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뉴라이트 역사관 따져보기 ⑨
기사입력 2008-09-05 오전 8:28:30
두 달쯤 전인가? 한승수 총리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만나러 조계사를 방문하려다가 무산된 일이 있다. 조계종 측 연기 요청으로 방문을 취소했다는 보도를 처음엔 무심히 보아 넘겼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총리가 출발 전에 연락을 받고 취소했다는 총리실 발표와 달리, 총리가 조계사 부근까지 갔다가 분위기가 여의치 않음을 알고 차를 돌렸다는 보도가 또한 있었다고 한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보도 중 어느 쪽이 옳은지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총리실 발표가 사실과 다르다는 느낌이 든다. 총리실에서는 총리의 체면이 많이 깎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싶은 동기가 있는 반면, 다른 쪽 보도에는 뻔히 드러날 사실을 굳이 왜곡할 동기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총리실 발표가 옳은 것이었다면 악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오보를 낸 신문사를 어찌 검찰이 그냥 두었겠는가.
총리실의 발표에 사실 왜곡이 있었다면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크나큰 이해관계가 걸린 일에는 누구든 거짓말을 하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체면 정도 문제를 가지고 사실을 꾸밀 정도라면 거짓말이 너무나 습관화된 분위기 아니겠는가. 큰 거짓말보다 작은 거짓말이 더 무섭다.
청와대 이동관 대변인은 이제 얼굴만 봐도 거짓말을 기대하게 됐다. 무슨 일이든 불리한 얘기가 있으면 천편일률로 "전혀 사실무근" 노래를 부른다. 떠도는 얘기가 사실과 다른 것이라 하더라도, 왜 그런 얘기가 그럴싸하게 떠도는 것인지 고민을 조금이라도 해본 흔적이 보이면 좋겠다. 그런데 그가 표정 하나 안 바꾸며 "전혀 사실무근"을 읊은 사안 중에 그런 극단적 표현이 적합했던 경우는 내가 아는 한 하나도 없었다.
이번 연재를 구상하면서 한 가지 마음먹은 일이 있다. 현실적 비판을 하되 도덕적 비난은 최대한 자제하겠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민족 정서를 가지지 않았다고, 나와 같은 도덕 감각을 보이지 않는다고 욕하고 비난한다면 나 자신과 일부 독자들의 카타르시스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당면한 문제에 대한 이해를 키우는 길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아니, 그에 앞선 BBK '진실 게임' 때부터 국민들이 익숙해져 오고 있는 '거짓말 문화'의 현실적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신뢰'를 비롯한 사회적 가치들이 지금 정권에서는 너무나 무시되고 있고, 뉴라이트 역사관에 그런 풍조를 부채질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자체마저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뉴라이트"
뉴라이트가 보는 한국 근현대사는 한 마디로 자본주의화의 역사다. 단 하나의 기준으로 역사를 재단하니 일제 통치도 고마운 일이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도 자랑스러운 것이다.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은 자본주의 발전을 방해한 테러리즘으로 보일 것이고, 독재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은 좌파 책동에 놀아난 무책임한 사보타지로 보일 것이다.
자본주의 발달은 한국이 근현대를 통해 겪어 온 변화의 한 갈래다. 그밖에도 민주주의 발달과 민족주의 성장 등 여러 갈래 흐름이 서로 얽혀 한국 근현대사를 빚어 온 것이다. 다른 모든 측면을 무시하거나 자본주의화에 종속시키는 뉴라이트 역사관은 사실 학문적 의미를 가진 하나의 역사관으로 볼 만한 것이 아니다. 이런 일방적인 시각으로는 자본주의 자체마저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자본주의의 간판인 '자본'이란 무엇인가? "더 많은 재부(wealth)를 생산하는 데 사용되고 있거나 사용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재부"라는 것이 표준적 해석이다. 그런데 뉴라이트가 보는 한국 자본주의화 역사는 자본의 여러 형태 중 물질적 재부만을 보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자본의 네 가지 형태 가운데 기계, 건물, 토지와 함께 '인간 자본'을 꼽았다. 훈련과 교육을 통해 획득한 기술과 능력은 값비싼 기계나 마찬가지로 생산 활동을 통해 원래 획득에 든 비용을 회수하고 이윤까지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부론>의 '인간 자본'은 인간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생산에 공헌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만을 추상화하여 물질 자본의 속성에 유추한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도 급여를 인간 자본의 '이자'로 보는 이론을 비판한 대목이 있다. 인간을 물질에 유추해 이해하려 했다는 점에서 물질 중심 관념이지만, 비물질 자본의 영역을 탐구하는 출발점으로서도 의미를 가진 것이 스미스의 '인간 자본' 개념이다.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론이 부각되면서 비물질 자본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브라모비츠의 캐치-업(catch-up) 이론 중 '사회 역량(social capabilities)'도 일종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으로 이해된다. 비물질 자본의 개념은 아직도 명확하게 규정되지 못하고 있지만, '사회적 자본'이 논의의 중심이 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비물질 자본 전체를 넓은 의미의 사회적 자본에 넣어서 생각하겠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사회를 패망으로 이끄는 상황"
앞의 글(☞관련 기사 :"뉴라이트는 왜 미국에게 목을 매는가?")에서 '죄수의 딜레마'를 간단히 언급했다. 사회적 자본의 의미를 파악하는 실마리로 삼기 위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검사가 두 명의 강도 용의자를 심문하고 있다. 혐의가 입증되면 각각 10년형을 구형할 수 있는 범죄다. 그러나 확보된 증거는 주거 침입죄 뿐이다. 그것으로는 6개월형밖에 구형할 수 없다. 강도죄를 입증할 길은 자백뿐이다.
