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마테오 리치의 中國觀

 

 

1절 중국 語文熟練度

 

한 나라의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어와 문자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뿐 아니라, 오랫동안 고정된 문자형태가 사용되어 온 때문에 문화의 열쇠로서 문자의 중요성은 특별히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리치는 발리냐노의 부름을 받아 15828월 마카오에 도착한 이래 중국의 언어와 문자를 꾸준히 공부했다. 그 성과에 대해 말년의 리치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인이 배우기에 중국어처럼 어려운 언어가 또 없으리라고 나는 말하겠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에 의해, 그리고 불굴의 노력에 의해, 이 사람들 속에서 선교사업에 몸 바쳐 온 우리 회 선교사들은 그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선교 초창기부터 있었던 사람들은 유창하게 말할 뿐 아니라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능력까지 가지게 되었다.”[191]

[191] <中國誌> 28.

그 성취를 객관적으로 판단할만한 근거는 쉽게 찾아볼 수 없지만,[192] 중국 입국 6년 후인 1589肇慶을 떠날 무렵 관부를 찾아갈 때 통역을 대동하기는 하면서도 필요한 경우 직접 대화를 하기도 하는 형편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192] 16052월에 리치가 쓴 편지에는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책을 쓰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고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이 보인다: <書信集> 269.

 

리치 신부가 入廷할 때 총독은 정좌에 앉아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할 만한 엄숙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신부는 중국인 통역을 데려갔지만, 그는 포르투갈어를 거의 모르는 사람이었다. 신부가 통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도 그를 데려간 것은 벗 삼아, 그리고 체면치레로 데려간 것이었다.

이에 총독이 대답하기를 그렇다 하더라도 총독인 내가 주는 선물을 거절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요?’ 했다. 이에 리치가 다시 대답하기를 당신이 나를 내가 여러 해 동안 남에게 나쁜 짓 하는 일 없이 살아 온 집에서 쫓아내 범죄자처럼 몰아냈으니 당신이 보낸 선물을 거절하는 것이 불합리한 일도 아니요, 무례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했다. 그러자 총독은 진짜로 화가 나 벌떡 일어나면서 마구 소리 질렀다. ‘아니, 이럴 수가! 총독이 내린 명령을 따르지 않다니!’ 그리고는 통역을 돌아보며 계속하기를 이 모든 잘못은 여기 있는 이 악당 놈이 저 사람에게 훈수를 잘못해 준 때문에 생긴 것이렷다.’ 하고 廷吏들에게 쇠사슬을 갖고 와 통역의 목에 감도록 흥분한 채로 호통했다.

(리치의 말) ‘만일 총독이 거주하는 도시에 끝끝내 남겨두고 싶지 않다면 다른 곳으로 보내주면 되지 않는가? 어느 곳이라도 갈 용의가 있다.’ 처음에 총독은 리치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시립한 군관 하나가 무릎을 굽혀서 신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설명해 주었다. 마침내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동정심을 띤 어조로 대답하기를 그가 처음부터 신부들을 이 나라에서 쫓아내려 한 것이 아니라 어떤 다른 도시로 보내려 한 것이라고 했다.”[193]

[193] <中國誌> 219-220.

 

리치는 통역의 도움을 받은 일을 드러내 표시한 곳이 거의 없는데, 이 경우는 총독과의 갈등이 떠넘겨진 대상으로 통역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원래 이 문제가 이토록 꼬이게 된 것은 총독이 처음 선교사들을 南華寺로 이주시키려 할 때 발리냐노의 강경한 지침에 따라 이주를 거부한 때문임을 리치 자신이 기록해 놓았다.[194] 통역이 제외된 상태에서 리치가 직접 진술한 것을 총독이 알아듣지 못한 것은 총독이 흥분해 있었던 탓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리치의 화술이 썩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194] <中國誌> 206-207.

