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절 중국의 文物社會에 대한 인식

 

앞 절에서 리치가 중국이라는 국가의 윤곽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살펴보았다. 이 절에서는 리치의 중국 인식의 전체적 깊이를 더듬어보기 위해 중국의 사회와 문화가 가지고 있던 질적 특징들, 그리고 중국인의 자기인식 근거인 역사에 대해 리치가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본다.

리치 이전에 중국 역사를 유럽인에게 소개한 책으로는 1585년 나온 멘도사(Juan Gonzales de Mendoza)Historia de las cosas mas notables, ritos y costumbres del gran Reyno de la China가 있었다.[238] 아우구스티노수도사 멘도사는 1583년 그레고리 13세 교황의 명령을 받아 이 책을 지었는데, 일본 선교의 대성공이 유럽에 알져지고 그 다음 선교지로 중국이 각광받고 있던 이 시기에 이 책은 굉장한 인기를 끌어서, 1600년까지 유럽 각국어로 수십 판을 거듭했다. 당시 유럽에 전해져 있던 거의 모든 중국에 관한 자료를 최대한 활용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책은 교황청이 뒷받침한 권위까지 겹쳐져서 18세기 말까지 중국에 관한 표준적인 참고서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통용되었다.[239]

[238] Roma, 1585. 영역본으로 George T Staunton, ed, The History of the Great and Mighty Kingdom of China, and the Situation thereof (London, 1853-54)가 있다.

[239] D Lach, Asia in the Making of Europe, (Chicago, 1965): 742-751.

멘도사의 이 책에 역사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실제 역사를 다룬 내용은 그리 많지 않다. 당시 유럽에 전해진 중국 관계 정보가 마카오에서 입수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중국 남부의 당시 사정을 알리는 데 내용이 집중되어 있었다. 많은 이름들이 音譯되어 있지만 원래 모습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형되어 있어서 그 중에는 아직도 고증이 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특기할만한 점은 중국의 첫 임금이 기원전 2600년경부터 다스리기 시작했다고 한 것인데, 이는 당시 통용되던 聖書연대기에 비추어 놀라운 일이었다.[240]

[240] E Van Kley, "Chinese History in 17th-Century European Reports" (Actes du Ille Colloque International de Sinologie, Chantilly, 1980. Paris, 1983) 196-197.

중국 역사의 길이에 관한 문제는 그 후 전례논쟁과도 맞물려 18세기까지 계속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멘도사 이후 중국에 관한 정보 공급을 독점하다시피 한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 역사가 기원전 2600년경, 또는 그 전에 시작했음을 확인했지만 보수파 신학자들은 이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241] 리치 역시 비단 직조에 관한 기록이 기원전 2636년의 일로 전해진다고 하여[242] 중국의 상고사 기록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다.

[241] 17세기에 예수회 선교사가 작성한 중국 역사서로 가장 널리 활용되어 온 마티니(Martino Martini 衛匡國, 1614-1661)Sinicae historiae decas prima res a gentis origine ad Christum natum in extreme Asia (Munich, 1658)에는 伏羲氏의 치세를 기원전 2952년으로 하여 이로부터 중국 역사의 서술을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 성서학은 노아의 홍수를 보통 기원전 2349년으로 보았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노아의 자손이라고 보는 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양쪽 연대기 중 하나는 틀린 것일 수밖에 없는 문제가 된다. 중국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교황에게 청원하여 통용되던 불가타(Vulgate)대신 70人譯(Septuagint)성서를 1637년부터 사용하도록 허가를 받았는데, 70인역판을 표준으로 하면 노아 홍수의 연대를 기원전 3천년 이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D Mungello, Curious Land: Jesuit Accommodation and the Origins of Sinology (Honolulu, 1985): 124-128.

[242] <中國誌> 6.

리치는 중국 역사의 내용에 대해서 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Hia’, ‘Than’, ‘Yu’, ‘Sciam’, ‘Cheu’, ‘Han’ 등 고대의 왕조 이름을 나열한 것이 있어서 중국 正史, , (?), , , 등을 그대로 음역해 놓은 것으로 알아볼 수 있으며, 왕조가 바뀔 때마다 나라 이름을 임의로 정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의 왕조는 Ciu()씨가 세워서 Min()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한 정도의 기록밖에 없다.[243]

[243] <中國誌> 6-7.

