각하며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보통사람’들의 사회적 태도를 여태까지 너무 착한 쪽으로 생각해 온 것이 아닐까, 보통사람들도 착하지 못한 짓을 꽤 할 수 있는 것이고 해방 당시의 보통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방향을 돌려 생각해보니, 해방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맞은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 같다. 악질 친일파 노릇을 해서 처단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 일제 협력으로 이룬 큰 재산을 빼앗길 위험을 느낀 사람들만이 아니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열심히 일해서 제법 안온한 생활을 꾸려오던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의지하고 살아 온 질서의 붕괴가 불안감을 가져다주지 않을 수 없다. ‘소시민 근성’이라 이름붙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인지상정이기도 한 것이다.


해방은 많은 사람에게 기쁨만이 아니라 불안감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불안감을 감춰야 했다. 불안감을 드러내면 친일파로 의심받을 테니까. 모두들 불안감은 감추고 기쁨만 열심히 표출하다 보니까 지나친 낙관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 것이 아닐까?


적지 않은 사람들이 감춰야 했던 또 한 가지 사실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해방을 어떤 식으로든 예견했다는 사실이다. 아버지 일기 중에서 해방 전 일본의 패전을 예견했다는 말씀을 봤다.


“밤에 자리에 든 뒤에 아버지께서 전쟁 중에 내가 한 말이 그때는 기연미연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모두 옳았다는 것을 말씀하시었다. 첫째, 일본이 금명년 중으로 전쟁에 질 것이며 지면 조선은 독립한다는 것이며, 둘째 (...)” (김성칠, <역사 앞에서> 1946년 2월 2일자)


20년 전 이 일기를 처음 읽을 때, 나는 그분이 빼어난 통찰력을 가진 분이라서 그런 예견을 한 것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그 예견을 시골사람인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리고 행동 선택에 관한 조언을 드렸다면 상식을 뛰어넘는 통찰이었을 수가 없다. 그분 나름의 ‘과학적’ 판단으로 믿음을 가진 상식적 예견이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예견을 그분도 아무에게나 얘기하고 다녔을 리는 없다.


교육 수준이 높고 사회적 활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의 패전 가능성이 떠오르지조차 않았으리라는 것은 불합리한 상상이다. 웬만한 사람들은 그 가능성을 생각할 만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예견을 떳떳이 밝힐 수 없었다. 해방 전에는 금기였기 때문이고, 해방 후에는 “그런 예견을 하고도 어째서 그에 따른 행동이 없었는가?” 추궁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방의 의외성을 과장함으로써 그 기쁨을 강조하는 ‘눈 가리고 아웅’ 풍조가 일어났고, 이 풍조가 사회의 지나친 낙관 분위기를 거들었고, 오늘날까지 해방 당시의 ‘전설’로 초등학생들에게 주입되어 왔다.



일본의 패망에 대한 희망을 공공연히 표명하며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워 온 ‘항일투사’는 해방 당시에 소수였다. 일본 지배체제가 무너진 자리에 새 질서를 세우는 ‘독립’ 과업의 전면에 그 사람들이 나서게 되었다.


항일투사들에게는 두 가지 운동의 흐름이 있었다. 식민지화 초기에는 왕조시대의 구질서를 옹호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이민족 지배에 항거하는 민족운동이 주류였고, 3-1운동은 이 흐름의 분출이었다. 그러다가 1920년대에 식민지배가 안정된 틀을 갖추면서 사회경제적 모순이 확장-심화됨에 따라 ‘좌익’ 사회운동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식민지시대 후반기 국내 항일운동에서는 민족운동이 약화되면서 사회운동의 비중이 커졌다. 민족주의만을 내세운 세력은 1920년대 이래 여러 방향에서 침식되어 뚜렷한 진영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조선인이 일본인에 버금가는 지배민족이 되기 바라는 마음으로 일본 제국주의에 동참한 파시스트 성향의 사람들도 있었고, 기세등등한 일본 제국주의와의 정면 대결보다 점진적, 타협적 개량주의 노선을 취한 온건한 성향의 사람들도 있었다.


