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11일 선교사이자 교사인 마셀라 셔우드 양은 인도 펀자브 주 암리차르 시에서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향해 가다가 좁은 골목길에서 폭도들과 마주쳤다. 폭도들은 그 머리채를 잡아 쓰러트리고 실컷 때리다가 죽은 줄 알고 버려두고 갔다. 착한 인도인 몇이 셔우드를 구해 감춰놓고 치료해준 다음 폭도들 몰래 영국군 요새로 데려다줬다. <Wikipedia> "Jallianwala Bagh massacre"항에 나오는,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이 이야기는 아마 셔우드 본인의 진술에 의거한 것이리라 짐작된다.

 

며칠 후 병상의 셔우드를 방문한 지역 주둔군사령관 레지널드 다이어 대령(임시 준장)은 괴이한 명령 하나를 내렸다. 셔우드가 폭행을 당한 그 골목을 지나가는 인도인은 골목 끝에서 끝까지(200야드 거리) 네 발로 기어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몇 달 후 다이어는 조사위원회의 심문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인도인들은 자기네 신들 앞에서 엎드려 기지 않습니까. 영국 여인은 힌두교의 신 못지않게 신성한 존재이며, 따라서 인도인은 영국 여성 앞에서도 네 발로 기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고자 한 것입니다.”

 

다이어가 심문을 받은 것은 셔우드 폭행사건의 이틀 후 암리차르에서 벌어진 참혹한 일 때문이었다. 일요일이자 축제일인 이 날 오후 1만5천 명의 군중이 공원에 모여 있을 때, 다이어 대령이 일군의 병력을 이끌고 와서 아무런 경고나 해산명령도 없이 공원 입구를 막고 군중을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사격은 탄약이 거의 떨어질 때까지 10분간 계속되었다. 대영제국 최악의 만행 중 하나로 꼽히는 ‘암리차르 학살’이었다.

 

그 날 아침에 계엄령이 내려진 사실을 군중 대부분은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다이어에게 군중의 해산보다 살해가 목적이었다는 사실이 심문 과정에서 밝혀졌다. 그는 군중이 밀집한 곳으로 사격을 집중하도록 소총수들을 독려했다. 차마 사람을 쏠 수 없어 조금 조준을 높이는 병사에게 “조준 낮춰! 너 여기 뭐 하러 온 거야?” 외치기도 했다. 군대가 점령하고 있던 정문 외의 네 군데 비좁은 출입구에 사격이 집중되었고, 그곳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깔려죽기도 했다.

 

몇 달 후 식민당국은 암리차르에서 379명이 살해되었다고 발표했으나 인도인들은 믿지 않았다. 발사된 탄환이 1,650발 가량이었다는 사실은 확인되었지만, 총 맞아 죽은 사람보다 밟혀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광장 모퉁이의 우물에 많은 사람이 탄환을 피해 뛰어들었다가 압사했는데, 이 우물에서만 120구의 시신이 나왔다. 국민회의는 별도의 조사를 통해 사망자가 1천 명이 넘는다고 발표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인도의 정정이 불안할 때였다. 인도 민족주의자들은 전쟁 중 영국에 대한 협력을 인민에게 호소했고, 1백여만 명의 인도인이 군인과 노무자로 전선에 나갔다. 자치와 독립의 길을 열어가기 위해서였다. 간디도 여기 동참했기 때문에 그의 비폭력주의와 모순되는 것 아니냐는 시비를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끝나 군사력에 여유가 생기자 영국은 거꾸로 인도에 대한 강압통치를 더욱 조이는 정책을 취했다. 1919년 3월 10일 인도에서의 테러 방지를 목적으로 언론 통제와 임의 체포 등 억압정책을 허용하는 롤래트 법(Rowlatt Act)의 통과를 계기로 인도 민족주의자들이 영국에 대한 협력노선을 포기하면서 민중소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소요는 펀자브 지역에서 특히 심했고, 암리차르에서도 학살 전 며칠 동안의 시위 중 경찰의 발포로 십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분노한 인민의 영국인에 대한 습격이 일어나는 가운데 셔우드 폭행사건도 일어났던 것이다.

 

학살을 지휘한 다이어는 상급자들에게 “혁명군과 조우해 교전을 벌였다”고 보고했다. 펀자브 주의 대리총독 마이클 오드와이어는 다이어의 조치가 정당한 것이었다고 승인하고 첼름스포드 인도총독에게 계엄령 선포를 요청했다. 총독은 이것을 승인했다.