 

중국 문명에 대한 리치의 인식에는 유럽의 기준에 얽매여 중국의 고유한 가치체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한계가 여러 곳에서 눈에 띈다.[244] 그러나 중국 인쇄술에 대해서는 깊이 탄복하는 마음을 보여주는데,[245] 그 문화적 의미에 대해서도 깊이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리치 등 선교사들이 출판활동을 위해 인쇄술을 깊이 연구한 때문인 것 같다.[246] 실제로 리치가 서적의 간행을 선교의 가장 중요한 매체로 발전시킨 것도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244] <中國誌> 22, “다른 면에서는 그렇게 독창적이고, 지구상 어느 민족에 뒤지지 않는 소질을 가진 중국인이 이런 (미술) 분야에서 형편없이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다른 나라와 긴밀한 접촉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중국 음악이라는 것은 단조로운 박자를 두드려내는 것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다른 음계를 결합시킴으로써 변조와 和聲을 얻는 기술을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같은 책 79: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은 찾는 사람이 많지만, 중국의 그림이라는 것은 윤곽만 그리는 것으로, 색채를 쓰지 않고 검은 색만을 사용한다.”

[245] <中國誌> 20-21.

[246] <中國誌> 158.

중국의 물화 가운데 리치가 가장 탄복한 것은 도자기였다: “재질 측면에 있어서나 그 얇고 섬세한 제작기술 측면에 있어서나 유럽 도자기는 이에 비길만한 것이 없다. 가장 훌륭한 도자기는 江西省[247] 흙으로 만드는데, 이런 도자기는 중국 각지에 반출될 뿐 아니라 머나먼 유럽의 구석구석까지 수출되어서 화려한 겉보기보다 우아한 아름다움을 아끼는 사람들에게 극진한 애호를 받는다. 이 도자기는 아무리 뜨거운 것을 담아도 깨어지지 않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한번 깨어진 것도 놋쇠 철사로 묶어 놓으면 물을 담아도 새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248]

[247] <中國誌> 영문판과 불문판에는 ‘Kiam'이라고만 되어 있으므로 <中國傳敎史>에 따른다.

[248] <中國誌> 14-15.

그 밖에 유럽인에게 신기하게 보이는 중국의 물산으로 대나무와 차, 그리고 옻칠을 소개했다:

 

이곳에 흔한 갈대의 한 종류로 포르투갈인이 ‘bamboo’라 부르는 것이 있는데, 원통 모양을 한 것으로 무쇠처럼 단단하다. 다 자란 것의 둘레는 어른의 양손으로도 감싸 쥐지 못할 정도가 된다. 속이 비어 있고, 토막들이 이어져 있는 모양이지만, 그 매듭이 몹시 튼튼해서 조그만 가옥의 기둥으로 널리 쓰일 정도다. 날씬한 줄기는 창을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재료가 되는 등, 그 용도는 백 가지가 넘는다. 남쪽 지방에서만 자라는 것이지만 워낙 많이 산출되기 때문에 전국의 수요에 응할 수 있으며, 가장 널리 쓰이는 목재라고 할 수 있다.”[249]

[249] <中國誌> 15.

 

어떤 종류의 덤불에서 딴 잎으로 마실 것을 만드는데, 중국과 일본, 그리고 인근지역에서 ‘Cia’라고 불린다. 사실 똑같은 덤불들이 우리 유럽의 들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들은 봄철에 잎사귀를 따서 그늘진 곳에서 말리고, 마른 잎사귀에서 우려낸 찻물을 식사 때도 마시고 친구가 찾아올 때 대접하기도 한다. 그런 때는 담소가 계속되는 동안 끊임없이 차를 권한다. 뜨거운 상태에서만 마시는데, 마신다기보다는 홀짝댄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씁쓸한 맛이 과히 나쁘지 않고, 자주 마시면 몸에 좋은 것으로 보통 생각한다. 찻잎에는 등급이 있는데, 한 근에 금 한 량 하는 것에서부터 두 량, 세 량 하는 것까지 있다.”[250]

[250] <中國誌> 17.

