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사령관 다음의 미군정 제2인자인 아놀드 군정장관이 10월 10일 기자회견에서 미군정을 38선 이남 조선의 유일한 정부라는 주장과 함께 격렬한(그리고 저열한) 언사로 인민공화국을 비난했다. 10월 13일자 <자유신문>에는 이에 대한 각계 인사들의 반응이 실렸는데, 미군정에 협력적인 인사들조차 아놀드의 현실 인식과 표현 방식에 문제를 지적했다.

 

10월 16일 하지의 성명서는 미군정이 유일한 정부라는 아놀드의 주장을 확인해준 것이다.

 

군정부는 남부 조선에 있어서 유일한 정부이다. 군정부는 군정청본부 及 도청 군을 통하여 설립된 각 기관을 운영하는 것이며 군정부의 유일한 정부는 조선의 복리와 조선을 위하여 견고한 정부와 건전한 경제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조선국민이 군정의 법령에 순응치 않거나 또는 협력을 게을리 함은 오직 국가의 완전독립의 시일을 지연시키며 따라서 법령에 순응치 않거나 또는 고의로 군정을 훼상하는 원인을 만들 뿐이다. 군정부는 인류의 침략자 압제자를 정복한 연합국의 모든 실력으로 지지되어 있다. 따라서 연합국의 명령을 실시하기 위하여는 언제나 실력 행사를 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실력발동을 필요치 않도록 희망하는 바이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16일)

 

 

 

그런데 정병준은 <우남 이승만 연구> 450쪽에서 위 성명서 중 "통치권을 지배하는 준비가 되면 곧 조선에 독립과 조선인 자신에 자유정치를 줄 것이다."란 대목을 지적했다. “실제로 하지는 한국인들에게 독립과 자유정부를 ‘줄’ 위치도 아니었고, 그럴 만한 결정권도 없었다”는 것이다. 지적한 것을 보니 정말 중요한 문제다. 9월 9일 진주 당시 하지의 성명서에도 점령군의 임무는 질서 유지 등 관리 측면으로 밝혀져 있었다.


태평양방면 육군총사령관이요 연합국 총사령관 맥아더 대장을 代하여 余는 오늘 남조선 지역에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다. 駐 朝鮮 美合衆國 司令官으로서 余는 玆에 下記 항복에 관한 諸 조건을 確守케 하노라. 余는 玆에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는 동시에 조선의 경제 상태를 앙양시키며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며 기타 국제법에 의하여 점령군에게 과하여진 기타 제 의무를 이행하노니 점령지역에 있는 제군도 또한 의무를 다 하여라.


독립과 자유정치를 한국인에게 누군가가 줄 것이라면 그것은 여러 연합국의 집합이다. 반탁운동의 도화선이 될 모스크바 3상회의 같은 연합국 회담을 통해 결정될 일이었다. 연합국 중 하나인 미국의 의사를 결정하는 데도 전쟁이 끝난 이제 군부보다 국무성이 앞장서야 할 상황이었다. 주둔군 사령관은 한국의 정치적 진로를 언급할 입장이 아니었다.

 


단순한 군인을 자임하는 하지가 이런 용감한 발언을 한 배경을 정병준은 그 직전 맥아더와 이승만과의 만남에서 찾는다. 이에 관한 정병준의 관점은 나도 수긍이 갈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므로 오늘은 그 관점을 소개하는 데 집중하겠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의 외교노선은 다변주의(multilateralism, 또는 국제주의 internationalism)에서 일방주의(unilateralism, 또는 국가주의 nationalism)로 옮겨졌다. 원래 일방주의는 강대국이, 다변주의는 약소국이 선호하는 노선이다. 미국이 초강대국으로 일어서면서 다변주의에서 일방주의로 옮겨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세였다.


그런데 종전 직전까지 미국 정부, 특히 국무성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 아래 다변주의의 기조를 지키고 있었다. 한국 문제를 놓고도 국무성은 다변주의에 입각한 신탁통치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과의 대립이 다변주의의 관철을 어렵게 만들었다. 소련과의 대결을 주장하는 극우파는 국무성의 다변주의를 이적행위로 몰아붙였다. 국무성을 주 타깃으로 한 매카시선풍은 이런 분위기에서 나왔다.


1945년 4월에서 6월까지 열린 샌프란시스코 회의 때부터 미 국무성에 공산주의자가 많다고 불평한 이승만을 매카시는 선각자로 존경했을 것 같다. 매카시의 ‘폭로’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국무성의 외교노선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컸고, 아마 국민들도 초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새로운 위상에 대한 기대감에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맥아더와 하지가 이승만과 같이 국무성의 신탁통치 구상에 불만을 가졌던 것은 이데올로기 차원의 반공이 아니라 군부가 흔히 가지는 대결주의 성향의 태도로 이해된다. 4개국이 참여하는 신탁통치를 기다리며 질서 유지나 해주는 것은 재미도 없을 뿐 아니라 잘 했네 못 했네 비판을 받는 고된 일이 될 수 있었다. “소련은 나쁜 놈들”이라고 간단히 규정해 버리고 남한만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이 훨씬 쉽고 재미있는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가 곧 미국으로 떠날 정치고문 메럴 베닝호프에게 16일 전해준 비망록에 그 시점에서 하지의 의도를 보여주는 항목이 있다. ‘h 항’에서 “다만 명목상의 최고 지도자를 가진 정부라도 좋으니, 임시적으로나마 한국 정부를 조속히 수립하고, 가급적 빨리 총선거를 시행할 필요”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정병준, 위 책 447쪽에서 재인용)


북한에서 인민위원회를 토대로 자치정부가 형성되어 가고 있던 상황 앞에서 진도가 너무 처질까봐 급한 마음이 들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지의 의도는 북한과 달리 ‘위로부터의 조직’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꼭지점을 어디에 잡을지 복안이 없이는 추진할 수 없는 방침이다. 하지는 맥아더와 함께 이승만을 만나면서 복안을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상관인 맥아더가 인정하는 인물을 앞세우는 길이라면 하지가 걱정할 일이 없었다.


미군정 당국은 아놀드의 신랄함을 넘어 저열하기까지 한 표현으로 건준과 인공을 부정했다. 미군정이 남한의 유일한 행정조직이라는 그 논리를 연장하면 임정도 부정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1941년 봄 임시정부의 주미외교위원부 승인 이후 임시정부의 대표자로 행세해 왔다. 귀국 시점에서 이승만의 과제는 임시정부의 권위를 최대한 빌려 쓰면서 자신의 세력 근거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 목적으로 하지의 도움을 받아 만든 것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였다.


소련군의 존재가 없더라도 한국에 통일국가가 세워진다면 1943년 이래 이승만이 여지없이 주장해 온 극단적 반공은 용납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이 사사로운 동기에서 통일국가 수립을 방해했다는 확고한 증거를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에게 그런 동기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귀국길 도쿄에서 맥아더와 하지와의 만남은 세 사람이 공유하는 이해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