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5일자 일기에서 두 차례 위조지폐 사건을 언급했다. 당시 사회에서 위조지폐에 대한 의심이 얼마나 심했는지 최고액권인 백원권의 유통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조선은행권 (1)호에서 (5)호까지의 백원권 지폐는 쓰느니 못쓰느니 받느니 안 받느니 하고 항간에는 별의별 유언낭설이 떠돌고 있어 큰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동시 경제계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데 12일 조선은행 발행과장 吳正煥에게 그 진상과 대책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요사이 위조지폐가 돌아다닌다는 바람에 백원권 위조지폐와 비슷하다는 소위 조선은행권 기호(1)·(2) 두 종류 지폐를 잘 안 받는다는 말을 듣고 우리 은행에서는 의심을 품고 이런 지폐를 가지고 오는 사람에게 한하여는 감정하고 바꾸어 주었다.

이 문제가 이렇게 크게 된 원인의 하나는 일부 은행 가운데서 무조건하고 백원권 지폐는 예금도 안 받고 바꾸어 주지도 않는 점도 큽니다. 적어도 은행 출납계에 있는 사람으로 위조인지 아닌지를 구분 못할 정도의 교묘한 위조지폐는 아직 없습니다. 문제의 기호 (1)과 (2)는 일인이 패전 이후 미군 진주 전에 찍어낸 것인 만치 그 기술에 있어 원지 또는 인쇄에 있어 똑똑치 못한 점도 있으나 (3)·(4)·(5)는 미군 진주 이후 인쇄한 것이라 불량한 지폐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여하간에 위조지폐의 기술이 해방 전보다 교묘하게 된 것도 사실이나 일반시민은 유언비어에 속지 말고 안심하고 종전과 같이 사용하기를 바라며 의심되는 것은 언제나 조선은행에서 발행한 지폐는 책임지고 본점은 물론 지방지점에서도 교환하여 드릴 터이니 안심하기를 바라며 은행당국을 신뢰하여 협력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조선일보> 1946년 04월 13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일반 은행에서 백원권을 취급해 주지 않기 때문에 조선은행에서 교환을 보장한다고 나설 정도라면 시중의 상인들이 어떻게 마음 놓고 백원권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백원권에 다섯 개 판형이 있었는데, 미군 진주 전에 찍은 두 개 판형은 원지나 인쇄에 결함이 있다고 조선은행 당국자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손님이 엉성하게 생긴 백원권을 내놓는데, 그것을 조선은행 점포까지 들고 가는 것도 성가신 일일 뿐 아니라, 들고 가면 바꿔줄 물건이라고 누가 보장해 준단 말인가. 조선은행에서 내보낸 지폐가 품질이 좋지 않으니 위폐범들에게도 일이 쉬웠을 것이다.


해방 전 조선의 통화량 50억 원 수준에 비해 엄청난 추가 발행이 이뤄진 사실을 여러 연구자들이 지적했다. 미군 진주 때까지 20여 일 동안 30억 원 이상의 지폐가 풀려나간 것이다. 해방 조선의 경제를 교란시키려는 악의로 저지른 짓이라고 흔히 지적하는데,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 같다. 권력의 의미를 가질 뭉칫돈을 그 정도 대규모로 여기저기 심어놓는 데는 인플레이션 같은 단순한 경제 교란을 넘어 조선 사회의 권력구조에 영향을 끼치는, 총체적 질서 교란의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괜찮은 직장의 월급이 몇백 원이었다. 당시의 백원권은 지금의 5만원권보다 훨씬 고액권이었다. 서민들의 일상생활에서는 만져볼 일이 없는 돈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고액권을 훨훨 뿌리며 살았다. 16세에 해방을 맞고 고향 평양을 떠나 서울에서 이북학련에 참여했던 채병률의 회고 중 한 대목을 다시 들여다본다.


그 당시 특별히 기억나는 일이 있다면 김두한이 종종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하여튼 얻어왔는지 뺏어왔는지 우리한테 돈을 줬어. 더 마음에 들었던 것은 한 번도 돈을 세서 주는 법이 없고 호주머니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줬어요. 당시에 5원, 10원, 100원짜리가 있었으니까 백원짜리라도 몇 장 받는 날이면 감격이지. 1원짜리야 열 개 받아봤자 고작 10원밖에 안 됐지만. 아무튼 그 어른한테 우리 이북학련이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래서 과거에도 그분하고 상당한 인연을 맺고 살았고, 지금도 존경하고 있어요. (<8-15의 기억> 353쪽)


