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3일 9시반경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태우고 서울공항을 떠난 비행기가 한 시간 후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환영을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북한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진 ‘최고지도자’를 일반 국가원수와 다른 특별한 권위를 가진 존재로 받들어 왔다.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못마땅한 일이 있을 때는 형식적 국가원수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북측 대표로 내세우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대등한 국가원수 사이에서도 공항 영접은 특별한 호의다. 긴장관계에 있는 남한의 대통령에 대한 김정일의 공항 영접은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이튿날 오후 정상회담을 위해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은 후 이런 말이 오갔다고 한다.
(김대중) “김 위원장께서 공항에 나와 영접해주시고 우리가 악수하는 것을 보고 서울에서 1,000여 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모두 기립박수를 했다고 합니다.”
(김정일) “공항 영접이요? 대통령께서 오시는데 그건 기본적인 예의 아닙니까, 제가 뭐 그리 대단한 존재라고...” (임동원 <피스메이커> 89쪽)
이 회담 중 김정일은 스스로 즐겨 쓰는 표현대로 ‘통 큰’ 인상을 많이 풍겼다. 공항 영접부터 김대중에 대한 통 큰 대접이었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는 말대로 예법을 벗어나는 지나친 공손함에는 문제가 따른다. 남한 대통령에 대한 지나친 공손함은 북한 인민의 자존심에 거슬릴 수 있다. 김정일은 이 문제를 연장자에 대한 예의로 무마했다. “기본적인 예의”라고 했는데, 남한 대통령이 누구라도 적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20여 세의 나이 차이뿐 아니라 김대중이 오랜 경력을 통해 북한을 존중하는 태도를 지켜온 남한 지도자였기 때문에 인민의 자존심을 거스를 염려가 적었던 것이다.
공항 영접이라는 ‘파격적인 예의’에는 두 가지 실제적 효용이 있었다. 하나는 북한의 개방 의지를 전 세계에 과시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남한 여론이 김대중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장자에 대한 예의’라는 전통적 덕목을 내세움으로써 민족주의 정서에 영합한 것은 부수적 효과였다. 사고의 유연성이 돋보인다.
사고의 유연성은 임기응변의 능력을 뒷받침해 준다. 임동원이 회담 열흘 전 특사 방문에서 돌아와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 중에 김정일이 “말이 논리적이지는 않지만 주제의 핵심을 잃지 않는” 좋은 대화상대자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임기응변을 잘하고 좋아하는 특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특사로서 임동원의 임무 중에는 공동선언의 초안을 마련하는 것이 들어있었다. 정상적 관계를 가진 국가 간에도 정상회담을 앞두고는 미리 모든 준비를 해뒀다가 회담에서는 공식 발표만 하는 것이 관례다. 하물며 정상적 관계가 없다시피 하던 남북 간의 정상회담에 앞서서는 변수 발생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준비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임동원은 남한 정부의 입장을 소상히 밝힌 대통령 친서를 갖고 가서 김정일을 만났을 때 한 시간에 걸쳐 설명하고, 그에 대한 김정일의 응답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김정일은 정면으로 응답하지 않았다. 김대중을 매우 존경하며 “평양에 오시면 존경하는 어른으로, 전혀 불편이 없도록 품위를 높여 잘 모시”겠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 어떤 외국 정상의 평양 방문 때보다 더 성대하게 최고로” 모시겠다고 했다. 