 

또 한 가지 세밀히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나무줄기에서 뽑아내는 특이한 성질의 수액이다. 눈으로 보아서는 우유처럼 보이지만, 그 성질이 아교처럼 끈끈하다. 중국인들은 이 수액을 원료로 해서 산다라크 수지처럼 목재 표면에 바르는 물질을 만드는데, 이것을 ‘Cie’라고 한다. 이 물질을 목재에 바르면 온갖 색깔을 다 띨 수 있고 거울처럼 빛나는 광택을 가지기 때문에 눈으로 보기에 질감이 현란하고 손으로 만지기에 기분 좋게 매끈하다. 이런 표면처리는 튼튼하기도 해서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 이 수액을 수출한다면 괜찮은 사업이 될 것 같은데, 아직까지는 시도한 사람이 없다.”[251]

[251] <中國誌> 17-18.

 

제조기술에 대해 언급한 곳도 여러 군데 있지만, 양조, 건축, 제지 등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문화상의 차이 정도밖에 느껴지지 않는다.[252] 중국 공예기술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나름대로 논한 것이 눈길을 끈다: “중요한 사실은 이 나라 사람들이 검소한 생활에 길들여져 있어서 장인들이 더 좋은 가격을 얻기 위해 제작하는 물건에 최선,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인들의 정성은 보통 웬만한 수준의 물건으로 만족하고 마는 고객의 요구에 의해 제약을 받는 것이다. 그 결과 장인들은 제품의 품질을 끌어올리려 하지 않고 고객의 천박한 안목을 현혹시키는 얄팍한 재주만으로 넘어가려 든다. 이런 현상은 관리들이 물건을 주문하면서 물건의 진짜 가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멋대로 값을 치르는 경우에 더 심한 것 같다.”[253]

[252] <中國誌> 12, 16, 19-20.

[253] <中國誌> 19.

 

리치가 전한 중국의 사회상에는 어두운 면이 많다. 이것은 당시의 중국이 왕조 말기의 부패상태에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복음을 전하려는 선교사 입장에서 대상 사회의 문제점을 두드러지게 관찰하고 표현한 까닭 또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혀 다른 사회에서 온 사람의 눈에 비친, 이해하지 못할 여러 가지 현상들이 지나치게 어두운 색조로 비쳐진 것도 있을 것이다.

리치가 가장 애달픈 감정을 담아 적은 것은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여러 현상들, 매음, 축첩, 노예, 유아살해, 거세(환관을 만들기 위한), 형벌 등이다. 리치는 무엇보다 중국사회의 淫佚한 풍조를 개탄했는데, 더러는 성직자의 엄격한 관점이나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해도 드러나 보인다. 早婚의 풍속까지도 리치는 음일한 풍조의 한 모습으로 보았다:

 

한 가지 문제는 음일한 풍조다. 여러 가지 물질을 풍부하게 가지고 누리는 이 여성화된 민족에게 이것이 가장 두드러진 문제의 하나다. 이 방면에 대해서 중국인들은 너무나 절제가 없어서 성년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기다리지를 못한다. 심지어는 12(‘20로 되어 있는 것은 착오인 듯), 흔히 14, 5세가 되면 결혼해 버린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때문에 일찍 시들어버려서 평생토록 생식을 못하게 되는 수도 있다. 이 정도로도 부족해서인지, 그들은 첫째 아내를 버리고 재취를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아내를 둔 채 첩을 두기도 한다. 몇을 두는지는 부양능력에 달린 일이지, 아무런 제한이 없다. 따라서 열 명, 스무 명, 서른 명까지 처첩을 두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황제와 황족들은 몇 백, 몇 천의 첩을 두기도 한다.”[254]

[254] <中國傳敎史> 71, 불문판과 영문판에는 빠져 있는 부분임. 트리고의 번역에서 뺐던 것 아닐까 추측된다.

 

음일한 풍조에서 빚어진 또 하나의 현상은 아내를 취할 능력이 없는 남자가 여자를 얻기 위해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말하자면 비부쟁이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부모에게 팔려 노예가 되는 아이들이 많은 것도 개탄했지만, 유럽의 노예처럼 절대적 구속을 받는 신분이 아님은 리치도 인정하였다. 리치의 말이 기묘하게 들리는 것은 이들 중 상당수는 포르투갈인과 스페인인의 노예로서 중국 밖으로 끌려간다. 그래도 적은 숫자의 이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됨으로써 사탄의 노예질에서는 벗어날 기회나마 가지게 된다며 중국인 노예의 약취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255]

[255] <中國誌> 86.

