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현대사> 잘 받아서 잘 읽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하는 일은 나도 해보고 싶은 일인데 당신은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분이라 생각해서 당신이 이 일에 나선 것이 반가웠죠. 이제 그 성과가 나온 것을 보며 “아, 유 선생이 이렇게 잘 해냈으니 나는 할 일이 줄었구나!”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 구석으로는 “유 선생이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부터 어떻게 나아가야 하나?” 욕심도 나고 걱정도 듭니다.

 

당신 글 읽다가 늘 그러듯 무릎을 친 대목이 많습니다. 제목에서부터 주관성을 스스럼없이 표방한 점, 도입부에서 시점과 종점을 대비하여 시야를 안정시킨 점,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축을 교차시켜 입체적 시각을 빚어낸 점, 등등. 무엇보다도 산업화와 민주화의 가치에 대해 공정한 관점을 세우려는 노력이 돋보였습니다. 억지로 지키는 중립적 입장보다 양쪽 가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상관관계를 밝히는 관점에서 의미 있는 설명이 잘 풀려나왔습니다.

 

좋게 본 점들에 대해서는 길게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아쉬운 점이나 석연치 않은 점에 생각을 모아야 여기서부터 나아갈 길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겠죠. 당신이든, 나든.

 

구상 단계부터 유 선생은 ‘욕망’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바라보겠다는 뜻을 밝혔죠. 욕망을 채워온 과정으로서, 그리고 욕망을 발전시키는 과정으로서 변화의 흐름을 해석하겠다고. 좋은 시도가 되겠다고 나도 부추겨드렸습니다.

 

나온 책을 보니 역시 ‘욕망’이라는 개념이 독자에게 좋은 ‘안경’ 노릇을 해주는군요. 그 안경 덕분에 변화의 수많은 굴곡이 가진 의미를 서로 연결해 볼 수 있고, 전체적인 그림도 무엇을 그린 것인지 잘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야를 밝혀주는 편리한 도구에는 밝혀주는 범위의 바깥을 보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가 있기 쉽죠. 극단적인 예로,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하는 뉴라이트 논객들이 있죠. 이기적 성향이 발동하는 영역은 아주 잘 밝혀줍니다. 그러나 한 귀퉁이에 조명을 집중하니까 인간과 사회의 전체 모습을 보는 데는 오히려 방해가 됩니다.

 

그 문제를 당신도 잘 알기 때문에 ‘욕망’의 의미가 인간의 모습을 크게 담을 수 있도록 넓게 설정한 거겠죠. 당신은 ‘욕망(慾望)’을 내세웠는데, 엄밀하게 보면 ‘욕망(欲望)’의 뜻으로 쓴 것 같아요. 한자를 안 쓰다 보니 차이를 무시하게 되는데, 원래는 전자를 육체적 욕망(greed, lust, craving), 후자를 정신적 욕망(aspiration, ambition)을 가리키는 말로 썼죠. 영어에서 ‘desire’는 양쪽에 걸치는 말인데 철학-사회과학 분야에서 이 개념을 중시한 것이 ‘욕망(慾望)’과 ‘욕망(欲望)’의 차이가 뭉개지는 하나의 조건이 된 것 같습니다. 이 글에서도 ‘욕망’을 한자와 관계없이 ‘desire’를 기준으로 쓰겠습니다.

 

동서고금의 철학자들이 ‘욕망’을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창문으로 써 왔습니다. 근대 사회과학에서 이 개념을 중시한 출발점이 토머스 홉스(1588-1679)라고 합니다. “모든 인간행위의 근본적 동기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욕망에 있다.”고 했다죠.(‘pleasure’를 ‘쾌락’보다 ‘즐거움’으로 옮기는 것이 ‘욕망’의 의미를 넓게 해석하는 데 맞을 것 같습니다.)