오늘 <프레시안>에서 서상철의 글 “서남표는 어떻게 카이스트를 좀먹었나?”를 재미있게 읽었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보상 동기’와 ‘근원적 동기’를 구분해서 보는 것은 우리 사회의 세태를 반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관점이다. 보상 동기가 근원적 동기를 마비시키는 현상은 자본주의사회의 큰 약점인데, 이 현상이 한국 사회에 매우 심하다. 그냥 좋아서 하는 일,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행위다. 사람들이 모든 일에서 보상을 바라게 되는 세태는 인간적 가치를 등질 뿐 아니라 효율성마저 떨어지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


그 글이 김두한의 ‘돈 뿌리기’ 솜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꼬붕’들에게 보상을 치밀하게 해주면 당장의 보상 동기는 극대화할 수 있겠지만 근원적 동기를 약화시킬 것이다. 운에 따라 많이 받을 수도 있고 적게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운과 ‘오야붕’을 믿고 시키는 일을 한다면 보상 동기의 역할이 제한된다. 돈이 좋아서 하는 일이 아니라 오야붕이 좋아서 하는 일이 되고, 여기에는 근원적 동기가 활발하게 작용할 여지가 있다. 오야붕이 미워하는 놈을 나도 미워하게 되고, 병신 만들어놓으라고 보냈는데 내 기분에 따라 죽여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분야에서 김두한의 성공에는 보상의 효과를 오야붕-꼬붕 관계로 전환시키는 기술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사실 그에게는 행동과학을 공부할 필요도 없이 본능과 습관으로 빚어진 행태였을 것이다. 해방공간에는 통화량의 3분의 1에 달하는 엄청난 거액의 돈이 정상적 경제관계를 벗어난 이곳저곳에 뭉칫돈으로 널려 있었고, 이 돈으로 대중을 의존적인 룸펜 심리로 몰아넣는 작업에 김두한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다.


백여 일 전 송진우를 암살한 사람들은 어떤 동기에 의해 움직인 것일까? 이 무렵에 암살자들이 체포되었다.


작년 12월 30일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古下 宋鎭禹 씨를 저격한 진범인을 체포코져 경기도 경찰국에서는 약 2개월 전부터 비밀리에 맹렬한 활동을 거듭하여 한때는 부녀동맹 간부들도 암살혐의를 받고 취조를 당하는 등 범인 수사의 귀추가 주목되었는데 8일 밤부터 돌연 단서를 잡고 특별 무장대원들이 수사를 개시하여 9일 정오까지 진범인 韓元律(일명 韓賢宇 29), 劉根培(20), 金義賢(20) 등 3명을 체포하였다. 주범 한원율은 일찍이 일본 조도전대학에서 수업을 하고 당시 일본수상 東條英機를 암살하려다가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복역 중 해방 후 출옥하여 귀국 후 국민대회 준비위원회에서 고 宋鎭禹 씨를 돕고 있던 자인데 한원율의 지휘 하에 유근배, 김의현 양 명이 권총을 발사하여 암살한 것이다.

◊ 체포까지 경위 도 경찰부 발표

그런데 범인을 체포하게 된 경위는 이렇다.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은 사건 발생 후 과원 이만종, 노훈경 양인을 지휘하여 각종 정보를 수집하던 중 2월 13일 오후 3시경 張 경찰부장으로부터 송진우 신변보호자로 있던 자가 해안경비대에 입대하게 되었다니 그 관계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해안경비대원으로 입대하게 된 자는 미국인이 인솔하여 가게 되었으므로 장 경찰부장이 스톤 부장의 양해를 얻어 미군 2명을 파견하여 주어 노 형사과장과 과원 이만종은 동 오후 두 시에 경성역에 출장하여 송진우 신변보호 책임자 鄭鍾七과 해안경비대 대원으로 입대하게 된 金日洙 양 명을 동행하여 취조한 결과, 송진우 신변보호자이던 白南錫, 金義賢, 申東雲, 朴閔錫, 劉根培 등이 작년 11월 말경에 주의주장이 상치됨으로 인하여 신변보호자로써 탈퇴하였던 것인데 송 씨가 암살당한 후 金日洙(가명)가 시내 종로통에서 金義賢을 만났을 때 “송 씨를 암살한 자는 누구냐?”고 물은즉 김의현이 답하여 말하되 “그것은 왜 묻느냐? 누구이면 알아서 무엇을 할 터이냐? 그만 두어라.” 이와 같은 문답이 있었는데 金日洙 생각에 김의현을 체포하면 진상을 알 수 있으리라고 진술하였으므로 이상 관계자 중 동 2월 14일에 申東雲, 白南錫, 金義賢을 각각 체포하여 엄밀히 취조하였으나 직접 하수자 즉 주범을 체포하기에 난점이 있었으므로, 동월 18일에 전기 3인을 석방하여 이들을 연락자로 정하고 1개월 10여 일간 각종 정보를 수집한 결과, 드디어 8일 오후에 劉根培가 인천 부내에 잠복중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으므로 작일 아침 미명에 수사과원을 자동차로 급파하여 오후 8시 30분에 인천부 화평정에서 유근배를 체포하여 취조한 결과, 주범자인 한현우를 동 오후 10시 20분에 시내 신당정 304번지에서 공범자 김의현과 동시에 체포하였다. 이상 체포자 3인은 송진우 암살 진범으로 자백하였으며 남은 2명은 불일 체포될 예정이다.