한편 식민지시대 말기의 전쟁기에 접어들면서 사회경제적 모순이 급격히 악화하는 데 대한 반발로 사회운동이 강화되었다. 민족주의 성향의 항일운동도 사회운동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고, 식민지배자들도 민족 모순을 호도하기 위해 모든 항일운동을 좌익으로 몰았다. 1940년대 들어 조선 민족주의에 대한 대규모의 정면 탄압은 1943년 초의 조선어학회사건이 유일한 것이었다.


일본의 억압적 지배에서 벗어나 변화의 계기를 맞은 조선 사회에서 변화를 총체적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였다. 대다수 사람들은 다소의 불안감을 가졌더라도 기본적으로는 변화를 반기는 마음이었다. 그 중에 빠르고 큰 변화를 바라는 진보 성향과 완만하고 신중한 변화를 바라는 보수 성향이 엇갈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진보 성향은 사회혁명을 제창한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좌익을 이루었고, 보수 성향은 민족주의 실현을 우선 과제로 내세우며 급격한 사회혁명에 저항하는 우익을 형성했다.


진보와 보수의 성향 차이는 애초에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좌익 인사의 대부분도 지나친 혼란을 피하기 위해 혁명의 진도를 늦추는 데 동의했고, 우익 인사의 대부분도 상당한 범위의 사회혁명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 혁명의 범위와 진도를 절충해서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한 사람들을 좌우 구분 없이 ‘중도파’라 할 수 있다.


‘질서 속의 변화’를 추구하는 중도파 노선의 성공을 바라지 않은 사람들은 소수였다. 일체의 질서를 혁명해야 한다는 극좌파와 일체의 변화를 거부하는 극우파였다. 극좌파는 소련혁명의 철저한 모방을 통해 지배권을 장악하겠다는 야심을 가졌고, 극우파는 식민지시대에 획득한 기득권을 지키고, 나아가 더 키우려는 욕심을 가진 자들이었다.


해방 즉시 중도파 노선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출범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극좌와 극우의 협공 앞에 몇 주일 안 돼 좌초하고 말았다. 중도파 노선에는 지지자가 많지만 극좌와 극우처럼 집요한 노력을 기울일 강력한 동기가 없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극우파가 온갖 흑색선전으로 민족주의자들의 건준 참여를 가로막고 있는 동안 극좌파는 건준을 헤게모니 투쟁의 도구로 전락시켰다.


표면적으로는 극좌와 극우가 정면으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도파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양측은 공생관계를 맺었다. ‘적대적 공생관계’다. 이 관계는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이 완성되기 전에 이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양측은 두 나라 점령군의 존재를 이 공생관계의 강화를 위해 이용하게 된다.



1987년 대통령선거에서 노태우 후보는 ‘보통사람’이란 캐치워드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런데 그 후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말에 배신감을 토로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분명히 통상적 의미에서 보통사람이었다. 그 전임자와 후임자의 온갖 기발한 언행에 비교하면 얼마나 보통사람이었나! 그가 재판받은 ‘범죄’도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극히 보통스러운 것이었다.


국민이 반긴 ‘보통사람’의 의미는 단순한 ‘평균적 인간’이 아니었다. 이승만처럼 너무 악하지 않고, 윤보선이나 장면처럼 너무 어리석지 않고, 박정희처럼 너무 야심이 크지 않고, 전두환처럼 너무 지독하지 않고... 문제 좀 일으키지 않아 주는, 요컨대 천사 같은 지도자를 바란 것이었다. 하느님 같은 지도자 말고.


큰 변화가 필요 없는 안정된 사회에서 무난한 지도자가 선호받는 것은 그럴싸한 일이지만 한국처럼 역동성이 크고 미결의 과제가 쌓여 있는 사회에서 ‘보통사람’ 선전이 먹혀드는 것이 어찌된 일인가? 수십 년간 너무 별난 지도자들에게 치일대로 치인 결과다.


해방 후 몇 주일 동안에 형성된 ‘적대적 공생관계’가 모습을 바꿔 가며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다. 원칙과 상식을 짓밟는 극단주의자들이 사회를 이끄는 긴 세월 동안 사람들 마음에는 ‘보통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자라 왔다. 그 보통사람은 원칙과 상식에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나 원칙과 상식이 사람들에게 너무 낯선 것이 되어 있어서 그 모습을 제대로 그릴 수가 없다. 그저 막연히 “문제 좀 일으키지 않아 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할 뿐이다.


