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로서의 명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그리고 민주독립당과 민족자주연맹의 중간파 노선이 좌절되고 말았기 때문에 '정치가'로서 홍명희의 면모는 중시받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정치'의 뜻을 너무 좁게 보는 근대적 세태도 작용하는 것 같다. 세상의 나쁜 일을 줄이고 좋은 일을 늘이려는 노력으로서의 원론적 '정치'를 생각한다면 정치적 의지를 빼고 홍명희를 생각하기 어려울 것 같다.
홍명희의 최대 업적은 물론 <임꺽정>이다. 그 집필에 매달려 40대 10년을 지냈다. 그의 정치적 의지를 살피는 데 이것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의 성격을 논하는 데 제일 많이 인용되는 작가의 말이 이런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에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조선문학이라 하면 예전 것은 거지반 支那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건이나 담기어진 情調들이 우리와 유리된 점이 많았고, 그리고 최근의 문학은 또 歐美 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洋臭가 있는 터인데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게서는 옷 한 벌 빌려 입지 않고 순조선 거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情調에 일관된 작품' 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情調"라는 말에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내는 논평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말에 담긴 정치적 의미가 그 일생의 정치적 행보를 설명해 주는 것 같고, 그 의미에 비추어 본다면 그의 정치적 의지가 매우 강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홍명희는 23세 때 망국과 함께 부친의 자결을 겪었다. 2년 후 탈상하자 중국과 싱가포르에 가서 지내다가 1919년 귀국하자마자 3-1운동으로 투옥되었다. 그 후 언론계에서 일하다가 신간회 결성에 주역으로 나서는 한편 <임꺽정> 집필을 시작했다.
그 자신이 부친의 유언을 평생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만년에 술회했거니와, 홍명희가 부친의 뜻 살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을 것은 인지상정으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1919년 귀국은 외부에서의 투쟁보다 내부에서의 정진이 합당한 길이라는 결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928년, 홍명희는 18년 전 부친이 돌아가실 때의 나이가 되었다. 모색을 마치고 행동에 들어가야 할 때였다. 이 때 그는 한편으로 신간회를 추진하면서 한편으로 <임꺽정> 집필을 시작했다. 신간회는 여러 사람이 어울리는 일이었으므로 한 사람 마음대로 될 일이 아닌 반면 집필은 혼자 밀고 나갈 수 있는 일이었다. <임꺽정>에 더 큰 비중을 두었을 것을 짐작한다.
부친은 "國破君亡, 不死何爲"란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뜻을 살리는 길은 나라를 되살리는 것이었다. 상해에 독립운동가들이 모여들고 있을 때 홍명희가 귀국한 것은 밖에서 몸을 움직여 싸우는 것보다 안에서 마음을 움직여 할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닐까. 그 할 일이 9년 동안 좁혀져 <임꺽정>에 이른 것 아닐까.
정치의 본질을 묻는 자공의 질문에 "兵, 食, 信" 세 가지로 공자가 대답하는 대목이 <논어>에 있다. 셋 다 지키지 못할 때 어느 것을 버리느냐 묻자 "去兵"이라 대답하고, 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하고 묻자 "去食"이라 대답한다. "信"이 제일 근본이라는 것이다.
임금이 백성에게 "信"을 지키는 것이 나라 지키는 길이다. 그런데 임금이 없어지고 회복될 전망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백성 사이에 "信"을 세워야 한다. 그를 위해서는 같은 민족공동체에 속한다는 소속감이 필요하다. 일본을 통해 들어오는 "洋臭"의 얕은 맛에 현혹되어서는 "信"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조선의 "情調" 살리는 일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것이다.
<임꺽정> 집필은 "復國"의 인프라 작업이었다. 그 성과는 아직도 번듯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지금도 독자들에게 "복국"의 뜻을 심어주고 키워주고 있다. 같은 시기에 활동한 어느 정치가보다도 한민족의 '복국'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긴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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