肇慶을 떠나 韶州에 정착한 뒤까지도 통역들을 데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통역을 제멋대로 하는 것을 불평하는 것으로 보아 그 때 쯤 되어서는 통역을 제대로 하는지 어떤지 알아듣게 된 것 같다: “또 통역들을 집 안에 살게 하지 않도록 결정했는데, 믿음성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엉터리 번역을 해 대는 버릇이 있는데다가 집안일을 온 세상에 대고 빠짐없이 소문내고 다녔다. 그들이 대부분 말썽꾸러기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195]

[195] <中國誌> 229.

리치는 1591년 말부터 <四書>의 라틴어 번역을 시작했다고 하는데,[196] 아마 韶州 있는 동안 중국 고전 학습에 몰두했던 모양이다. 1595南昌으로 옮긴 뒤 <交友論><西國記法>을 짓고 <天主實義> 초고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몇 년간의 집중적인 학습 덕분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을 짓는 데 중국인들이 글을 만들어 주기는 했겠지만, 그만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口述해 주기 위해서라도 한문의 구조와 성격에 대한 상당한 이해가 필요했을 것이다.

[196] 번역을 시작한 사실은 159312월 아콰비바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 나와 있다: <書信集> 134-135. 만들어진 번역본에 대해서는 15998월 코스타 신부에게 쓴 편지(<書信集> 258-259)<中國誌> 315에 언급.

北京에 정착한 뒤까지도 <幾何原本>을 번역해 내는 데 리치의 口述徐光啓가 받아 적는 작업방식을 취했다. 추측컨대 <二十五言>(1604)이나 <畸人十篇>(1608) 같은 책들도 계속 중국인들이 글을 다듬어 주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일반적 주제를 다룬 책의 경우 이름 없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충분했던 데 반해 徐光啓 같은 名士의 도움이 필요했던 <幾何原本>(1607) 경우는 협조자를 명시하게 되었던 모양이다.

이처럼 리치가 한문으로 남긴 서적들은 중국인의 도움으로 글이 다듬어졌기 때문에 그 문면을 보고 리치의 한문 이해수준을 가늠할 수 없다. 한편 <中國誌>나 편지처럼 리치가 歐文으로 남긴 자료에 중국의 人名地名, 그리고 몇 가지 한자어들이 로마로 표기된 것들이 있는데, 이를 통해 리치의 한자 이해에 상당한 결함이 있었던 것을 알아볼 수 있다.

人名의 경우 거의 모두가 성과 이름의 구별 없이 하나의 단어처럼 되어 있다.[197] 王泮(Guam-puon)과 같이 성과 이름을 떼어 놓은 것도 없지는 않지만, 馮應京(慕岡)‘Fumo-Can’[198]이라 한 것은 어디까지가 성이고 어디부터가 이름인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대부분 인명은 본명보다 字號를 썼는데, 예외적으로 본명을 쓴 王泮, 徐大任(Sciutagim), 李贄(Liciu) 등의 경우는 리치가 싫어하거나 멀리하고 싶어 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인지 알 수 없다.

[197] : 瞿太素 Sciutaiso, 祝石林(世祿) Cioselinus, 葛盛華 Cosunhua, 李我存(之藻) Lingotsum .

[198] <中國誌> 447.

아마 처음 肇慶에 도착해서 한자 지식이 아주 얕을 때부터 귀에 들리는 인명을 글자에 구애됨 없이 받아 적던 습관이 굳어져 인명을 덩어리로 붙여 쓰게 된 것 같다. 지명의 경우 뒤에 가 붙을 경우 ‘-ceu’‘-fu’로 통일시켜 놓았는데, 韶州 경우는 ‘Xaucea’로 되어 있다. 1589韶州 이주 무렵까지도 로 끝나는 지명이 많은 것을 아직 인식하지 못하고 역시 귀에 들리는 대로 받아 적었는데, 이 지명이 보고서에 너무 많이 쓰였기 때문에 나중에 고치지 못하고 그대로 둔 것 같다.