내가 보기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원칙과 상식을 중시한 ‘보통사람’이었다. 그의 공과에 대해 좌우 양쪽에서, 그리고 전술-전략의 여러 층위에서 논란이 남아 있지만, 원칙과 상식에 대한 그의 성의만은 국민 대다수가 함께 인정한다.


원칙과 상식에 입각한 노무현의 정책노선은 중도적인 것이었다. 이것이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이니 “좌파 신자유주의자”니 하는 말들을 낳았다. 그의 정책노선에 대한 비평은 좌우 양쪽으로 치우친 것이 압도적이었다. 중도적 노선에 대한 중도적 입장의 평가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 2> 서론에서 미국 사회의 ‘비역사성(ahistoricity)’을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처럼 비역사적 성향을 내재적으로 품고 있는 사람들은 뒤를 캐는 일, 양탄자 들춰보는 일, 물밑의 힘과 움직임을 알아보는 일에 적성을 보일 수가 없다. 제1원리에 대한, 그리고 파헤치기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사람은 좌우익의 과격파밖에 없다. 니체가 말한 ‘미로(迷路)를 향한 운명’은 미국인의 영혼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미국 사회의 비역사성을 지난 60여 년 동안 철저히 배워 왔다. 한국 사회에서도 역사 파헤치기에 열정을 보여주는 사람은 좌우익의 과격파밖에 없는 것 같다. 역사 담론이 편향되면 정치 담론도 편향될 수밖에 없다. 정치적 과격파 중에도 사회를 향한 선의를 가진 이들이 많다. 그러나 자기네 원칙과 자기네 상식에 대한 집착 때문에 ‘보통사람’의 원칙과 상식을 묵살하기 쉽다.


65년 전 해방조선에서는 지금 이 사회에서보다 원칙과 상식이 더 많이 존중받고 있었다. 그 무렵 소수집단의 이해관계가 원칙과 상식을 짓밟기 시작한 이래 원칙과 상식을 회복할 충분한 기회를 이 사회는 갖지 못해 왔다. 지금 와서는 원칙과 상식이 어쩌다 모습을 보여도 대중이 낯설어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사회에서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중도적 정치노선이 힘을 키우기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 경제조건이 각박하고 문화조건이 척박하던 해방공간 속에서도 원칙과 상식에 입각한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사람들의 눈에는 ‘별난 사람’들의 모습에 가려 그 ‘보통사람’들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다. 김구, 이승만, 김일성, 박헌영 같은 사람들보다 여운형, 김두봉, 김규식, 안재홍, 홍명희 같은 사람들의 가르침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다.



내 마음속에 이 작업과 맺어져 있는 일 하나를 기쁜 마음으로 밝힌다. <역사 앞에서>로 출간된 아버지 일기 원본을 이화여대 도서관에 기증하기로 한 것이다. 독자들 손에 이 책이 닿을 무렵에는 도서관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작년 초 경기도박물관에서 6-25 전시회를 위해 대여해 갈 때 떠오른 생각이었다. 어머니께 넘겨받은 후 20여 년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자료를 사회의 활용에 더 잘 제공할 수 있는 기관에 맡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기왕이면 아버지 인연에 잘 맞는 기관에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 아버지 고향에 가까운 한 연구기관을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 달 어머니가 한 차례 건강의 위기를 겪으시는 동안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그 자료를 만든 분의 인연에도 의미가 있겠지만, 36년간 혼자 지켜 후세에 전하신 어머니의 인연을 더 앞세울 만하지 않을까?


마침 연전에 <역사 앞에서> 개정판 작업을 맡아준 정병준 교수가 이화여대에 봉직한다는 것도 인연이 겹치는 일이다. 정 교수에게 뜻을 알렸더니 도서관에서 반갑게 받아들인다는 뜻을 며칠 안 되어 전해왔다.


어제 어머니께 원본을 들고 갔다. 1950년 6월 25일자를 펼쳐드리니 몇 자 소리 내어 읽다가 그만두고 말없이 생각에 잠기신다. 잠깐 뜸을 들였다가 공공기관에 기증하면 좋겠다는 생각, 이화여대가 적합하다고 본다는 의견을 말씀드리니 일기를 들여다보며 묵묵히 들으시다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가볍게 말씀하신다. “그래, 잘했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