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대니얼에게 메일이 왔다. 재작년 그의 책 <차이나모델>을 번역하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눈 사이다. 베이징의 그 친구 집에 놀러가서 하룻저녁 즐겁게 지낸 일도 있다. 역자로서 저자와 그처럼 가까이 교유하게 된 것은 처음이다. 번역이 끝난 후로는 연락이 뜸해져 있었다.

 

6월에 베이징에서 열릴 "천하란 무엇인가" 워크숍에 참석을 권하는 메일이었다.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로서 '천하체계'는 원래부터 흥미로운 주제였고, 특히 몇 해 전 자오팅양의 <천하체계>를 읽은 후로는 내 마음속의 중요한 키워드가 되어 있다. 초청장에 적힌 참석 예정자 명단 중에 자오팅양도 있다. 안 갈 수 없지!

 

빈손으로 오라는 자리는 아닌데, 뭘 들고 가나? 얼마 전부터 바라보고 있던 작업방향에서 적당한 주제를 뽑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잠깐 궁리했다. 됐다! 이 정도면 쓸 만하겠지, 생각한 것이 17세기 중국의 서학서와 反서학 문헌 중에서 '하늘'에 대한 관점을 비교하는 것이었다. 하늘을 어떤 것으로 생각할 때 '하늘 아래'가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 된 것인가?

 

구상한 주제를 알려준 데 대니얼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앞서 메일에서 깜빡했는데, 내가 전에 얘기하던 '사대주의' 얘기를 해주기 바라는 생각에서 내 초청을 주선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대니얼 집에 갔을 때 역사 속의 한-중 관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한국 입장에서 사대-자소 관계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을 이야기했더니 부부가 함께 매우 흥미로워 했다. 약소국 입장의 관점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을 테니까.

 

사대주의에 관한 발표를 해달라니, 반가운 기회다. '사대주의'가 한-중 관계를 이간시키고 한국인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일본인들이 세운 개념이며, 전통시대의 '사대'는 가치 있는 외교노선이었다는 생각을 정리한 것이 20년도 더 된 일이다. 그런데 이에 관한 생각을 우리 사회에서는 발표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내가 주제를 선택할 수 있는 강연 기회가 있어도, "사대주의는 나쁜 것"이라는 사회의 강고한 통념에 굳이 거스르는 주제을 내놓기가 쉽지 않았다.

 

발표 요지를 바로 정리해서 보냈다.

 

“Reverence to the Big, Benevolence to the Small", Principle for International Relationship under the Tien-xia System

 

1. The principle.

 

* The principle was fully elaborated during the Warring States period to be applied to the relations between Tian-zi(Zhou) and vassal states.

 

*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Empire, the application was gradually widened to relations between the Empire and its neighboring nations.

 

* The greatest value of the principle is in the durability of relationship, supported by the combination of moral and practical motivations.

 

* The principle was based on an organic world view, favored in stable agricultural societies.

 

2. Between Korea and China.

 

* Kingdoms in Korea began tributary relationship with Chinese dynasties during the North-South period, but it remained a nominal one for a long time.

 

* An extremely close and rich relationship was developed between Koryo Kingdom and the Mongol Yuan Empire during the latter half of 13C.

 

* At the rise of the Ming Dynasty toward the end of 14C, the power group in Korea, eager to secure the trust of the Ming rulers, decided to introduce the "shi-da zi-shao" principle in full scope.

 

* Korean rulers (especially King Sejong) tried to lead the country to "harmonize, but differ" with China. It is one of the major reasons why Korea has never been incorporated into the Chinese empire.

 

3. Threats to the principle.

 

* While the violation of the principle by the small party can be easily corrected by the big party, the failure of the big to abide by the principle is apt to result in the failure of the whole system.

 

* Toward the end of the Yuan, Ming and Qing Dynasties, China failed to offer benevolence to Korea, leaving Koreans to suffer wars and disorder.

 

4. Implications to the present.

 

* Much of the violence and disorder of the modern world has been due to the supposition of a world of equal and independent members. Recognition of the asymmetry of the organic world is needed to deal properly with problems of the real world, such as the climate change.

 

* Restoration of traditional organic orders like "tian-xia" and "ummah" can be expected to contribute to the enhancement of world peace. Big and small countries all have respective motives for the restoration, just as both parties benefited from the "shi-da zi-shao" system.

 

* If a country wants a peaceful environment, she should make special efforts for good relationships with her neighbors which would satisfy both parties. The inverse square law of energy transmission, which tells you that the intensity of the energy received is proportional to the inverse square of the distance, should be taken into account.

 

대니얼은 바로 환영의 뜻을 보내왔다. 내가 생각해도, 천하체계의 기본 원리에 대한 약소국의 관점을 정리해서 보여주는 것은 참석자들의 관심을 많이 끌 것 같다. 대니얼이 나를 부르는 것은 내가 예뻐서가 아니라 똑똑한 친구라서다. 정말 학술활동의 조직에 일가견이 있는 친구다.

 

반가운 발표 기회이기는 한데, 한쪽으로는 좀 켕기기도 한다. 이 주제에 관한 생각을 책에 더러 끼워 넣기는 했지만 진지한 연구자들 상대로 국내에서는 발표한 일이 없는데, 다른 데도 아닌 중국에 가서 '사대'의 가치를 내세우는 발표를 하다니. 매국노로 몰리는 거 아냐?

 

켕긴다 해서 마다할 일이 아니다. 퇴각로에 접어들었음을 인식하고 하는 일을 좁혀온 결과 '한반도 평화'로 생각과 활동이 모여져 왔다. 내가 해온 공부 중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내놓을 만한 큰 밑천 하나가 대외관계에서 '비대칭'의 측면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 아닌가. 이번 발표를 계기로 이 생각을 국내에서도 내놓는 길을 열심히 찾아야겠다.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면서 북한 입장을 너무 두둔한다고 "종북적 보수주의자"란 딱지를 붙였는데, 이제 "사대적 민족주의자" 딱지까지 붙이려 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