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국 외상회담을 계기로 조선 독립문제가 표면화하지 않는가 하는 관측이 농후해 가고 있다. 즉 번즈 미 국무장관은 출발 당시에 소련의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여 즉시 독립을 주장하도록 훈령을 받았다고 하는데 삼국 간에 어떠한 협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불명하나 미국의 태도는 ‘카이로선언’에 의하여 조선은 국민투표로써 그 정부의 형태를 결정할 것을 약속한 점에 있는데 소련은 남북 양 지역을 일괄한 일국 신탁통치를 주장하여 38선에 의한 분할이 계속되는 한 국민투표는 불가능하다고 하고 있다. 워싱턴 25일발 합동 지급보. (<동아일보> 1945. 12. 27일자)
< 동아일보>가 아직도 살아있는 신문이라면 해마다 12월 27일에는 1945년 12월 27일에 내보낸 이 기사에 대한 사과문과 반성문을 실어야 한다. 언론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례로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극악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용욱의 조사에 의하면 이 기사는 조작된 것이었다. (<존 하지와 미군 점령통치 3년> 53-68쪽) 모스크바 회담 결정 내용이 공식 발표된 것은 한국 시간으로 28일 오후 6시였고, 정확한 결정문은 그 이튿날 군정청에 도착했다. 그보다 이틀 앞서 나온 이 기사에는 신탁통치에 관한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뒤집어져 있다. 카이로선언 이래 모스크바 회담에 이르기까지 미국은 한국에 대해 긴 기간의 신탁통치를 주장해 왔고, 소련은 가급적 신탁통치 기간을 짧게 하고 방법에 있어서도 한국인의 자결권을 최대한 보장할 것을 주장해 왔다.
기사를 조작한 목적은 분명하다. 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한국 인민은 신탁통치라는 말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905~1910년의 보호조약 체제를 신탁통치의 경험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신탁통치를 소련이 주장했다는 거짓말은 신탁통치에 대한 반감을 소련에 대한 반감으로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사를 조작한 자는 누구였나? “워싱턴 25일발 합동”이라는 바이라인 내용이 사실이라면 합동통신사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봐야 할 텐데, 워싱턴의 어느 매체에 누가 쓴 글인지도 밝혀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한민당 대표 송진우가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의 조작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동아일보가 주범이란 사실은 증거가 분명한데, 범죄의 성격으로 보아 단독범행은 아니다. 공범 내지 공모자를 밝히는 것은 명확한 증거가 없으므로 쉽지 않은 일이다. 정용욱은 <태평양성조기>지 12월 27일자에 같은 기사가 실린 것으로 보아 맥아더 사령부 개입의 개연성을 제시했고, 이 허위 기사의 유포가 방치된 사실로 보아 군정청의 작용을 시사했다. 완벽한 실증적 증거가 없는 한도 내에서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개연성으로 보인다.
국제관리 형태의 신탁통치를 추구하는 미 국무성 정책을 뒤집기 위해 맥아더 사령부, 군정청, 이승만, 한민당의 제 세력이 협력해 온 사실이 정병준의 연구로 밝혀졌다. (<우남 이승만 연구> 427-508쪽) 정용욱의 연구를 통해 이 허위 기사에도 같은 맥락에서 맥아더 사령부와 군정청, 그리고 한민당 세력이 작용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승만 역시 이 음모에 빠지지 않은 사실이 그 전날 밤의 방송 내용에 나타난다.
26일夜 李承晩의 방송 요지는 다음과 같다. “워싱턴에서 오는 통신에 의하면 아직도 조선의 신탁통치안을 주창하는 사람이 있다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우리 조선은 이 안을 거부하고 완전독립 이외에는 아무것도 용인할 수 없음을 알리고 싶습니다. 여기에는 당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즉 트루먼 대통령, 번즈 국무장관, 연합국사령관 맥아더 대장, 하지 중장은 다 조선 독립을 찬동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결심을 무시하고 신탁관리를 강요하는 정부가 있다면 우리 3천만민족은 차라리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을지언정 이를 용납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적의 교묘한 선전으로 우리 한민족은 외국세력이 강요하는 것에는 무엇이나 복종하는 민족이라는 선입관념을 타민족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릇된 선입관으로 말미암아 워싱턴과 모스크바에서는 민족으로서의 우리의 명예를 대단히 손상하는 정책을 시행하자는 사람들이 있다 합니다. (...)” (<동아일보> 1945년 12월 28일자)
소련 뒤집어씌우기는 아직 하지 않고 있지만, 트루먼 대통령과 번즈 장관이 “조선 독립을 찬동”한다는 것은 이튿날 허위 기사에서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을 지어낸 것과 같은 맥락이다. 27일자 기사의 허구성은 몇 주일이 지난 뒤 타스통신의 해명 보도로 밝혀지게 되는데, 결국 밝혀지지 않을 수 없는 거짓말은 얼굴 없는 허위 기사에서나 할 수 있지, 이승만이 이름 밝히고 하는 방송에서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 편이고 소련은 우리의 적”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는 상통하는 것이다.