그래서 죄수 둘을 따로 불러 똑같은 제안을 한다. "네가 강도죄를 자백하고 저 놈이 자백을 거부하면 너는 방면이고 저 놈은 10년이다. 저 놈이 자백하고 네가 거부하면 거꾸로다. 둘 다 자백하면 5년으로 깎아준다." 둘 다 거부하면 물론 6개월씩이 된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결정을 서로 모르는 상태에서 자기 결정을 내려야 한다.
두 죄수를 갑과 을이라 하자. 갑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을의 결정은 자기가 어찌할 수 없는 하나의 외적 조건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을이 자백할 경우를 먼저 생각해 보자. 자기도 자백하면 5년이고, 자기만 거부하면 10년이다. 이번에는 을이 거부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자기만 자백하면 방면이고, 자기도 거부하면 6개월이다. 어느 조건 아래서도 자백하는 쪽이 이익이다. 을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두 죄수가 자기 형량을 줄이는 데만 욕심이 있고 상대방 형량에 아무 신경도 쓰지 않을 경우, 합리적 선택은 자백이다.
그런데 두 사람을 하나의 집단으로 보고 각자의 선택이 집단의 득실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생각해 보자. 갑과 을이 모두 자백하면 두 사람의 형량 합계는 10년이다. 한 쪽만 자백해도 합계는 같은 10년이다. 한편 둘 다 거부하면 합계가 1년이 된다. 갑의 입장에서 볼 때, 자기가 자백하면 합계는 어차피 10년인 반면 자기가 거부하면 을의 결정에 따라 10년이 될 수도 있고 1년이 될 수도 있다. 거부하는 길이 집단에게는 훨씬 유리한 것이다.
조직폭력단의 결속력에는 이런 경제적 효과가 있다. 동료를 배신한 후과가 자기 형량을 줄이는 이익보다 훨씬 클 수 있고, 동료를 옹호한 보상이 자기 형량을 늘리는 손해보다 훨씬 클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진 집단에서는 개인의 작은 이익을 위해 집단의 큰 손해를 초래하는 일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본딩 조직력과 브리징 조직력의 차이"
'사회적 자본'을 좁은 의미에서 볼 때는 '문화적 자본'과 구분하여 계량적 파악이 가능한 사회망(social network)에 초점을 둔다. 이렇게 좁은 의미로 보아도 사회적 자본이 중요한 경제학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로버트 퍼트넘의 연구 <혼자 볼링(Bowling Alone)> 덕분이었다.
1995년 발표된 그의 논문은 최근 50년간 미국의 경제 체질 약화를 볼링 클럽을 비롯한 미국 사회의 네트워크가 축소되어 온 추세와 연관시켜 해석한 것이다. 계량적 자료를 폭넓게 활용한 연구가 아닌데도 그 참신한 개념이 학계를 넘어 전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협력자들이 나서서 관련 연구를 확장한 결과 2000년 단행본으로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퍼트넘이 제시한 개념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사회적 자본의 형태를 '본딩(bonding)'과 '브리징(bridging)'으로 구분한 것이다. 본딩은 동질적 집단 내의 유대감이고, 브리징은 이질적 집단들 사이의 연대감이다. 대표적인 본딩 조직은 폭력배다. 브리징 조직은 자원 봉사나 취미 활동 등 금전적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단체에서 나타난다.
브리징 조직력이 경제에 좋은 영향만 끼치는 반면 본딩 조직력은 집단 내부의 이익에만 공헌하면서 전체 사회에 대해서는 손해를 끼치는 경향도 있다. 그렇다고 본딩 조직력이 약한 것이 사회에 유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본딩 조직력이 브리징 조직력의 기초가 되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조직력의 적절한 배합이 사회적 자본의 확충을 위해 바람직한 것이라고 퍼트넘은 설명한다.