1595년 병부시랑 石星의 일행에 끼어 南京으로 여행할 때 처음 揚子江을 구경하면서 리치는 찬탄을 금치 못했다: “그 엄청난 넓이 때문에 이 강은 ‘Yamsu’라고 불리우니, ‘바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洋子로 오해한 것인지?) 어떤 곳에서는 강폭이 2, 3마일씩 되기도 한다. 그런 곳에서 항행은 위험하다. ‘바다의 아들은 때때로 그 어머니 못지않게 사나운 힘을 휘두르기 때문이다.”[199] 1598南昌을 떠나 王弘誨의 일행으로 北京에 가는 길에 子江을 거쳐 가면서도 이 바다의 아들에 대한 찬탄은 거듭된다.[200] 단 이때의 로마표기는 ‘Hiansu’로 바뀌어 있다.

[199] <中國誌> 268.

[200] <中國誌> 305.

같은 이름을 때에 따라 다르게 적은 것도 있다. 리치 일행이 肇慶에서 韶州로 옮기는 길에 南華寺에 들렀을 때 六祖(Lusu)의 설화를 듣고 유적을 구경한다.[201] 후에 韶州 선교소의 보고를 받아 정리한 것으로 보이는 주민들과의 분쟁 경위 가운데 주민들이 받드는 우상 이름으로 ‘Locu’라 한 것이 있는데,[202] 이것도 六祖의 표기였다. 그밖에도 불교와 도교 관계 이름이나 용어 중에 실제 발음과 아주 동떨어진 표기가 특히 많이 보인다: 地藏 Ti-cam, 阿羅漢 Holochan, 許眞君 Huiunsin, 眼光 Hoa-quan, 達磨 Tolome. 이들을 우상숭배로 경멸했기 때문에 표기도 무성의하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201] <中國誌> 222.

[202] <中國誌> 425.

중국인의 인사 예절을 이렇게 그려놓은 곳이 있다: “그들 사이에 가장 흔한 인사 방법은 다음과 같다: 보통 입고 있는 장삼의 헐렁한 소매 안으로 손을 감춘 채 맞잡고는 (그들의 손은 부채를 부치거나 무슨 일을 할 때가 아니면 소매 속에 그대로 감춰져 있다) 상대방을 마주보며 소매 속에 감추어진 채로 두 손을 겸손하게 들어 올린다. 그리고는 손을 천천히 내리며 나지막하게 가다듬은 어조로 ‘zin, zin’을 되풀이한다. ‘zin'이라는 말은 경의를 나타내는 외에 다른 특별한 뜻이 없다. 경의를 나타내는 감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203] 여기서는 이라는 상용어의 문자 근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204]

[203] <中國誌> 60.

[204] 인지도 알 수 없으나 <中國傳敎史>에 따름.

리치가 한문으로 남긴 많은 책의 글 수준이 높기 때문에 리치의 한문 연마수준이 매우 높았으리라고 보는 일반적인 선입견을 제쳐놓고 그가 실제로 겪었을 고충에 접근하기 위해 그 한문수준의 한계를 엿볼만한 틈새를 찾아보았다. 리치가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지 반년 쯤 되던 15832월에 수사학을 가르쳐 준 옛 스승 포르나리에게 쓴 편지에서 중국어의 특징을 설명하는 가운데 중국어 공부에 열중한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저는 근래 중국어 공부에 몰두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이 그리스어나 독일어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회화에 있어서는 발음이 같은 말이 워낙 많아서, 천 가지 넘는 뜻을 가진 단어들이 수두룩한데, 서로 다른 말이 네 가지 聲調 가운데 어떤 것을 가지느냐에 따라 구별되는 것도 있습니다. 문자에 대해 말씀드린다면, 저처럼 쓰고 읽고 해 보지 않으신 선생님으로서는 믿으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事物의 수, 單語의 수와 같은 수의 문자를 가지고 있으니, 7만 개가 넘는 서로 다르고 복잡하게 생긴 문자가 있는 것입니다.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중국 책 하나에 설명을 붙여서 보내드리겠습니다. 하나하나의 단어는 하나의 음절로 되어 있으며, 가장 쉽게 쓰는 방법은 우리 화가들이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붓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언어의 가장 큰 장점은 이 문자를 쓰는 모든 나라에서는 비록 말이 서로 다르더라도 책과 편지를 함께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이 단어들에 冠詞도 없고, 도 없고, 單數, 複數도 없고, 도 없고, 時制도 없고, 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기능은 아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副詞형태(어조사를 말하는 듯) 몇 가지로 해결됩니다.”[205]

[205] <書信集> 31-32.

