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운형이 암살당한 후 미군정이 수사 과정에서 압수한 여운형의 가방 안에 편지 여러 통이 들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1946년 4월 16일 박헌영이 여운형의 환갑을 축하한 편지가 있었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316쪽에 한 대목이 소개되어 있다.
당신은 조선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당신은 일본제국주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조선독립을 위해 싸워왔고 조선 노동계급을 위해 용감히 투쟁해 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삶과 같은 위대한 생애를 회고할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현 정세는 복잡미묘한 성격을 띠고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위기에서조차 당신은 현명한 관찰로 우리의 민주독립을 위해 옳은 노선을 보여 주셨습니다. (...) 환갑을 맞이하여 건강과 장수를 축원합니다.
깜짝 놀랄 만큼 극진한 경의가 담긴 내용이다. 3월 20일 미소공위 개막에 임해 “지금까지 중간적 입장에서 한낱 공정한 심판자처럼 좌우익이 모두 잘못이니 덮어놓고 통일하라고 알선해 오던 분들도 이제는 깊이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요구한 것과 대조된다. (<조선인민보 1946년 3월 22일자.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364-365쪽에서 재인용.) “중간적 입장의 반성”을 요구하면서 “현명한 관찰”을 칭송한다니...
공산당과 민전은 미소공위를 일관되게 지지하며 그 성공을 기원했다. 민전에는 중도파도 다수 참여하고 있었지만, 미소공위를 통한 임시과도정부 수립을 바란다는 점에는 그들도 공산당과 같은 입장이었다. 미소공위에 대해 독점적 협상권을 주장하는 민주의원의 입장에 대한 불만감이 김원봉 등 임정 비주류가 민전을 택한 중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민전의 노선 결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은 공산당이 맡고 있었다. 미소공위 협의상대 결정에서 3상회의 반대자들을 배제해야 한다는 민전의 3월 21일자 담화문은 공산당 입장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민전에서는 21일 다음과 같은 요지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하지 중장의 개회사에 대하여 우리는 만강의 사의를 표하며 쉬티코프 대장의 규정에 대하여 절대의 찬의를 표한다. 실로 우리의 평소 주장과 완전히 일치되는데 저윽이 만족을 느낀다. 삼상회의 결정에 반대한 개인 또는 정당 급 단체도 또한 임시정부수립에 발언할 수도 참가할 수도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주장하는 바이다. 정당등록법에 대하여서는 절대로 거부한다. 동시에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의상대 규정에 있어서 이 정당등록법에 구애되지 말 것을 굳게 주장하는 바이다.”
(<서울신문> 1946년 03월 21일자) [강 기자님, 출처 표시를 일률적으로 줄을 바꿔서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3상회의 결과를 지지해 온 박헌영과 공산당은 미소공위의 성공이 자기네 입장을 유리하게 만들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극단적 반탁 주장의 문제점이 미소공위의 성공을 통해 드러날 것으로 본 것이다. 3상회의 자체는 존중하지만 신탁통치 실현을 막도록 노력하겠다는 중도파 입장은 괜찮다. 그러나 신탁통치 가능성을 담았다는 이유로 3상회의 결정 자체를 거부해 온 극단적 반탁 입장에서는 미소공위도 인정할 수 없는 입장이 아닌가. 미소공위 앞에서 반탁운동은 논리적 모순에 빠져 있었다.
극우파의 논리적 모순은 공산당에게 전술적 이점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근거로 중도파에게 “중간적 입장의 반성”을 요구한 것은 무리였다. “좌우익이 모두 잘못이니 덮어놓고 통일하라고 알선해 오던” 중도파의 반성을 요구한다는 것은 좌익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주장이다. 우익의 잘못 하나가 밝혀졌다 해서 좌익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하는 것 아닌가.
인민당의 여운형과 신민당의 백남운에게는 공산당의 ‘반탁파 배제’ 주장이 흑백론에 의지하는 극좌 모험주의로 보였을 것이다. 같은 당파 내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는 채택할 수 있는 노선이다. 그러나 이남 지역의 통치권을 쥐고 있는 미군과 긴밀하게 결탁하고 있던 우익을 논리적 모순 하나 때문에 원천적으로 배제하자는 것은 미소공위의 실효성을 위태롭게 만드는 길이었다. 아무리 밉더라도 ‘더불어 살아야 할 존재’로 우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중도파의 입장이었다.
백남운은 4월 1일부터 13일까지 <서울신문>에 “조선민족의 진로”를 연재했다. 좌파 입장의 새로운 노선으로 ‘연합성 신민주주의론’을 제시한 이 글을 장기 연재한 것은 <서울신문>을 주관하고 있던 홍명희-홍기문 부자가 그 노선에 공감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서중석도 이 노선을 “통일전선에 의한 민족국가 건설운동의 이론적 틀”로 중시하여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367-377쪽에서 그 내용을 상세히 소개하고 논했다.
나는 “조선민족의 진로”를 아직 찾아 읽지 못했지만, 서중석의 소개를 통해 그 중요성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은 서중석의 소개 범위 안에서 이 글을 고찰하고, 나중에 찾아 읽은 다음 더 고찰할 만한 점을 덧붙일 기회가 있으리라 믿는다. 우선 서중석의 책에 인용되어 있는(369쪽) 한 대목을 옮겨놓는다.
