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의 횡령과 독직에 관한 기사가 종종 나오고 있다. 간부급이 연루된 규모로 보아 평상시의 산발적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스템 붕괴에 따른 모럴 해저드 현상의 확산 정도가 아니라, 구 지배체제 핵심부에 의한 전면적 조직범죄로까지 보인다.
(1) 매일신보 1945년 10월 08일
종로 보안서에서는 6일 전 경기도 지사 生田淸三郞을 비롯하여 경기도청 내의 일본인 부장과 각 과장 20명을 검속하고 취조 중인데 사건의 진상은 아직 모르나 업무횡령과 독직사건이라고 한다.
(2) 매일신보 1945년 10월 16일
전 경기도경찰부장 岡久雄 이하 일인 경찰관과 일부 반역자들이 결탁하여 영등포 鍾紡창고에서 막대한 수량의 광목을 빼앗아 내어 혼란기에 있는 경제 상태를 더욱 혼란시키고 사사로이 배를 불렸다는 사건은 기보한 바이다. 종로 보안서에서는 그 동안 이들을 엄중 취조하던 중 여죄 일절도 판명되었으므로 16일 공갈 수뢰의 죄명으로 원 경기도 경제과 小野寺完爾, 谷本義國, 猪狩利喜三, 西村復雄을 구속하여 송국하였다. 그리고 平林幸一, 川面均은 기소유예, 李英介는 불기소로 되었고 자취를 감추고 있는 원 경기도 경제과장 淸水는 뒤이어 그 행방을 수색 중이다.
(3) 중앙신문 1945년 12월 07일
군정청 법무국장 매트 테일러 소좌의 5일 발표에 의하면 전 일본인 관리가 공금을 부당하게 사용한 사건을 조사하기 위하여 법무국내에 특별범죄수사위원회가 새로 설치되었다 한다. (...) 지금까지 조사한 결과는 전 일본인관리의 공금횡령사건이 30여건이나 되어 동위원회 보고에 의하여 서울지방법원에서 판결되리라고 한다.
(4) 서울신문 1945년 12월 16일
전 총독부 체신국장 伊藤泰吉과 전 경무국위생과장 阿部泉 이하 다섯 명의 업무횡령사건의 공판은 작 15일 오전 10시 서울대법원 대법정에서 李仁 대법관 주심 아래 개정되었다. 이날 법정 방청석에서는 왜놈 관리들의 최후까지 착취를 꾀하여 사복을 채우려는 단말마의 발악의 죄를 우리들의 손으로 처단하는 광경을 보고자 아침부터 밀려든 방청객으로 초만원을 이루었는데 더욱이 培材中學校 학생 50여 명이 특별방청하여 종시 이 통쾌한 광경을 보고 있음이 눈에 띠었다. 먼저 위생과장 阿部의 죄상을 심리하고 阿部의 증인으로서 鍋田 외 1명에 대한 심문이 있은 후 대법관으로부터 심리는 끝났으나 무슨 할 말이 있거던 말하라는 말에 阿部는 눈물을 흘려가며 관대한 처분을 내려 달라고 애원하자 방청석에서는 이 가긍하고도 통쾌한 것에 웃음소리가 나오곤 하였다. 이어서 전 체신국장 伊藤이와 체신부 회계과장 이하 4명에 대한 업무행정의 범죄를 추상같고 준열한 대법관의 질문 앞에 심리가 오후까지 계속되어 일단 심리를 마치었는데 언도는 머지않아 하리라 한다.
(5) 동아일보 1945년 12월 19일
40년 동안 우리 3천만동포를 쥐어 짜 먹기에만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총독부 일인 고급관리들은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단말마적인 발악을 하다가 속속 우리 검찰의 손에 검거되어 방금 엄중한 취조를 받고 있는데 또한 전 총독부 회계과장 上野武雄과 동 출납계장 上山敏雄은 6,400만원을 횡령한 사실이 발각되어 17일 特別犯罪審査委員會에 검거 구속되었다. 이제 영어의 몸이 된 上野는 上山과 결탁하여 가지고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공금 6,400만원을 38도 이북에 있는 일인관리에게 지불할 특별위로금이라 하고 9월초에 安田銀行을 통하여 일본에 송금한 후 아무 일도 없는 듯이 경성에 체류하고 있으면서 기회를 보아 일본으로 비밀히 탈출하려는 직전에 이 사실이 탄로되어 체포되고 만 것이다.
일본의 한국 지배는 1945년 8월 15일 정오 천황의 항복 방송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었다. 38선 이북에서도 소련군 민정부가 설치되는 9월 하순까지 일본인의 역할이 계속되었고, 이남에서는 11월 중순까지 미군과 일본인의 공동지배 상황이 계속되었다. 식민지배의 유산 중에는 8월 15일 이후에 만들어진 것도 적지 않았다.
식민지배가 끝나는 시점에서 일본인의 무책임한 파괴와 범죄 행위를 “나쁜 놈들이니까 끝까지 나쁜 짓을 했군.” 정도로 막연히 넘어가기 쉽다. 그러나 혼란을 틈탄 범죄 행위에 미군과 한국인의 몫도 있었다는 사실이 가려져서는 안 되겠다.
예컨대 경제 혼란의 대표적 현상인 식량난을 놓고 일본으로의 미곡 밀수출을 문제 삼곤 했다. 일본 쌀값이 국내의 열 배 이상 되기 때문에 모리배들이 쌀을 빼돌려 국내에 식량난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사실이 그랬다면 그것이 어찌 모리배들만의 잘못이겠는가. 농민들에게 쌀값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는 국내 시장 운영에 먼저 문제가 있는 거지.
