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귀국하는 길에 10월 10일에서 16일까지 도쿄에 머무르며 맥아더의 극히 이례적인 환대를 받았다. 도쿄에서 ‘가이진(外人) 쇼군’으로 군림하던 맥아더에게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은 사람은 따로 없었을 것 같다. 한국에서 ‘미국인 총독’으로 군림하던 하지가 이 기간 중에 도쿄에 다녀갔는데, 이승만과 만나도록 맥아더가 불렀던 것 같다. 16일 오후에는 이승만을 자기 전용기에 태워 보냈다.


서울에 온 이승만을 하지가 떠받드는 모습에서 맥아더의 입김이 얼마나 셌는지 알아볼 수 있다.


하지는 이승만이 귀국한 다음 날인 10월 17일에 신문기자들을 배석시킨 가운데, 이승만을 조선의 진정한 애국자로 묘사하며 찬사를 보냈다. 하지는 이승만을 앞세운 채 수행하듯 뒤따라 들어왔고, 이승만을 기자회견장 헤드테이블 중앙에 앉히고, 자신은 그 왼쪽 자리에 앉았다. 군정장관 아놀드가 헤드테이블의 말석을 차지했고, 하지의 개인 통역 이묘묵이 이승만의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10월 20일 개최된 연합군 환영회는 더욱 극적이었다. 5만 명의 인파가 참석한 가운데 중앙청 앞에서 개최된 이 환영회에서, 하지는 짧은 답사 직후 이렇게 이승만을 소개했다. “이 가운데 조선 사람의 위대한 지도자가 있으니 소개하겠습니다. 조선의 해방을 위해 싸웠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큰 세력을 가진 분입니다. 개인의 야심은 추호도 없고 다만 국제 관계에 일생을 바치고 노력하신 분이며 따라서 군정부 정당에도 아무런 관련이 없고 단지 개인 자격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하지는 이승만이 연설하는 내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역사비평사 펴냄) 457쪽)


이승만은 해방 당시 국내에서는 ‘잊혀진 인물’이었다. 정병준은 위 책 399-400쪽에서 종전을 앞두고 미군 정보당국이 몇 가지 경로를 통해 한국의 잠재적 지도자들을 조사한 내용을 소개하는데, 어느 경로에서도 이승만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이 그의 독립운동 경력에서 정점이었고, 미국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했다는 이유로 1925년 탄핵당한 후 독립운동가로서의 위신이 추락했다.


재미동포 사회에서 지지 기반을 얼마간 지키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많은 ‘안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반대자를 설득하려 애쓰기보다는 더욱 배척해서 그 반작용으로 자신에 대한 지지가 결속되도록 유도하는 사람이었다. 정치공학의 달인이었다.


그가 40대 중반의 나이에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된 것이 무엇 덕분이었을까? 후에 ‘국부(國父)’의 위상을 세울 근거가 여기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이유를 나는 아직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독립운동가들이 국제적 압력, 특히 미국의 영향력에 의한 독립에 희망을 가지고 미국통인 그를 선택했으리라고 짐작되지만, 아무리 임시정부라도 국가 원수를 그런 편의적 기준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해방 당시 이승만은 독립운동가로서 권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지도층 인사들 사이에서 미국통으로서의 성망은 매우 높았다. ‘단파방송 사건’에서 그 성망이 부풀려지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전쟁 중 엄격한 보도관제를 뚫고 외부 소식을 얻는 길이 단파방송에 있었는데, 1942년 말 경성방송국과 개성방송국의 단파방송 청취 적발로 불거진 이 사건에 여운형, 허헌, 백관수, 함상훈 등 해방 후 건준과 한민당의 주역이 될 인물들이 폭넓게 연루되었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였던 송남헌은 이렇게 회고했다.


1942년 6월경 샌프란시스코에서 이승만 박사가 흥분한 목소리로 “2천5백만 동포들이여 조국광복의 날이 멀지 않았으니 동포는 일심협력하여 일제에 대한 일체의 전쟁 협력을 거부하고 때를 기다리라”고 한 연설을 나는 직접 들었다. 이 방송을 들은 나는 가슴이 마구 뛰었고, 흥분해서 변호사사무실로 달려가 그대로 전했다. 내가 전하는 말을 듣고서 모두가 금방 독립이라도 되는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이 말은 곧 시내로 퍼져나갔다. (심지연, <송남헌 회고록>(한울 펴냄) 40쪽)


이승만은 1942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몇 차례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방송을 행했고, 독립을 간절히 바라던 국내 사람들의 귀에 그의 목소리가 독립의 희망과 겹쳐져 울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에 편승해 이승만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려 애쓴 추종자들이 있었다.


단파방송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되어 옥사한 홍익범(1897~1943)의 역할이 주목된다. 홍익범은 와세다대학을 나온 뒤 1926-32년간 미국 유학을 하고 귀국 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있었다. 단파방송 청취 내용을 지도층 인사들에게 유포시키는 데 앞장선 사람인데, 청취 내용에 이승만 선전을 교묘하게 끼워서 전달한 모양이다.


경찰 조서 등 자료를 보면 여운형, 허헌, 송진우, 함상훈 등 홍익범에게 정보를 제공받은 사람들이 이승만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내용은 미국에 이승만이 이끄는 임시정부가 세워져 있고 미국 정부의 큰 지지와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병준 위 책 399-424쪽) 홍익범은 미국 유학 기간에 이승만의 사조직 동지회에서 열심히 활동한 사람이었다. 정보를 제공받는 사람들은 반가운 정보에 묻어 들어온 허위 선전을 그대로 믿었다.


이승만은 1945년 7월 27일부터 시작해 맥아더에게 여러 차례 편지와 전보를 보냈다. 그는 맥아더를 만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미국에 있던 한국인이 귀국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사령부, 태평양지구 미육군사령부와 미 국무부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는 애초에 마닐라를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허가를 받았다가 도쿄 경유로 바꿨다. 맥아더가 마닐라에서 도쿄로 옮겨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맥아더를 만나고 싶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맥아더가 이승만을 환대한 까닭은 무엇일까? 미국 정부, 특히 군부와 소통이 잘될 만한 인물로 보아 밀어주고 싶어 했다는 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막연한 기대감으로 서울에서 하지까지 불러오며 그렇게 환대를 할 수 있었을까?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강한 동기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추측과 관련해 눈에 띄는 사실이 하나 있다. 하지가 도쿄에서 이승만을 만난 사실을 숨기려 애썼다는 것이다. 11월 2일 24군단 참모회의 석상에서까지 “이승만의 서울 도착에 깜짝 놀랐다.”고 거짓말을 했다. (정병준 위 책 442-443쪽) 만난 사실을 이렇게 감추려고 애쓴 것은 도쿄에서의 만남에 뭔가 비밀이 숨어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한국인이나 소련 측만이 아니라 자기 휘하의 참모들에게서도 숨겨야 했던 비밀이 무엇이었을까.


짐작이 가는 것은 맥아더, 하지, 이승만이 공유한 반공-반소 자세다. 맥아더는 루스벨트의 국제주의를 이어받은 국무부의 방침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 불만을 꿰뚫어본 이승만이 어떤 묘수를 제공해서 맥아더의 환심을 산 것이 아닐까? 그래서 그 묘수의 실행을 도와주라고 맥아더가 하지를 부른 것 아닐까? 나는 이승만에 대해 여러 모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가 맥아더보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