기독교 개종 여부를 노예 신분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인식한 것을 보면 리치는 중국인의 육신보다 중국인의 영혼을 더 아꼈던 모양이다. [“육신보다 영혼을 더 아꼈다는 표현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의 토론 중 배운 것이다. 뮈텔 주교의 친일 행적을 놓고 토론자들의 이견이 첨예하게 맞설 때 사회를 보던 최석우 신부가 아마 주교님은 조선인의 육신보다 조선인의 영혼을 더 아끼셨던 모양이라는 멘트로 분위기를 누그러트렸다.] 肇慶에서 선교사들은 마카오의 노예 탈출 방지에 한 몫 단단히 했다:

 

선교소 위치는 또한 마카오에서 도망하는 노예들에게 도움을 주기에 적당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해마다 몇몇 노예들이 굴레를 벗어던지고 중국인들 틈에서 자유로운 삶을 찾고자 했지만, 그렇게 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탈주자들은 보통 민병들에게 검거되었는데, 민병이 정규군보다 더 용감하고 전투력도 우수한 까닭은 포르투갈인과 왕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중국인이 두려워해 마지않는 일본인이나 카피르라고 불리는 에티오피아인, 또는 자바 쪽 섬 출신으로, 중국인보다 훨씬 호전적인, 사납고 야만스러운 성질을 가진 자들이 많았다. 민병들이 잡아 총독에게 데려간 탈주자 중 기독교인에 대해서는 기독교인답게 처신하라는 훈계와 함께 방면해서 원 주인에게 돌려보낸다. 보통은 돌려보내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데, 그 까닭은 중국의 죄수 노릇이 포르투갈인의 노예 노릇보다 훨씬 더 끔직스런 것임을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로 쌍방이 모두 이득을 본다: 노예는 종교생활을 실천할 수 있는 곳으로 돌아오고, 노예주는 값비싼 노동력을 되찾는 것이다.”[256]

[256] <中國誌> 204.

 

가난에서 파생되는 또 하나 문제는 유아살해였다. 특히 계집아이들이 이런 수난을 많이 당했다고 하는데, 리치는 이런 행위가 남의 눈도 가리지 않고 버젓이 행해지는 것을 개탄했다. 불교의 윤회설로 인하여 인명을 가볍게 여기고 환생을 통해 더 좋은 길로 갈 수 있다고 믿는 까닭에 사람들이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이라고 리치는 분석했다.[257] 중국인이 자살을 많이 하는 까닭도 같은 데 있다고 리치는 보았다:

[257] <中國誌> 86-87.

 

앞의 것들과 비슷한 성격이면서도 더욱더 야만적인 풍습은 자살을 하는 것인데,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거나 큰 불행을 이겨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것보다도 더욱 어리석고 더욱 비겁한 동기는 미워하는 사람을 골려주기 위해 제 목숨을 끊는 일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해마다 몇 천 명의 사람들,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까지, 자기 손으로 자기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공적인 장소나 증오하는 상대의 집 문 앞에서 목을 매다는 것이 가장 흔한 방법이다. 그 밖에는 강물에 뛰어들거나 독약을 먹는 것이 많이 쓰이는 방법이며, 이유는 별별 사소한 것들이 다 있다. 자살자를 절망에 몰아넣은 죄로 자살자의 부모에게 고발당한 사람이 관에서 중형을 선고받으면 자기 자신 자살을 저지르는 길 밖에는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많은 관리들이 자살이 개입된 사건을 맡지 않으려 드는 것은 현명한 처사이며, 이로써 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이 건져지는 것이다.”[258]

[258] <中國誌> 87.