 

다이어는 인도인들에게 “암리차르의 백정”이란 별명을 얻었으나 본국에서는 많은 지지를 받았다. 러드야드 키플링은 그를 “인도의 구원자”로 치켜세우며 모금운동을 벌여 2만6천 파운드를 모았다.(피살자 유족들은 옥신각신 끝에 1인당 37파운드 10실링씩을 보상금으로 받았다.) 상원에서도 다이어를 애국영웅으로 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지만 하원은 달랐다. 학살 15개월 후인 1920년 7월 8일 하원은 다이어의 조치를 비난하는 결의안을 247 대 37로 통과시켰다. 표결 직전 윈스턴 처칠의 발언 중에는 이런 말이 있었다.

 

“군중은 곤봉 정도 외의 무장을 갖추고 있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공격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 사격이 시작되자 군중은 달아나려 했습니다. 트라팔가 광장보다 훨씬 작고 거의 아무 출구도 없는 공간 속에 총알 하나가 서너 사람을 뚫고 나갈 정도로 빽빽하게 들이찬 상황에서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이리 뛰고 저리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격이 중앙을 향하면 군중은 측면으로 달아났고, 그러면 사격이 측면으로 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땅에 엎드리자 사격은 땅바닥을 향해 내려갔습니다. 이런 상황이 8분 내지 10분 동안 계속되었고, 탄약이 떨어질 지경이 되어서야 사격이 그쳤습니다.”

 

학살에 대한 보도는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한 달여가 지난 5월 22일에야 소식을 들은 시인 타고르는 며칠 후 첼름스포드 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 기사작위를 버린다고 선언했다.

 

“펀자브 주에서 국지적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정부가 취한 끔찍한 조치로 인해 우리 마음에는 모멸적인 충격과 함께 영국 신민으로서 인도인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깨달음이 떠올랐습니다. (...) 슬픔과 공포 속에 말문이 막힌 수많은 동포들의 항의를 위해 어떤 어려움이라도 무릅쓰고 목소리를 제공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입니다. 어처구니없는 모멸의 상황이 명예로운 훈장으로 하여금 수치심으로 번들거리게 하는 때가 왔습니다.”

 

식민당국과 영국정부는 암리차르 사태에서 다이어의 역할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며 파장을 차단하는 데 주력했다. 영국 언론에 학살의 진상이 보도되기 시작한 것은 8개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다이어를 옹호하는 공식보고만으로도 정치계와 관계에서 논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 내각의 인도장관 에드윈 몬테이규는 사건 반년 후인 10월에 인도의 소요사태를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윌리엄 헌터 위원장의 이름에 따라 ‘헌터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사법적 권한이 없는 위원회였으므로 증인에게 선서를 요구할 수 없었다. 그래도 위원들은 엄격한 심문을 통해 중요한 쟁점들을 잘 밝혀낸 것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11월 19일 위원회에 출두한 다이어는 많은 사상자를 내려는 의지를 내내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당당하게 밝혔다. 출동 몇 시간 전부터 군중의 결집을 알고 있었지만 결집을 막으려는 조치를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고, 출동할 때는 군중을 향해 발포할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명예와 당국의 명예를 위해 발포가 꼭 필요했다는 것이다.

 

“발포 없이 군중을 해산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면 군중이 도로 모여 우리를 비웃었겠지요. 그것은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길이었습니다.”

 

헌터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알려지면서 영국에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제국주의 정책에 미련을 가진 수구세력과 환멸을 느끼는 일반인 사이에 심각한 국론분열이 일어났는데, 수구세력의 정보 독점이 차츰 풀리면서 학살에 대한 비판이 확대되고 고조되었다.

 

헌터위원회는 1920년 3월 8일 방대한 증거를 첨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다이어와 식민당국의 몇 가지 중요한 조치를 ‘오류’(error)로 규정했다. 잘못된 것이기는 하지만 기술적인 실수 정도로 본다는 것이다. 결론의 중요한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 사격 시작 전에 해산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은 오류다.

* 사격을 길게 계속한 것은 중대한 오류다.

* 군중의 기세를 꺾어놓으려 했다는 다이어의 의도는 잘못된 것이다.

* 다이어의 행동은 권한을 넘어선 것이다.

* 펀자브 지역에는 영국의 통치를 전복하려는 음모가 존재하지 않았다.

 

헌터위원회의 9인 위원 중 인도인은 두 명이었다. 그들은 위원회의 보고서 내용이 불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소수의견을 별도의 보고서로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이 추가되었다.

 

* 군중집회를 금지하는 포고령이 충분히 알려져 있지 못했다.

* 군중 속에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었고, 공원 내에서 아무런 폭력적 행동도 없었다.

* 다이어는 부상자를 구조하도록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행정당국에 알려야 했다.