이 허위 기사로 촉발된 극한적 반탁운동이 올바른 독립, 민족국가 수립의 길을 망친 가장 결정적 계기였다. 매우 중요한 문제이므로 최대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검토할 중요한 사항의 하나가 반탁운동에서 김구의 역할이다. 김구가 반탁운동에서 가장 두드러진 역할을 맡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반탁운동을 반공-반소 운동으로 돌리려는 음모에서는 김구의 역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위 기사가 나간 그 날 저녁 김구는 엄항섭을 통해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란 제목의 방송 연설을 내보냈다. 귀국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에서 시국에 임하는 자세를 모처럼 명확히 밝힌 것이다.
나의 친애하는 3천만 父老姉妹兄弟여러분 내가 입국한지 벌써 1朔이 넘었습니다. 나는 서울에 있어서는 직접 간접으로 나의 의사를 표시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방에 계신 여러분에게 말씀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녁 방송은 전혀 지방에 계신 여러분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
1. 완전히 독립자주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합시다. 우리는 완전히 독립자주하는 또는 남북이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自利的 입장을 버리고 오직 국가지상 민족지상 독립제일의 길로 매진합시다. 네 黨 내 黨도 국가가 있은 뒤에야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존재할 여지도 있는 것입니다.
2.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신민주국을 건설합시다. 국민 각개의 균등한 생활을 확보하지 못하면 신민주국을 건설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 그 다음에는 不少한 협잡정객과 또 친일분자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하여야겠습니다. 그것은 대의명분상으로만 그럴 것이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그들이 통일을 방해하고 있는 사실이 다대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소한도라도 죄악이 만만하여 용서할 수 없는 불량분자만은 엄징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3. 세계적 대 가정을 건립합시다. 세계의 평화를 유지하고 인류의 행복을 증진하려면 단결한 세계의 대 가정을 조속히 건립해야 합니다. (...)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한 우방의 투자를 환영합니다. 각 방면에 있어서 기술적으로 원조하여 주는 것을 간망합니다. 또 우리 조국의 신 건설을 위하여 우리에게 차관하여 주기를 고대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로 우방 단독적이나 공동적으로 우리를 통치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한인은 마땅히 한인의 정부가 통치하여야 할 것입니다.
4. 강고한 국방군을 건립합시다. 우리는 강고한 국방군을 요합니다. 우리 국가의 질서와 세계의 평화를 지지하기 위하여 강고한 국방군을 요합니다. 이것은 과거의 망국사와 또는 세계 제2차 대전에서 우리에게 주는 바 큰 교훈이니 多言을 贅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30일자)
연설 끝에 붙인 4개항 제안에서 눈에 띄는 점이 몇 가지 있다. (1)항에서 건국을 우선 이룰 때까지 당파적 입장을 유보하자는 것은 중도파의 일반적 논점이다. 그리고 (2)항에서는 삼균주의 수준의 사회주의 원리 적용을 제안했다. 이 두 가지 제안은 삼균주의의 창시자 조소앙도 참여한 특별정치회의 주장의 핵심인데, 임정 ‘비주류’가 주도한 특별정치회의를 적어도 원론적 차원에서는 김구가 지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볼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 (2)항 뒷부분의 ‘협잡정객-친일분자-민족반역자’ 숙청 제안이다. 이 시점에서 김구는 “실제에 있어서 통일을 방해하는” 자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일파의 실제적 위협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은 ‘반공-반소’에 극단적으로 매달릴 수 없는 조건이다.
이 연설에서 김구는 중도적 입장의 꾸준한 노력을 내다보고 있었다. 바로 며칠 후 ‘반탁’을 명분으로 임정의 통치권을 주장하고 나설 낌새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공-반소를 주장하고 나설 기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그 날 <동아일보>의 허위 기사를 만들어낸 사람이 아니라 그 기사에 속은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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