 

유럽인의 눈에 또 하나 충격적으로 비쳐진 것은 환관을 만들 생각으로 사내아이를 거세시키는 일이 북중국에 많았던 사실이다.[259] 환관에 대한 리치의 태도를 앞 장 4절에서 살펴본 바 있지만, 불교 승려 다음으로 리치가 증오한 부류였다. 이보다도 더 충격적이었으리라고 보이는 것은 男娼의 존재인데, 트리고 판에는 옮겨져 있지 않다: “(妓女의 존재보다) 더 불쌍한 일이면서 이 민족의 타락 정도를 뚜렷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정욕을 발산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人性에 역행하는 길까지 취하는 것이다. 이것은 법률로도 금지되지 않으며, 모두들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지도 않아,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모두들 공공연히 이야기를 하고 도처에서 행해지는 데도 아무런 제지가 없다. 이러한 敗俗이 성행하는 北京과 같은 도시에는 몇 줄의 큰 거리에 妓女처럼 화장한 이 人妖들이 가득하다.”[260]

[259] <中國誌> 87.

[260] <中國傳敎史> 71-72.

중국 형벌은 원칙에 있어서는 온건하지만 실제 운용에서 가혹한 것으로 리치는 파악했다. 韶州에서 주민들과 분쟁이 일어났을 때 선교소에 침입한 주동자들이 처음에 知府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일 년 이상 시간을 끌며 여러 차례 覆審을 거친 뒤 결국 가벼운 처벌로 끝나는 것을 보며(23) 중국의 刑事제도가 상당히 신중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실감했으리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관리가 자의적으로 笞刑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의 운용이 가혹하게 될 수 있다고 고찰했다.[261]

[261] <中國誌> 87-88. 리치 가까이에서 笞刑을 맞은 끝에 죽음에 이른 경우가 적어도 세 차례 있었다. 같은 책 158-159: 마르틴이라는 이름의 한 패덕한 개종자가 사기행각 끝에 루지에리를 간통혐의로 誣告했다가 들통나서 태형을 당한 끝에 죽은 일. 같은 책 403: 북경의 고승 達觀이 황제에 대한 不敬 혐의로 태형을 받다가 죽은 일. 같은 책 489: 修士 黃明沙廣州에서 간첩 혐의로 심문받다가 죽은 일.

리치가 중국사회의 가장 큰 폐단으로 지적한 것은 중국인들이 진리를 존중하는 마음이 극히 옅고, 모든 행동에 눈치를 몹시 살피며, 다른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문제였다.[262] 관리들이 언제 어떤 누명을 씌워서 재산을 빼앗을지 모르기 때문에 아무도 자기 재산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 없고,[263] 심지어 황제조차 백성들 사이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황족들을 마치 무서운 적처럼 경계했다고 적었다.

[262] <中國誌> 88.

[263] <中國誌> 206: 총독이 선교사들을 肇慶으로부터부터 쫓아낸 것도 선교소 건물을 빼앗으려는 욕심 때문인 것으로 기록했다.

 

리치의 중국 문물에 관한 서술이 비단과 도자기 등에 치중된 것을 보면 무역의 관점을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로 그 선교사업의 근거가 마카오로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카오 포르투갈인 사회의 이해관계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지휘한 발리냐노의 黑船무역에 대한 관심이 중국 선교사업에도 연장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264] 그리고 유럽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도 필요한 서술 방향이었다.

[264] 발리냐노가 선교사업의 재정적 근거로 마카오와 나가사키 사이의 黑船무역에 깊이 관여한 것은 그 정당성을 놓고 교회 안에 논란을 일으켰던 일이다: C Boxer, Fidalgos in the Far East (The Hague, 1948): 91-136, G Elison, Deus Destroyed (Cambridge-MA, 1973): 102-106.

중국의 사회현상에 관한 리치의 기록을 보면, 선교사 입장에서 이교도의 사회를 더럽고 위험한 것으로 그리려는 의도가 드러나 보이기도 하지만, 인간사회의 여러 현상들을 세밀히 그린 필치를 보면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과 이해력이 뛰어난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당시 중국인들의 퇴폐풍조와 앞 절 끝에 그린 치안의 불안 같은 것은 탁월한 관찰력을 보여준다. Spence가 리치를 종교인으로보다 “Renaissance Man”으로 부각시키는 관점에 이런 면에서는 상당한 공감을 느낄 수 있다.[265]

[265] J Spence, The Memory Palace of Matteo Ricci (New York, 1983)에 수시로 제기되는 관점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