잘 모시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간절하니, 회담 내용 같은 데 쓸 데 없는 걱정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무엇보다 김 대통령의 말씀을 많이 듣고 싶어요. 격식 없이, 허심탄회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뭐, 격식 갖춘 이야기야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하시면 되겠지요. (...) 과거의 좋은 남북합의 문건이 세 개나 있지 않습니까(7-4 남북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공동선언을 말하는 것이다). 근데 제대로 실천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본질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는데 비슷한 내용의 합의 문건만 자꾸 만들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이미 합의한 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이번 만남에서는 희망적인 선언 수준의 간단한 합의 문건을 내면 될 겁니다. 그리고 그런 건 미리 작성해둘 성질의 것이 아니지요. 그런 건 정상회담 마치고 작성하면 돼요. 그리고 단계적으로 하나씩 합의하고 이행해나가면 되는 겁니다. 정상회담 소식을 들은 중국 지도자들도 어떻게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느냐며 엄청 놀랍디다. 주변국들 너무 놀라게 하지 말고 차분히 하나씩 하나씩 해나갑시다.” (임동원 <피스메이커> 60-61쪽)
이 접견에 임동원이 녹음기를 들고 들어가지는 않았을 테니 김정일의 표현 그대로는 아니리라고 생각되지만,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리는 없다. (이 책이 나온 것은 김정일이 살아있을 때였고, 최고지도자의 발언 내용을 조작하는 것은 아무리 좋은 뜻이더라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덧붙인 것은 없겠지만, 잘라낸 것은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기존의 합의가 지켜지지 않은 책임이 남쪽에 있다는 김정일의 관점이 행간에 비쳐 보인다. 그러니까 풍성한 합의문을 새로 만들어내자는 남측의 의욕에 제동을 걸며 기존 합의의 실천을 강조한 것이다.
욕심을 너무 내지 말자는 이유의 하나로 “주변국들 너무 놀라게 하지 말” 것을 농담처럼 말하며 중국의 예를 들었는데, 중국보다 미국 놀라지 말게 할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중국에는 바로 몇 주일 전에 김정일 자신이 다녀왔다. 그 방문의 주된 목적이 정상회담에 관한 의논이었으리라는 것은 시점으로 보아 분명하다. 자기네 후견인의 양해는 확실히 받아놓았는데, 댁의 후견인 사정은 어떤가 묻고 있는 것이다.
“김 대통령의 말씀을 많이 듣고 싶”다고 했다.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존경하는 연장자의 말씀을 듣겠다는 겸손한 자세처럼 보이지만, 그 동안 남북관계 경색의 책임이 남측에 많이 있으니 ‘결자해지(結者解之)’의 자세를 요구한다는 뜻이 담긴 말이다. 가벼운 농담이나 겸손처럼 보이는 말에 심각한 뜻을 담아내는 화법이다.
김정일은 온 임동원에게 정상회담 합의문에 대한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만나서 얘기하다 보면 합의되는 내용이 있지 않겠느냐, 그것을 적으면 합의문이 되는 것 아니냐, 하는 대범한 태도였다. 회담 상대에 대한 신뢰를 더 중시한다는 자세이기도 하지만, 가시적 성과를 간절히 바라는 남측을 상대로 튕기는 입장으로도 볼 수 있다. 자신감을 가진 임기응변을 통해 회담 과정에서 최대한을 얻어내려는 욕심도 있었을지 모른다. 아무튼 이 때문에 임동원은 6월 13일 평양 도착 후에도 걱정을 놓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피스메이커> 84-85쪽) 그 혼자만의 걱정이었겠는가. 이 회담에서 번듯한 성과를 끌어내지 못한다면 남북관계만이 아니라 국내정치에서도 정권의 입장이 크게 불리해질 것이 분명했다.
정상회담은 2중구조로 이뤄졌다. 6월 14일 오전 김영남 상임위원장과의 회담은 공식적 성격의 “간단한” 것이었다. 북한 측도 8명이나 배석하고 남한 측도 공식 수행원이 모두 배석했으니 자리는 컸지만 내용은 간단했다는 것이다. 반면 오후 3시부터 열린 김정일과의 회담에는 3명씩으로 배석자를 제한한 자리였는데, 북측은 김용순 대남 담당 비서 한 사람만이 배석했다. 남측은 황원탁 외교안보수석과 이기호 경제수석이 임동원과 함께 배석했다.