민족해방을 위하여는 원래부터 자산계급의 일부와 전 무산계급이 해내 해외를 막론하고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동맹관계를 가졌던 것이 엄연한 사실이었다. 조선민족에게 부과된 ‘민족해방’의 역사적 동맹관계를 연장시켜야 될 일이 아닌가! (...) 조선민족의 혁명세력은 양심적인 일부 자산가와 전 무산자층이 담당하고 있는 것인데, 민족해방이라는 거대한 정치적 과제가 우리의 안전에 횡재하고 있는 이상에 민족해방을 위하여는 일부 유산계급이 연합해야 할 것이고, 결코 민족혁명의 대적(對敵)이 해방되었다는 이유로 일부 유산계급의 자주독립, 즉 민족해방을 위한 혁명세력이 될 수 있는 점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며, 무산계급은 민족해방을 위한 혁명세력인 동시에 사회해방을 위한 혁명세력의 담당자인 점을 사회적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을 별개의 과제로 설정하고 민족해방의 과제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그래서 “양심적 일부 자산가”의 포용을 주장한 것이다. 서중석은 “조선민족의 진로”의 요점을 이렇게 정리했다. (368쪽)
“조선민족의 진로”의 핵심골자는 일찍이 인민당이 출범할 때부터 여운형-인민당이 주장해온 연합정부론에 있다. 자주독립국가의 건설과 사회혁명이 명확히 구분하여야 할 것임과 동시에 통일적으로 연관지어지는 것임을 밝힌 것은 “조선민족의 진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이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대안으로서 민족혁명과 사회혁명의 과제를 실현하는 방안이 연합성 민주주의였다. 백남운은 자본주의 독립국가들은 사회해방만 수행하면 되지만, 한국민족에게 부과된 정치적 사명은 민족해방과 사회해방의 두 가지가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사회해방의 담당자는 무산대중이지만, 식민지 및 반식민지국가의 민족해방은 연합성을 띠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왜 사회혁명의 담당자는 무산계급일 수밖에 없는가. 백남운은 3-1운동 이전의 유산계급은 민족혁명의 배후세력과 물적 기초를 이루었지만, 3-1운동 이후 유산계급은 일제의 호부(護富)정책으로 인하여 특권적으로 육성되어, 소부분은 반일제적 혁명을 내포하여 왔고 대부분은 일제와 결탁 또는 동맹을 결성하였다고 분석하였다. 그리하여 유산계급은 사회혁명에 있어서는 프랑스의 부르주아지가 담당하였던 역사적 혁명성을 갖지 못하고, 프랑스와는 달리 봉건세력의 대표자인 지주와 시민의 대표자인 자본가가 대립적인 것이 아니고 동맹적인 까닭에 현상 유지의 보수적 성격을 그 속성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非)’보다 ‘사이비(似而非)’가 더 나쁜 것”이란 공자 말씀도 있거니와, 공산당 입장에서 백남운을 이승만보다 더 미워한 사람들이 있었나보다. 백남운의 주장이 좌익과 중도파를 상대로 공산당 노선과 경쟁하는 방향이었으니까. 반년 후 인민당과 (남조선)신민당이 공산당과 합쳐 남조선노동당을 만들 때 여운형과 백남운이 탈락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하며 이 주제를 더 살펴보게 되겠지만, 오늘은 백남운의 글에 대한 공산당 측의 격한 반응을 서중석의 글을 통해 소개하는 것으로 마치겠다.
백남운의 “조선민족의 진로”에 대한 비판은 이기수의 “백남운 씨 ‘연합성 신민주주의’를 박함”, 김남천의 “백남운 씨 ‘조선민족진로’ 비판” 등이 있고, 이에 대해 허윤구의 “‘조선민족진로’에 대한 비판의 재비판”이 있으나, 어느 정도 이론을 갖춘 것은 이기수의 반론뿐이다. 이기수는 위의 글에서, 백남운의 글이 “민주주의적 조선 건설의 노선에 대하여 이론적 및 정치적으로 새로운 혼란을 일으키려는 의도로서 발표된 듯하다”는 말로부터 시작하여, 정계가 명백히 인민공화국 지지 측과 중경임시정부 지지 측과의 두 진영, 곧 민주주의 진영과 반민주주의 진영, 세칭 좌익과 우익 간으로 갈라졌고, 양자 간에는 근본적인 차이와 대립이 있기 때문에 정계의 통일에 대한 모든 여지는 없어졌고, 오직 국내적 및 국제적 힘의 관계에 의해서만 한국문제는 해결된다는 데에서부터 논리를 전개해나고 논리 전개의 전제에 대한 인식이 백남운과 전혀 달랐다. (...)
그러나 이보다도 이기수와 김남천의 글에서 주목되는 것은 백남운에 대한 신랄한 인신공격일 것이다. 이기수는 앞의 글에서 ‘기회주의자의 입장’, ‘반동적 역할’, ‘헛소리’, ‘논리적 작란’, ‘생각나는 대로 늘어놓은 공론’, ‘대중에게 인기 끌려고’, ‘이와 같은 기계적 태도는 기회주의자의 본성’, ‘가장 전형적인 기회주의자’, ‘양시쌍비의 절충주의’, ‘현학벽’, ‘조선민족의 진로이기보다는 기회주의의 진로’, ‘불평정객의 대변’, ‘의자욕과 무원칙한 좌우합작론’ 등등으로 비난하였다. 위의 글을 읽으면 백남운은 신민당 경성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조선공산당에 가장 가까운 우당의 영수의 한 명이고, 민전 의장단의 일원인데, 이렇게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375-376쪽)
'해방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후감 /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1), Princeton U. P., 1981 (0) | 2011.04.15 |
---|---|
1946. 4. 15 안재홍 선생에게 묻는다. /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 (0) | 2011.04.15 |
1946. 4. 12 / 돈이 험악하게 만든 해방공간의 사회 (0) | 2011.04.11 |
1946. 4. 11 / 미군정 비판으로 구속당하는 임정 요인 (0) | 2011.04.11 |
1946. 4. 8 / 음산해져 가는 사법부 분위기 (3) | 2011.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