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 일전(12월 10일) 회견에서 “통일운동에서 민족반역자 제외의 선후문제는?” 하는 물음에 선생님은 “나는 그런 분자는 먼저 제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하셨지요. 그런데 김구 선생은 귀국 이튿날 회견에서 “爲先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임으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현실정치의 가장 큰 문제인 친일파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는 정치노선의 중대한 차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차이를 놓고도 김구 선생의 노선에 신뢰를 지킬 수 있습니까?
안재홍: 이 자리에서 하는 말이 지금 사람들에게 들리는 것이라면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일전의 회견에서도 임시정부의 인민공화국 해체 요구에 대한 의견을 묻기에 “말할 수 없다”고 대답했어요. 의견이 있지만 오해를 불러올 것을 꺼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65년 후의 사람들에게라면 솔직히 대답하겠습니다.
백범 선생께서 정녕 불량분자 배제를 후일로 돌린다면 그분 노선을 따를 수 없습니다.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수 없습니다.
산수에서는 A+B와 B+A가 같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일은 이와 다릅니다. 친일파 배제를 A, 건국을 B라 할 때, A를 해놓은 뒤의 B와 A를 하지 않은 채로의 B는 서로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B를 해놓은 뒤의 A와 B를 하지 않은 채로의 A도 서로 다릅니다. 어느 쪽을 먼저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풀어서 얘기하죠. 친일파를 배제하지 않은 채로 건국하면 세워진 나라의 칼자루를 친일파가 쥐게 되기 쉽습니다. 친일파 속에 권력과 재력을 가진 경찰, 부자 등이 많으니까요. 그들이 칼자루를 쥐고 있는데 친일파 처리가 제대로 될 수 있겠습니까?
한편 소위 친일파도 옥석구분(玉石俱焚)을 피하고 그중의 건실한 요소를 살려내려면 나라를 먼저 제대로 세워놓아야 합니다. 친일파가 배제된 국가가 세워지면 도덕적 약점이 없는 당국자들이 악질 친일파를 철저히 숙청하면서 비교적 양심적인 인재들에게는 반성의 길을 열어줄 수 있습니다. 반면 새 국가의 당국자들 자신이 도덕적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친일파 처리 문제에 유연한 자세로 임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백범 선생께 기회 있는 대로 이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미군정과 한민당의 협조 문제가 있어서 분명히 말씀하기 어려우시겠지만, 머잖아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시기 바라고 있습니다.
김기협: 친일파 중의 “건실한 요소”와 “비교적 양심적인 인재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애국자와 친일파의 흑백론적 구분에는 물론 형식적-논리적 문제가 있지요. 그런데 선생님 말씀은 친일파에 대한 보다 분석적 시각이 현실정치 측면에서도 필요하다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석적 시각이 바람직할지 선생님 생각을 말씀해 주시지요.
안재홍: 며칠 동안 장마비가 내렸다고 합시다. 35년 일제 지배를 받고 나서 친일을 했냐 안 했냐 하는 문제는 빗방울 맞은 일이 있냐 없냐 따지는 것과 비슷해요. 비 맞고 싶어서 발가벗고 뛰쳐나간 사람들은 얼마 안 되고, 대개는 부득이 우산 쓰고 나갔다가 튀는 빗방울 묻은 정도예요. 방 안에 꼼짝 않고 틀어박혀 비를 철저히 피한 사람은 몇 안 돼요.
나 같은 사람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인정받지만, 나도 바지자락에 빗물이 튄 사람이에요. 감옥 몇 번 드나들었다고 해도 감옥에서 고생한 시간보다 언론사 간부로 호의호식하며 행세한 시간이 더 길지요. 식민지 35년간 내 존재와 활동이 민족과 사회를 위한 것이 되도록 노력하기는 했지만, 현실 속에서는 명쾌할 수 없는 측면들이 있었죠. 예를 들어 현실 속의 최선으로 여긴 물산장려운동에는 분명 타협적 성격이 있었습니다.