 

인도에서 침체에 빠져 있던 리치가 발리냐노의 부름을 받아 마카오에 오자 딴 사람이 된 것처럼 활기에 차서 새로운 사명에 몰두하게 된 한 중요한 요인이 리치가 중국어를 몹시 좋아하게 된 데 있지 않았나 스펜스는 추측하기도 한다.[206] 이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스펜스는 158011월 리치가 친구인 사학자 마페이에게 쓴 편지에서 그리스어 공부의 지겨움을 말한 끝에 과연 이 문법의 공부가 끝장날지, 내 목숨이 끝장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지역은 워낙 병이 많은 곳이니, 모든 일은 주님의 뜻에 따를 뿐!”[207]이라 한 것까지 인용했다. 이제 그가 중국의 언어와 문자에 대해 전반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더듬어 보겠다.

[206] J Spence, "Matteo Ricci and the Ascent to Peking" 10-11.

[207] <書信集> 19.

 

그들이 글로 쓰는 언어는 그 양식과 문법에 있어서 일상회화에 쓰이는 언어와 크게 다르며, 어떤 책도 일상의 口語體로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저술에 쓰이는 우아한 문체와 일상에 쓰이는 평범한 말투가 생판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양쪽에 쓰이는 어휘는 서로 똑같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자 사이의 차이는 전적으로 文法樣式의 문제인 것이다. …… 비록 모든 대상을 나타내는 글자가 다 따로 있다고는 하지만, 글자의 총수는 7, 8만 자를 넘지 않으니, 많은 글자들이 서로 합쳐져서 쓰이기 때문이다. 글을 배우는 사람이 1만 자 정도를 익히면 글을 쓸 수 있는 단계까지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知的인 저술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글자 수가 이 정도인 셈이다.”[208]

[208] <中國誌> 26-27.

 

이처럼 문어와 구어의 차이를 그린 다음, 중국인들이 문어 쪽에 절대적인 가치를 두어 왔음을 설명했다: “중국의 언어가 이렇게 (同音異意의 글자가 많아서) 애매하게 된 이유는 아득한 옛날부터 文語만에 관심을 기울이고 口語를 소홀히 한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은 언어의 아름다움을 文語에서 추구하지, 口語에서 찾지 않으니, 이런 점에서 그리스 사람들 가운데 문체의 아름다움으로 명성을 떨친 이소크라테스[209]를 닮았다고 하겠다. 그런 때문에 같은 도시에 가까이 사는 친구 사이에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글을 써서 주고받으려 한다.”[210]

[209] 436-338 BC, 아테네의 연설가, 수사가, 교육자로 이름을 떨쳤다.

[210] <中國誌> 28.

그리고 이어서 文語를 중시하는 이런 언어가 가진 장점을 제시하였는데, 이 장점이 무엇보다 자신들의 선교사업에 큰 의미가 있을 것을 통찰한 것이 흥미롭다: “하나하나의 대상을 나타내는 글자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이런 기록방법이 기억력에 많은 부담을 주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서 나타낸 바 없는 특이한 장점도 가지고 있다. 서로 전혀 다른 口語를 가진 나라들이라도 같은 文語를 공유하기만 한다면 결국 서적과 편지의 교환을 통해 접촉을 가지게 되는데, 口語를 통해서는 이런 접촉이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예컨대 日本朝鮮, 安南, 琉球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서적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말은 서로 너무나 틀려서 피차간에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들은 하나의 글자를 같은 뜻으로 이해하면서도 발음은 제각각이다.”[211]

[211] <中國誌> 28.