식량난을 몰고 온 직접 원인은 미곡시장의 일체 제한 규정을 철폐하고 자유매매를 선언한 10월 5일의 군정청 일반고시 제1호였다. 조선의 식량정책은 1939년 말부터 전시체제에 들어가고 1943년 8월 ‘조선식량관리령’ 발포 이후로는 엄격한 배급체제에 들어가 있는 상태에서 해방을 맞았다. 10월 들어 군정청은 이남 지역의 작황을 낙관하면서 미곡의 자유시장화를 선언했다. 이것이 미곡시장의 투기화를 불러와 엄청난 혼란을 일으킨 다음 이듬해 1월에 ‘미곡수집령’을 발포해야 했다.
점령한 지 한 달이 안 된 시점에서 미곡시장 자유화처럼 민생에 영향이 큰 사안에 섣불리 손댄 까닭이 무엇일까? 이로부터 큰 이익을 얻을 한민당계 지주-자본가 집단의 로비 가능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미국식 자유시장의 우월성을 확인한다는 명분이 따랐을 것이다.
자금력이 대규모 폭력을 정치에 끌어들인 문제를 어제 지적했는데, 폭력이란 인간사회 어디에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폭력이 다른 인간관계를 압도할 만큼 대규모로 조직되는 데는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 해방 직후의 한국에 엄청난 규모의 유휴자금이 존재했다는 것이 그런 조건이었다. 이 시기 한민당 측에서 보여준 현금동원 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일본인에 대한 채권이 동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사업이 정체되어 있던 상황에서.
해방을 전후한 통화량의 급증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략 50억원대에 머물러 있던 조선 통화량이 몇 달 사이에 30여억원 늘어났다고 한다. 강준만은 이것을 “패전한 일본인들이 미군 진주가 지연된 기간을 이용하여 재한 일본인들의 귀국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마구 찍어낸 탓에 빚어진 일”로 보았다. (<한국현대사산책 1> 184쪽)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 - 식민지배의 연속과 단절”(<역사비평> 64호, 2003 가을)과 “8-15 이후 ‘融資命令’의 실시와 무책임의 체계”(<한국민족사연구> 33호, 2002. 12)에서 이 돈의 출구를 살펴보았지만 메워지지 않는 구멍이 너무나 컸다. 그런데 맨 위의 인용 기사 중 (5)번에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정병욱의 연구는 ‘합법적’ 출구를 찾는 데 제한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와 다른 ‘불법적’ 출구도 있었던 것이 아닐까?
총독부 회계과장과 출납계장 둘이 공모해서 6천4백만원을 빼돌렸다고 한다. 전국 통화량의 1%에 육박하는 이 금액을 “38도 이북에 있는 일인 관리에게 지불할 특별위로금이라 하고 9월초에 야스다은행을 통하여 일본에 송금”했다고 한다. 특별위로금으로 지출했으면 괜찮을 것을 착복하려고 빼돌려서 죄가 되었다는 말인가?
회계과장과 출납계장의 개인적 착복인지, 아니면 윗사람들 시키는 대로 했다가 총대를 멘 것인지도 이 기사만으로는 판별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평소에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규모의 돈이 황당한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개인적 착복이더라도 자금의 불법 유출이 횡행하는 상황에 편승한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 시점에서 돈의 움직임을 좌우할 수 있는 위치의 일본인 고위 관리의 입장에 내가 있었다면 어떤 짓을 할 수 있었을까? 몇몇 나치 거물처럼 거금을 챙겨 남아메리카로 도망갈 길도 없었다. 싸 들고 고향에 돌아갈 길도 없었다.
나 같으면 내가 아는 조선인들 중 능력은 우수하되 품성이 저열한 인간들에게 돈벼락을 때려줬겠다. 그래야 우리가 떠난 뒤 조선 정치가 개판이 되고, 조선 백성들은 구관이 명관이었다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정병욱의 논문 “해방 직후 일본인 잔류자들”에 따르면 초기 미군정의 재정 정책은 일본인의 조언에 따라 이뤄졌다고 한다. 군표 대신 조선은행권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미군정의 은행권 남발을 유발, 이전의 통화 증발을 물타기한 것이다. 덕분에 고위 책임자들이 모두 아무 처벌 없이 귀국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군정청 재무국 촉탁으로 통역을 담당하느라 잔류했던 한 조선식산은행원 출신자의 회고에 따르면, 자신은 재무국장 고든과 두 명의 보좌관 로빈슨, 스미스로 구성된 미국측과 미즈타(총독부 재무국장), 호시노(조선은행 부은행장), 야마구치(조선식산은행 이사)로 구성된 일본측의 통역에 전념했다고 한다. 해방 직후 이 6명 사이에서 한국 재정과 금융에 관한 지배의 인수인계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호시노는 미군정의 군표발행 계획을 혼란만 줄 뿐이라며 반대하고 필요하다면 조선은행권을 찍으라고 권유했다. 이후 은행권 남발을 통한 미군정의 재정자금 확보가 일상화되었다. (136쪽)
'해방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9. 1945. 12. 23 / 민족주의 임정, 민주주의 인공 (0) | 2017.12.16 |
---|---|
[Re.36] 1945. 12. 21 / 김구는 이승만을 절대 신뢰했나? (2) | 2017.12.12 |
[Re.34] 1945. 12. 16 / 돈이 주먹을 불러오다. (0) | 2017.12.03 |
[Re.33] 1945. 12. 15 / 이승만이 초조했던 이유 (0) | 2017.11.09 |
안-8. 1945. 12. 13 / '친일'과 '협력'의 경계선은 어디? (0) | 2017.11.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