물산장려운동 함께 하던 이들이 한민당에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 말기에 길이 갈라져 손가락질을 나보다 많이 받게 된 분들이죠. 나는 그분들이 막바지 몇 해 동안의 행적을 반성하고 나와 같이 건국사업을 뒷전에서 돕는 위치로 돌아오기 바랍니다. 학식과 경영능력을 가진 그 사람들을 포용하는 것이 새 나라의 성공을 위해 필요한 일입니다.
포용이 이뤄지려면 포용하는 측과 포용받는 측의 뜻이 어울려야 합니다. 포용하는 측에서는 “당신들은 흠이 있으니 앞에 나서지 마시오.” 제재하고 포용받는 측에서는 “우리는 과거의 행적을 반성하며 뒷전에서 봉사하는 자세를 지키겠소.” 자숙해야 포용이 이뤄집니다. 그래서 나부터 뒷전에서 봉사하는 자세를 지키고자 애쓰는 것입니다.
김기협: 해방 후 지금까지 4개월간의 사태 진행을 보면 포용하는 측보다 포용받는 측의 태도에 더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민당 사람들 말입니다. 건준이 민족주의 기준에서는 더 떳떳한 입장인데, 한민당에서는 오히려 건준이 총독부 돈 받아먹었다고 친일파로 몰아붙이다니, 정말 적반하장입니다. 그런데 여 선생이 총독부 돈 받았다는 것은 사실입니까?
안재홍: 총독부 돈에 관해 나는 받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듣지도 않은 사람이니 뭐라 말할 입장이 아닙니다. 몽양 선생이 내게 돈 이야기 않아준 데 감사할 따름입니다.
굳이 생각을 말한다면, 건준이 총독부에게 돈을 받았어야 마땅합니다. 총독부는 우리 백성에게 세금이란 명목으로 돈을 짜내 쓰고 싶은 데 썼고, 자기네 식의 ‘질서 유지’ 비용도 그 돈으로 썼습니다. 건준이 질서 유지 사업을 저네들에게 넘겨받으려면 그 비용을 새로 백성들에게 걷어야 합니까? 당연히 저네들이 틀어쥐고 있던 백성의 세금을 넘겨받아야지요.
김기협: 한민당의 조병옥이 미군정으로부터 경찰 지휘권을 받은 후 식민지시대의 악질 경찰을 대거 중용하고 있습니다. 한민당 지도부는 다소 친일 혐의가 있다 해도 반성하는 데 따라 재활용이 가능한 집단이라고 선생님은 보시는데, 이제 그들이 재활용이 도저히 불가능한 집단과 손을 잡기 시작하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이승만 박사도 친일 행적이 뚜렷한 사업가들을 불러 모아 ‘경제보국회’란 걸 만든다죠. 그들을 끌어 모으는 미끼가 군정청의 도움으로 은행에서 대규모 융자를 얻어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융자금의 절반은 이 박사의 정치자금으로 주머니에 넣고 절반은 사업가들이 나눠가진다는데, 상환할 생각은 전혀 없이 그냥 은행돈 갈라먹기인 모양입니다.
경찰에서나 경제계에서나 친일은 고사하고 전범재판에 회부될 만한 사람들이 오히려 활개를 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조병옥과 이승만이 관계된 일을 보면 미군정이 이 변화에 큰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미군정의 역할을 선생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안재홍: 미군정은 우리에게 주어진 피할 수 없는 조건입니다. 우리가 우리 힘으로 해방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방시킨 자의 개입을 피할 수 없습니다. 군정 조치 중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 해서 군정을 마음대로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련군은 군정을 시행하지 않고 있고, 그쪽이 건국 준비에 더 유리한 조건으로 보입니다. 미국이 왜 군정을 필요로 하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인들이 소련인들보다 이곳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뭔가 오해를 한 것 같습니다. 군정 담당자들이 지금까지 취해 온 잘못된 조치도 사정을 잘 몰라서 오해를 한 결과로 나는 봅니다.