(<서울신문> 1946년 04월 1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4월 24일에 경기도 경찰부의 암살범 취조 결과 발표가 있었는데, 관계 기사에서 배경을 설명한 앞부분은 빼고 범행과 직접 관계된 뒷부분만 옮겨놓는다.


한[현우]은 동경시대로부터 철저한 민족주의자인데 해방 직후 상경하여 각 방면의 정세와 동향을 정시한즉 자주독립촉성을 표방하는 정당이 속출하여 자유해방이다 하기만 하고 통일이 안 됨을 보고 재 동경시대의 동무인 李龍鳳의 소개로 8월 하순에 현재 시내 신당정 333의 6 경남 양산 출신 全柏(42)을 방문하고 의견을 교환한 다음 11월 초순경에 이 두 사람은 이론투쟁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하여 정치적 야심가, 브로커 등을 암살 숙청할 계획을 세우고 무기를 얻는 한편 심복 부하를 물색하여 呂運亨, 朴憲永, 宋鎭禹 씨 등을 매국적 행동자로 규정하고 이상 제씨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첫째로 신탁문제가 일어나 격분하고 있을 즈음 12월 29일 하오 5시경 부하를 소집하고 명일 미명에 먼저 송진우를 암살할 것을 부하들에게 발표한 다음 劉根培가 30일 상오 6시 10분경 송진우를 권총으로 암살하였다.

그리고 한은 전백의 명령을 받고 1월 3일경 서북 지방으로 반탁을 선전하러 갔다가 1월 17일 서울에 돌아왔는데 그 후로 여운형과 박헌영의 거소를 찾고 있었다. 주범들은 공산주의자라고는 인정할 수 없다.

(<서울신문>, <동아일보> 1946년 04월 24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경찰부 발표 끝에 범인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힌 것이 이채롭다. 좌익의 소행이란 의심이 널리 떠돌았던 모양이다. 위에 인용한 4월 10일자 체포 기사 앞머리에서 부녀동맹 간부들이 혐의를 받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좌익에 대한 의심을 보여준다.


한편 김구와 임정 측에 대한 의심도 떠돌았다. 3월 7일자 일기에 인용한 한 글에는 장택상이 송진우의 빈소에서 원수 갚을 결심을 하고 이후 임정 측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암살 이틀 후인 1월 1일 김구와 하지 사이에 격렬한 충돌이 있었을 때 하지가 김구에게 “잡아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한 것을 암살에 대한 의심 때문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커밍스는 김구가 송진우 암살을 조종한 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긴다.


정무위원회를 이끄는 역할을 임정의 김구 일파에게 맡기려던 구상은 반탁 사태를 통해 배제되었다. 하지는 김구와 그 추종자들에게 경호원과 미제 차량, 그리고 고궁 시설의 이용 등 혜택을 제공했는데, 그들은 그를 정면으로 배반했다. 김구는 귀국 후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에서 불발로 끝난 쿠데타는 말할 것도 없이, 하지가 신임하던 고문 송진우의 암살을 조종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30-231쪽)


김구가 송진우 암살에 관여했다고 볼 만한 정황이 분명히 있기는 있다. 그러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한현우가 1951년 8월 이승만의 세상을 활보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보면 이승만에게 의심이 가는 정황도 있다. 한현우가 정말 김구의 지시로 송진우를 죽인 것이라면 이승만이 자기가 저지른 김구의 암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한현우에게 사실을 밝히도록 했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1945년 12월 30일자 일기에서 한현우의 배후에 대한 추측을 삼가고 그의 개인적 돌출행위로 볼 수도 있겠다는 의견을 적었다.


한현우의 동기는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 암살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송진우의 경호원으로 일하다가 그만둔 사람들이 송진우의 암살에 참여했다. 그 사람들의 동기를 명확히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송진우를 존경해서 경호원 노릇을 맡았다가 무슨 일로 실망해서 떠난 사람들일 수도 있고, 경호원 대접이 너무 박해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그만둔 사람들일 수도 있다.


문제는 자기가 경호하던 사람을 암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직 경호원 여럿이 참여했고 다른 사람들도 짐작할 만한 상황에서 일이 진행된 것을 보면 그런 사람이 어쩌다 하나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송진우 암살의 구체적 진상은 밝히지 못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돈을 위해서든 이념을 위해서든 경호원 노릇도 할 수 있고 암살도 할 수 있었던 사회상을 이 사건은 보여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