자본가 집단은 자본가 집단대로, 노동자 집단은 노동자 집단대로 집단 내에 적정 수준의 본딩 조직력을 가지면서 다른 집단들 사이에도 집단이기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브리징 조직력을 가지는 것이 개인, 집단, 사회의 이해관계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조건이며, 또한 경제 발전을 순조롭게 해주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하나만의 눈으로는 사물의 상호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
자본주의 발전을 역사의 큰 흐름으로 제시한다 하더라도, '자본'의 의미를 충분히 넓게 파악하기만 한다면 지나치게 편협한 역사관을 피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바라봄에 있어서도 민족주의, 민주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가치기준의 실마리를 '자본'의 의미로부터 도출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뉴라이트 역사관이 일제 통치를 미화하고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를 찬양하는 등 상식과 통념을 벗어나는 경향은 물질적 자본만을 중시하고 비물질 자본을 시야에 담지 못하는 결함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눈 하나만을 가지고도 사물을 자기 식으로 바라볼 수는 있다. 그러나 사물의 거리와 위치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눈 둘(또는 그 이상)이 필요하다.
앞의 여러 글에서 일제 통치와 이승만에 대한 뉴라이트의 관점을 따져보았으나, 박정희의 통치에 대해서는 언급한 바 없다. 일제 통치와 이승만 독재를 정당화하려는 뉴라이트의 시도는 워낙 터무니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각도에서나 쉽게 논박할 수 있는 것이다. 박정희 통치는 그에 비해 함부로 평가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의 도덕성에 관해서는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든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만, 지금 젊은 세대에게 '가장 위대한 한국인'의 하나로 인식되는 그의 이미지는 도덕적 비판으로 흔들릴 것이 아니다.
박정희 통치가 한국에 어떤 득실을 가져왔는지 평가에 나는 아직도 자신이 없다. 그러나 그를 놓고 "도덕성은 어쨌건 한국을 크게 발전시킨 대통령"이란 평가를 서슴없이 내리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자본의 관점도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는 한국 사회의 본딩 조직력에는 공헌했지만, 브리징 조직력에는 큰 손상을 입혔다고 나는 본다.
1960년대 한국은 기술 축적도 자본 축적도 빈약한 나라였다. 그는 자본력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해 재벌 중심 특혜 경제를 키워냈고, 기술력의 한계를 우회하기 위해 저임금 체제를 구축했다. 노동 인구의 도시 유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농촌 경제를 열악한 상황에 묶어놓았고 낮은 임금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박멸했다. 불평등과 불공정이 체제를 흔들지 못하도록 사법부와 언론과 학생운동을 군화발로 짓밟았다. 신뢰가 아닌 폭력으로 지켜지는 체제 아래 권력 아닌 권위는 모두 힘을 잃고 가진 자는 모두 '도둑놈'으로 보이게 되었다.
1961년에서 1987년까지 26년간의 군사독재는 참혹하고 부끄러운 일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그 모든 일이 '경제 개발'이란 하나의 가치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경제 통계의 한 쪽을 보며 허망한 느낌에 빠진 일이 있다. 1960년에서 1990년까지 30년간 한국의 총 경제성장률이 대만,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여러 나라와 거의 같은 수준이었음을 보여주는 통계였다.
"한국 사회의 브리징 조직력을 차단하는 '명박산성'"
박정희 통치의 성과는 그의 죽음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그 후의 계승-발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여지를 가진 것이다. 그 성과의 가치를 더욱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통치 스타일과 다른 방향으로 보완-조정하는 것, 그가 억눌렀던 측면을 살려내는 것이 바람직한 방향이 될 수도 있다. 한국 사회의 브리징 조직력을 멋지게 드러낸 것이 촛불 운동이고, 그 주역이 박정희를 영웅시하는 젊은 세대라는 사실이 의미 깊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본뜨려고만 하는 것 같다. 40년 전 상황에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통치 스타일도 한편으로는 적지 않은 그늘을 후세에 남겼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고속성장을 위해 분배를 외면하고 특혜를 몰아줌으로써 가진 자들의 본딩 조직력만 키우는 개발독재를 재현하겠다고? 물질적 자본만으로 세상을 보는 편협한 역사관이 거들어주지 않는다면 상상해 내기도 어려운 시대착오다.
안병직과 이영훈은 한국의 자본주의화를 주도한 하나의 집단을 상정한다. 개항기부터 두각을 나타낸 신흥 지주층이 일제에 협력하면서 고등교육을 받아 전문기술을 가진 실력자 집단으로 자라났고, 대한민국에서도 경제 발전의 주축을 맡았다는 것이다.
이 집단이 지금 '고소영', '강부자'로 이어졌다고 여기기 때문에 현 정부에 환멸을 느끼는 사람들이 '친일파 청산'의 실패를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브리징 조직력을 차단하는 '명박산성'은 이 집단의 본딩 조직력을 지키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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