담당자들의 오해나 실수가 아니라 우리 독립이 미국의 국익에 어긋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조치를 취한 것이라면 지금 당장 일본 대신 미국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펼쳐야 하겠지요. 내가 아는 미국 역사로 보아 그렇게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군정 당국자들의 태도도 몇 달 사이에 많이 바뀌었습니다.
지금 군정장관 교체도 그런 증거 아닙니까? 아놀드 소장 몇 번 만나봤는데 인간적으로 참 괜찮아요. 그런데 성격이 너무 고지식해서 불만 보면 기름 붓는 짓을 안 하고 못 배기는 사람입니다. 새로 오는 러치 소장은 법률과 정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니 기대가 갑니다.
그래도 떨치기 힘든 한 가지 걱정은 미군과 한민당 일각의 맹목적인 ‘반공(反共)’ 분위기입니다. 우리 사회의 ‘좌익’은 공산주의가 아니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들에게 ‘좌익’ 딱지를 붙인 것입니다. 나만 해도 물산장려운동 같은 것 안 했으면 ‘좌익’ 딱지 붙였겠죠. 실정 모르는 미군을 깨우쳐줘야 할 텐데, 조병옥 씨 같은 이들은 오히려 미군의 오해를 더 부추기고 있으니... 요즘 이승만 박사마저 ‘반공’ 분위기에 휩쓸리기 시작한 것 같아서 더욱 걱정입니다.
김기협: 그것 참, 물산장려운동이 좌우 구분의 기준이 되다니 착잡한 일입니다. 경제를 살리자는 것이 물산장려운동 아닙니까. 백성을 빈곤으로부터 건져낸다는 것이 기본 목적인 것을, 거기에 식민지체제를 고착시키는 효과가 있다 해서 ‘개량주의’라 부르고 마치 일종의 반민족 행위처럼 보는 후세의 시각을 저는 의아하게 봅니다.
선생님은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했지만 그 후 일제에 대한 협력 행위가 없었기 때문에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의 명예를 지킬 수 있었지요.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그 후 전쟁기에 다소간의 협력에 나섰기 때문에 물산장려운동 자체도 친일 의혹의 대상이 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물산장려운동 자체에 민족주의 입장에서 오류가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안재홍: 사람의 일이란 칼로 벤 듯 선명한 것이 아닙니다. 후세에는 어떻게 보게 되든, 지금은 물산장려운동을 친일 행위로 보는 사람이 없어요. 극좌파 일부의 선동 외에는.
그런데 자치운동은 다릅니다. 나 자신도 자치운동에는 친일의 의미가 곁들이기 쉽다고 봐서 조금 관여하다가 곧 그만뒀지요. 문제는, 두 운동이 본질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백성의 생활을 이쪽은 경제적으로 향상시킨다는 것이고 저쪽은 정치적으로 향상시킨다는 것입니다. 현실적 향상을 위해서는 통치권을 가진 일제와 어떤 범위에서든 협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자치운동의 협력적 측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정치에 직접 관계되는 영역이기 때문일 뿐, 물산장려운동도 본질적으로 덜 협력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립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명예롭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같은 상황에 다시 놓인다면 ‘협력’을 꺼리기보다는 민생을 돕기 위해 같은 일을 할 것이니까요. 지금 미군정에 대해서도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타협적’이고 ‘협력적’인 태도를 취하고자 애를 씁니다.
민생을 돕기 위해 권력과 타협하는 것은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의 의무입니다. 그것 때문에 욕을 먹는다면 그것도 자기 몫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만 “빈 방에 혼자 앉아서도 큰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가다듬는다”는 성현의 가르침처럼 스스로 부끄러움이 없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살필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물산장려운동을 후세 사람들이 ‘개량주의’나 ‘협력’으로 보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 운동을 좋은 뜻으로 시작했다가 민족의식이 차츰 흐려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를 ‘반민족 행위’의 뜻을 가진 ‘친일’로 볼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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