이처럼 강한 전파력을 가진 문자가 일단 책자로 인쇄되기만 하면 인쇄되었다는 사실 자체로 얼마나 강한 설득력을 가지는지 기록한 대목이 있다. 肇慶에서 쫓겨나 韶州로 가 있을 때, 그들이 肇慶에서 쫓겨난 경위가 선교사 측에 유리한 쪽으로 윤색되어 소문이 퍼져 있음을 기뻐하는 장면이다: “이것은(총독의 조치는) 일반적으로 하나의 부당한 행위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신부들이 아무런 범죄에 대해서도 고발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와 유럽인 승려들에 관한 비슷한 거짓 이야기들, 근거 없는 소문들이 온 나라에 불확실한 이야기로만 퍼진 것이 아니라 후세 독자들을 위해 책으로 인쇄되어 보존되기까지 했다. 인쇄된 책은 진실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람들 사이에 통상 인식되기 때문에 그 내용에 거짓된 것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 거짓을 지적하는 것은 몹시 힘든 일이다.”[212]

[212] <中國誌> 244.

肇慶에서 쫓겨난 이유를 리치는 총독이 선교소의 건물을 빼앗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지만,[213] 사실은 주민들과 분쟁을 일으키는 등 물의를 일으킨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경위에 대해 총독을 비난하고 선교사들을 두둔하는 소문이 떠돌고 책자로까지 인쇄되어 나왔다고 하니, 이 책자를 인쇄한 것이 혹시 선교사들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리치가 정직성에 대해 논술한 대목을 한 번 보자.

[213] <中國誌> 205-207.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찾아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방문 때문에 생기는 일거리들 때문에 리치 신부는 너무나 피곤하게 되어 건강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이 문제를 지도적인 학자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자 그 학자는 리치에게 심부름꾼으로 하여금 방문객들에게 주인이 부재중이라고 말하도록 시키면 된다고 가르쳐 주었다. 이에 대해 리치는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절대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외교인 철학자는 웃기만 했다. 이에 리치 신부는 기독교의 교리에서 남에게 해를 끼치는 거짓말뿐 아니라 방편이나 장난으로 하는 거짓말도 일절 금한다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이 법칙이 유럽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만, 특히 종교인과 교육자에게 특히 엄중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거짓말을 각별히 삼가야 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듣던 사람은 그 법칙의 너무나 고결함에 처음에는 놀랐다가, 뒤이어 걷잡을 수 없는 찬사를 떠뜨렸다. 이 이야기가 어느 모임에서 화제가 되었을 때, 좌장을 맡고 있던 학자는 거짓말을 한 것에 대해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자기 의견을 밝혔다.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理想이라고 믿는다는 결론이었다.”[214]

[214] <中國誌> 283.

 

이처럼 거짓말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표방한 리치도 肇慶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새로운 종교의 출현이 중국인들 사이에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공적인 장소에서는 종교문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고 하였고, 南昌에 자리 잡을 때는 자신들을 잘 돌봐달라는 부탁을 병부상서 石星에게 받았다고 하는 醫員 王繼樓의 거짓말을 묵인했다. 肇慶 知府 王泮에게 처음 출두했을 때는 자신들이 중국의 명성을 흠모해서 찾아왔으며, 조용히 종교생활을 영위할 허락만을 바란다고 했고, 이것은 리치가 죽은 후 그 葬地下賜를 청원한 문서에까지 계속해서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거주 이유가 되었다.[215]

[215] 王泮과의 대화는 <中國誌> 147, 葬地 下賜를 위한 청원은 같은 책 567-569.

이와 비슷한 예는 앞 장에서 설명한 고비들 가운데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복음 전파라는 절대적 목적이 얼마간의 不正直이나 다른 不德도 정당화시켜 주었을 것이다. 이에 비하면 앞에 인용된 중국 학자의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편이 더 신뢰감을 주는 면도 있다고 하겠다. 아무튼 거짓말의 한 부분임을 생각하면 거짓말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리치를 위시한 선교사들의 의사소통에 얼마간의 문제를 일으킬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