회담의 이 2중구조는 북한 측의 자존심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북한은 남한 대통령을 자기네 최고지도자와 동격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외적 국가원수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있다. 그래서 김영남과의 회담이 공식회담이고 김정일과의 회담은 ‘접견’의 성격인 것처럼 내부 선전이 가능한 것이다.
남한 입장에서 보면 모욕적인 오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체제의 차이를 전제로 하고 보면 불합리한 관점만도 아니다. 항구적이고 전면적인 지도력을 발휘하는 북한의 최고지도자는 5년마다 선출되어 행정부만을 이끄는 남한의 대통령과 격이 다른 면이 있다. 노태우 대통령 때 세워진 대북정책이 김영삼 정권에서 뒤집힌 경험을 되돌아보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차이다. 김정일이 약속할 수 있는 범위에 비해 김대중이 약속할 수 있는 범위가 훨씬 좁은 것이 현실 아닌가.
김대중 대통령은 이 점을 인정해서 2중구조의 회담을 받아들였다. 한편 김정일은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빙자한 극진한 환대로 김대중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공항 영접에서 백화원 안내까지 여러 시간에 걸친 그의 ‘밀착 환대’는 결코 ‘접견’의 자세가 아니었다. 내부 선전을 위해서는 최고지도자의 ‘존엄’을 지키되 회담 상대가 굴욕감을 느끼거나 불리한 입장에 서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김대중과 김정일은 회담 성공을 위해 상대방의 체면을 서로 살려주는 암묵적 협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회담이 시작될 때 김정일이 “공격적인 화제”를 들고 나왔다고 한다.
“어젯밤에 남쪽 텔레비를 보면서 기분이 좀 상한 게 하나 있어요. 남조선 대학가에 인공기가 나부낀 데 대해서 국가보안법 위반이니 사법처리를 하겠다는 겁니다. 이건 뭐, 정상회담에 찬물을 끼얹겠다는 거 아닙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대단히 섭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공항에서 봤는데, 남측 비행기에 태극기를 달고 왔고 남쪽 수행원들이 가슴에 모두 태극기를 달고 있었지만 우리는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많이 생각해봤어요. 어제 김 대통령께서 김영남 위원장과 회담하고 만찬 대접도 했으니 그만 헤어져도 되겠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주변에서 만류해서 오늘 제가 여기 나온 겁니다.” (<피스메이커> 90-91쪽)
임동원이 서울에 돌아와 알아보니 10여개 대학에서 한반도기 양쪽에 태극기와 인공기를 나란히 걸어 정상회담 개최를 환영한다는 표시를 한 데 대해 검찰에서 “주동자를 색출해 엄벌하겠다”는 발표를 했었다고 한다. 요즘 검찰은 너무 “알아서 기는” 게 문제인데, 당시 검찰에는 “몰라서 튀는” 문제가 있었을까? 대통령이 평양에 가 있는 상황에서 단 이틀을 못 참아 국가보안법 적용 방침을 발표하다니, 참 심했다. 남한 대통령의 위상과 북한 최고지도자의 위상에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김 대통령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이 첫 번째 도전에 점잖게 간단히 응수했다”고 임동원은 적었지만, 체면을 구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기선 제압에 성공해 놓고는 자기가 꺼내놓은 문제를 적당히 눙치는 김정일의 솜씨가 돋보인다.
“뭐, 남쪽 정치풍토가 우리와 다르다는 건 나도 인정합니다. 어제 공항에서 의장대 사열뿐 아니라 남조선 국기도 휘날리고 애국가 연주도 하고 했어야 내가 오늘 인공기 문제를 가지고 더 해볼 수 있는 건데... 그건 그렇다 쳐도 적어도 정상회담 기간에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학생들을 처벌하지 말아야 합니다.(...)”(같은 책 91쪽)
2000년 정상회담의 주도권은 남측보다 북측이 쥐고 있었다는 느낌이 여러 모로 든다. 평양으로 찾아갔다는 사실부터 그렇다. 북한은 경제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극심한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남한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북측이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흔히 말하는 북한의 ‘벼랑 끝 전술(brinkmanship)’을 생각해 본다. <시사상식사전>에는 “북미 협상과정에서 북한이 취한 협상전술로, 협상을 막다른 상황으로 몰고 가 초강수를 두는 일종의 배수진”이라고 요약되어 있다. 상황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위협으로 상대방의 양보를 얻어내는 전술이다. 서방 언론에서 이 전술을 들먹일 때는 나쁜 짓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런데 대응을 위해서는 도덕적인 평가보다 현실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왜 북한은 이 전술을 쓸 수 있고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인가?