* 다이어의 행동은 “비인도적이고 비영국적”이었으며 인도에서 영국 통치의 위신을 손상했다.

 

영국의 비판 여론 가운데 “대영제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수치스러운 참사”라는 처칠 국방장관과 애스키스 전 수상 등 정계 요인들의 지적이 두드러진다. 학살의 야만성과 대영제국의 문명 사이에 선을 그으려는 의도가 읽힌다. 그런데 사실 따져보면 이 정도 “수치스러운 참사”는 대영제국의 역사에 유례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 영국인의 활동 중에는 더 심한 것도 꽤 있었다. 이 정도 만행이 영국의 여론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어찌 보면 오히려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두 가지 큰 배경조건이 생각된다. 그 하나는 세계대전의 참화를 겪으며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감이 자라나고 있던 영국의 상황이고, 또 하나는 영국과 인도 사이의 문화적 친연성이 튼튼히 자리 잡고 있던 상황이다.

 

세계 각지의 영국 식민지 중에 인도는 특이하게 높은 수준의 토착문명을 가진 곳이었다. 영국 지배를 받는 동안 영국의 많은 문물이 인도에 수입된 것은 물론이지만 인도의 문명과 문화에 대한 영국인의 애정과 존경도 상당히 일어났다. 영국 문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인도의 색채를 조화시킴으로써 전 세계인이 우러러볼 경지에 이른 인도인들도 있었다. 인도인을 다른 식민지 원주민처럼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던 다이어 대령 같은 사람들을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오히려 야만인으로 보고 있었다.

 

헌터위원회가 구성될 때까지의 정황을 세밀히 보여주는 자료는 접하지 못했다. 그러나 반년이나 지난 후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사실에서 약간의 추측이 가능하다. 강압통치를 지지하는 수구세력은 다이어의 ‘애국적’ 행동이 조사 대상이 되는 일을 극력 막으려 했을 것이다. 인도총독부에서는 정보의 본국 전달을 최대한 막음으로써 의혹을 품는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몇 달에 걸쳐 조금씩 전달된 정보가 쌓여 조사위원회 구성의 필요성이 비로소 드러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반년의 시간 동안 인도에서 사태가 더 악화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이어로 대표되는 강압통치 제창자들은 가혹행위를 통해 인도인의 과격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고 그 저항을 갖고 자기네 주장을 정당화하려 했다. “보아라! 인도인들은 저렇게 반역심을 품고 있지 않은가! 힘으로 억누르는 것 외에는 인도에 질서를 유지할 길이 없다!” 폭력사태가 커졌다면 진압에 바빴을 것이고, 헌터위원회의 차분한 조사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22년간의 남아프리카 생활을 마치고 1915년 인도로 돌아온 간디의 사티아그라하(비폭력 저항) 노선이 지도력을 키우고 있을 때였다. 1918년 중 참파라와 케다의 농민운동에서 거둔 성공 위에서 1919년 3월 롤래트 법에 저항하는 ‘하르탈’(hartal, 정호영은 남부디라파드의 <마하트마 간디 불편한 진실> 역자주에서 “현재는 파업의 의미로 쓰이고 있으나 당시에는 힌두교 전통에서 세상의 모든 일을 중단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라고 설명했다.) 운동도 간디가 주도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인도인 중에는 과격투쟁을 주장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간디와 국민회의에 대한 신뢰 위에서 인도 인민이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간디는 진실이 결국 승리한다는 믿음을 갖고 사티아그라하 지도력을 발휘했다. 역사가들 중에는 암리차르 학살이 인도 독립을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 헌터위원회가 영국인의 양식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위원회의 충실한 활동이 가능하게 한 인도인의 자제력이 내게는 더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덧붙임 하나. 암리차르 학살 당시의 펀자브 대리총독 오드와이어가 1940년 3월 13일 런던의 캑스턴홀에서 인도 독립운동가 우담 싱에게 저격 사살당했다. 학살 당시부터 다이어는 하수인일 뿐이고 오드와이어가 몸통이라는 견해가 많이 떠돌았는데, 강제퇴역을 당한 다이어와 달리 오드와이어에게는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우담 싱은 그 해 7월 31일 교수형에 처해졌지만, 그 자신이 학살 현장에서 총상을 입은 사람이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에 대한 여론의 비난은 심하지 않았다. 그는 재판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를 죽인 것은 그에게 원한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학살의 진짜 원흉입니다. 그가 우리 사람들의 정신을 짓밟으려 했기 때문에 내가 그를 짓밟은 것입니다. 복수를 위해 21년을 기다려 왔습니다. 해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나는 내 조국을 위해 죽습니다. 조국을 위한 죽음보다 더 큰 어떤 명예를 내가 바라겠습니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