 

나는 요즘 사회계약설의 한계와 문제점에 관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홉스의 욕망관도 사회계약설과 연결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능동적인 측면만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인간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라는 측면도 함께 봐야 전체 모습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사회계약설에 입각한 국가관으로는 예를 들어 세월호 사태에서 국가의 책임을 생각할 범위가 좁게 됩니다.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책임은 인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지만 국민의 행복 정도가 아니라 생명까지 국가의 행위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능동적 계약 의지에 묶이지 않고 국가의 책임을 생각해야만 사회의 유지가 가능합니다.

 

이 책에서도 당신의 ‘욕망사관’은 독재정치의 문제점을 희석시키는 효과를 일으킵니다. 가해자나 피해자나 모두 욕망에 따라 움직인 측면에 시야를 제한한다면 그 사이의 책임관계가 상대화되니까요.

 

이 시각을 제기한 것은 좋은 일입니다. 종래의 독재정치 비판이 엄격한 관점에만 집착해서 반대쪽으로 시야가 제한되어 온 문제를 극복하는 데 좋은 공헌이 됩니다. 더구나 당신처럼 반독재투쟁을 실천하고 그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해 온 입장에서 개인적 이해관계를 벗어나 사회의 자기성찰 기반을 넓히려고 애쓰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욕망의 관점을 시야에 넣는다면 이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 사이의 소통이 훨씬 더 원활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욕망의 인간관이 인간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데 가진 한계가 사회를 바라보는 데도 똑같이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나의 풍경을 촬영하는 데도 어떤 대역의 광선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사진이 나올 수 있죠. 욕망이라는 안경도 좋은 안경이지만, 다른 안경도 두루 써 봐야 풍경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가을 <백년의 급진> 저자 원톄쥔 교수 이야기를 나누다가 원 교수가 여러 학파의 분석도구를 임의롭게 병용한다는 사실이 놀랍다고 당신이 말했죠. 나는 경제학에서 분석도구의 역할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원 교수의 연구방법은 이해가 갈 것 같데요. 각 학파 이론의 ‘정상적’ 발전을 위해서는 그 학파의 기본 원리를 충실하게 지켜야 하는데, 지금의 현실은 ‘패러다임 전환’ 차원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죠.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은 기존 패러다임의 지배력 약화에 따라 일어나는 거죠. 경제학이나 역사학이나 함께 그런 상황을 맞고 있다고 나는 봅니다. 패러다임 전환기 동안에는 많은 사람들의 암중모색이 진행되겠지만, 시야를 넓히고 균형을 찾는 것이 암중모색 중에서는 효과적인 모색이 되겠지요.

 

“당근과 채찍”이란 말을 흔히 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행동이 욕망과 두려움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이죠. 나는 ‘욕망’만을 쳐다보는 홉스의 관점을 넘어서기 위해 ‘두려움’(또는 ‘걱정’)을 함께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운명에 의해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입장에서 ‘두려움’도 인간 본질의 한 측면이라고 봅니다. 이것을 ‘욕망’과 짝지을 때 균형 잡힌 관점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최근 신경과학계에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위키피디아>에서 봤습니다. ("Changing stress levels can make brain flip from 'desire' to 'dread'". Mar. 19, 2008 http://www.ns.umich.edu/htdocs/releases/story.php?id=6419) 욕망과 두려움이 인간 두뇌의 같은 회로에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하네요.

 

‘두려움’을 시야에 넣는다면 ‘욕망’ 측면에 비해 독재정치의 범죄성이 더 잘 부각되겠지요. 인간을 짓눌러 인간 이하의 존재로 만든 범죄성을. 욕망과 두려움은 나란히 독재정치의 도구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사회의 더 나은 장래를 구상하기 위해서도 욕망의 진화만이 아니라 두려움의 진화가 함께 필요합니다. 환경과 자원 문제에 대한 적절한 대응은 욕망의 순화만으로 바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필요합니다. 전통사회가 신(또는 하늘)에 대한 두려움으로 틀을 오래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서문에서 “현재사”를 언급했죠. 책 말미, 마지막 문단에서 그 의미를 밝힌 것 같습니다. (책 뒷면에 서문에서 발췌했다는 글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는데 정작 서문에는 없더군요.)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아니다. 미래는 우리들 각자의 머리와 가슴에 이미 들어와 있다. 지금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시각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이 시간의 물결을 타고 나와 대한민국의 미래가 된다. 역사는 역사 밖에 존재하는 어떤 법칙이나 힘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만드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의지다.