인민의 저항을 거의 걱정할 필요가 없는 독재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독재체제가 가능한 것은 대다수 인민이 위기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민주국가라도 국가의 존망이 달린 전쟁에 임해서는 민주적 원칙을 유보하지 않는가. 비상사태를 인민이 인식하고, 또 그 사태를 지도자들이 불러온 것이 아니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독재체제의 지속이 가능한 것이다.
북한 인민의 불만이 팽배해 있다고 많은 탈북자들이 증언한다. 그런데 ‘재미교포 아줌마’ 신은미는 그와 다른 인상을 사람들에게 전하다가 남한에서 추방당했다. 북한 사정에 관해서는 남한 사회의 ‘언론의 자유’에 심한 제약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일이다. 그렇다면 탈북자들이 북한의 실상을 전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이 없을까?
북한에 대해 좋은 말 한 마디만 하면 ‘종북’으로 매도하는 세력이 위세를 떨치는 이 사회에서, 낯선 곳에 와 살며 따로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기탄없이 말할 수 있을까? 입국 직후 조사 과정에서의 인권 침해 상황도 밝혀지고 있고 심지어 간첩으로 조작당한 사례까지 드러났다. “나는 내 특별한 사정 때문에 이곳으로 넘어오게 되었지만 저쪽에도 인민 대다수는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말을 하는 탈북자가 있다면 많은 것을 잃고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릴 것이다.
대다수 북한 주민이 어려운 생활을 오랫동안 해온 것이 분명한데도 지도부에 대한 근본적 신뢰를 거두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확실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강경한 대외정책이 어려운 사정을 더 연장시킬 것으로 보이더라도 주민의 반발이 크지 않기 때문에 북한 지도부는 전술적 필요가 있을 때 얼마든지 강경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남한 주민은 고통에 민감하다. 국민의 고통을 늘리거나 위험에 빠트리는 강경한 정책을 정부가 택하기 어렵다. 북한에게는 잃을 것이 없고 남한에게는 많은 것이다. 함께 하는 일에서 북한보다 남한이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하는 엄연한 이유다.
대북 강경론자들은 ‘상호주의’를 말한다. 더 많은 양보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한의 이익, 따라서 남한 주민의 이익을 지키는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정말일까?
북한에서는 ‘벼랑 끝 전술’을 ‘맞받아치기’라 한다. 상대방이 악의적으로 나온다면 굴복하지 않고 결연히 맞받아친다는 말이다. 더 큰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상대방이 이익을 취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남한 일각에서 주장하는 ‘상호주의’는 북한의 ‘맞받아치기’와 같은 원리다. 포용적 정책으로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북한이 더 큰 이득을 얻는 길이라면 포기하겠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같은 전술이라도 구사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그 타당성에 차이가 있다. 잃을 것 없는 입장이라면 효과적인 전술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입장은 그와 다르다.
상호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퍼주기’를 비판하지만, 작은 이익을 퍼줌으로써 평화를 비롯한 큰 가치를 얻으려는 햇볕정책은 지킬 것 많은 남한이 잃을 것 없는 북한을 상대로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정책이다. 신자유주의의 ‘공평성’이 현실의 불평등을 증폭시켜 ‘공정성’의 실현을 가로막는 것처럼 상호주의의 ‘상호성’도 현실의 불균형을 증폭시켜 평화의 실현을 가로막는 것이다. 상호주의가 남한에 늘려주는 것은 이익이 아니라 위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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