 

“현재사”란 말을 한홍구 교수가 처음 쓴 것 같은데, 그 의미를 밝혀서 설명한 글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전 그의 책 <유신-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를 리뷰하면서 ‘현재사’에 대한 내 생각을 적은 일이 있죠.(http://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4209)

 

근대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근대적 가치관을 받아들일 압력 아래 늘 놓여있다. 그 안에서 활동하는 역사가는 근대역사학의 규범을 받아들일 압력을 받는다. 그런데 자신이 처해있는 체제를 수긍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다른 관점과 다른 길을 찾게 된다. 체제를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재’에 순응할 수 없고, 다른 가치관을 세우려 한다. 그런 입장의 역사가는 직업적 전문가의 입장을 벗어나 사마천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카의 널리 알려진 말을 다시 생각해본다. 이 말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맞서 있다. ‘과학적’ 근대역사학의 근거 중 하나인 역사의 ‘실재성’에 대한 믿음 위에서 ‘현재’와 격리된(대화를 통해서만 비로소 연결되는) ‘과거’의 존재를 카는 설정했던 것이다.

 

현재가 과거보다 좋아진 상태이고 미래는 현재보다 더 좋아진 상태가 될 것이라는 ‘진보’의 믿음이 근대세계를 풍미했다. 이 믿음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워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믿음에 지나침이 있을 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위험이 있다. 근대세계에서 자연조건의 제약을 무시하는 길로 나간 인간중심주의의 폐해에 대한 인식이 근년 확산되어 온 데서도 그 위험을 알아볼 수 있다.

 

나는 과거와 현재를 단절시키는 근대역사학의 풍조가 역사인식에 큰 장애가 되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 단절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단절과 나란히 이뤄진 것입니다. 따라서 유 선생이 생각하는 과거, 현재와 미래 사이의 연속성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동력을 “사람의 욕망과 의지”에서만 찾는 인간중심주의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홉스의 관점을 넘어서지 못하고 인간과 자연 사이의 연속성을 찾지 못한 것으로 봅니다.

 

홉스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유 선생은 “욕망의 진화”를 말합니다. 욕망의 범위를 좀 고상한 데까지 넓힘으로써 역사 발전의 동력으로서 ‘욕망’의 품위를 확보하려는 것 같은데, 글쎄요... 시야를 넓히려면 욕망에 너무 매달리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망 위계설’에 의지했군요. “망치를 가진 자에게는 모든 것이 못대가리로 보인다”는 멋진 말을 남긴 분이죠. 무척 호감은 가는 분인데, 그의 욕망 위계설이 의지할 만큼 든든한 것인지는? 주류 심리학계에서는 실증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외면하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고급 욕망의 내용이 근대서양문명의 가치기준에 따라 편향적으로 설정되었다는 비판도 있다더군요.

 

편지가 생각보다 길어졌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요약하고 끝내겠습니다. 욕망을 통해 사회를 보고 역사를 본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좋은 제안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만 봐서는 안 되겠죠. 통념보다 훨씬 고상한, ‘자기 존중’이나 ‘자아실현’까지 끌어들여 시야를 넓히려 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중심주의의 불빛이 밝을수록 인간이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는 오히려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두려움’ 같은 또 하나의 축을 도입해 시각을 입체화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속표지 사인 위에 “부끄러운 책을 드립니다.” 하고 적었군요. 마음에 없는 말 잘 못하는 유 선생인 만큼, 뭔가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아니면 부끄러움을 찾고 싶은 마음에서 적은 말씀이리라 생각합니다. 그 마음을 생각하면서 얼른 읽고 떠오른 생각을 한 차례 정리해 봤어요. 더 얘기할 것들이 많겠지만, 이 편지가 실마리가 되기 바랍니다.

 

김기협 드림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