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미군정은 경찰 인원을 크게 늘렸는데, 총독부 경찰 출신이 그 중핵이 되었다. 해방 당시 조선인 경찰이 8천 명 가량이었는데, 그중 약 5천 명이 미군정 경찰에 들어왔다 하니, 이남 지역의 총독부 경찰관은 거의 전원이 미군정 경찰로 이어진 셈이다.
같은 경찰이라도 악질 등급에는 차이가 있었다. 개인 출세를 위해 경찰이 되기는 했어도 눈치 보며 그럭저럭 경찰 노릇 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혼신의 힘을 다해 일본제국을 받들며 동족을 악착같이 탄압한 자들도 있었다.
경찰 지휘관으로 경무부장 조병옥 다음으로 거물 행세 한 것이 수도청장 장택상이었는데, 장택상 휘하에는 악질 간부들의 존재가 두드러졌다. 노덕술, 최운하, 최난수 등은 정판사사건과 여운형, 장덕수의 암살사건 등 정치적 사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경찰 간부들의 성분 분석을 치밀하게 해보지는 않았으나, 장택상이 악질 간부 챙기는 데 열심이었다는 인상을 한 평범한 경찰관의 회고에서 받는다.
재미있는 일이 하나 있어요. 이천에 왔다가 그 다음 안성으로 갔는데, 당시 서장이 가창현이라는 분이었어요. 충남 서산 사람으로 마쯔야마라는 개명을 썼는데, 알고 보니 서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를 했던 사람이었어요. 해방되고 고등계 형사들은 대부분 그만두었는데, 이 사람은 특이하게도 안성경찰서로 왔어요. 알고 보니 고등계형사를 하는 중에 수도경찰청장 하던 장택상 씨를 붙잡아 고문을 했던 자더라고요. 고문이라고 해봐야 별 거 아니고, 취조하다가 얼굴에 침을 뱉는 정도였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해방이 되니까 가창현이 제일 먼저 장택상 씨를 찾아가 큰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장택상은 역시 그릇이 큰 양반이라 “다 반성하고 잘해 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가지를 자르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경감 직위 그대로 안성경찰서장으로 보냈어요. 고등계형사가 다시 발탁되기는 그 사람이 처음일 겁니다. (문제안 외 <8-15의 기억>(한길사 펴냄) 228-229쪽, 홍순복 증언)
장택상을 “그릇이 큰 양반”이라니까 좀 우습기는 하지만, 보는 위치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자기가 필요로 하는 상대에게는 큰 도량을 보여주는 재주도 있었던 모양이다. 가창현은 1952년에 경무관으로 승진, 치안국 정보수사과장을 지냈다.
장택상이 조병옥에 버금가는 위세를 떨친 데는 심복이 된 악질 간부들의 공로가 컸다. 그런데 이게 웬 일? 그들 중 하나인 수도청 사찰과장 최운하가 비리 혐의로 경무부 수사국의 수사 대상이 되었다.
(...) 선거를 전후하여 잠잠해졌던 수사국은 수일 내로 근일에 드문 긴장한 공기 속에서 인천여자경찰장을 비롯하여 소금 먹은 경찰간부와 수도경찰청 통신과장 이주호 등을 연속적으로 송청하더니 17일 밤부터 다시 한층 긴장된 속에 돌연 수도사찰과장 최운하와 동대문경찰서장 박주식 등을 연일 극비밀리에 철야하여 취조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한편 수도경찰청에서는 매일 과서장이 구수회의를 열고 있다는 바 통신과장 이주호를 수사국에서 구속 송청한 이래 수사국과 도청 간에는 미묘한 공기가 떠돌아 세인의 주목을 받으면서도 침묵 중의 수사국은 숙청의 속도를 감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탐문한 바에 의하면 전기 최운하와 박주식은 직권을 남용하여 인권을 유린하고 거액의 수회를 한 일대 독직사건으로 수사국 숙청망에 걸려들은 것이라는 바 그 내용인즉 작년 10월경 서울 을지로2가 오리엔탈공무사 사장 강태섭(38)과 김용태(40)가 공동출자하여 청부공사를 한 결과 2천만 원의 이익금을 얻었는데 강태섭은 이것을 혼자먹을 흉계를 꾸며 수도청 사찰과장 최운하와 당시 종로경찰서장이던 박주식에게 거액의 금품을 주고 공작을 하기 시작하자 이에 매수당한 최운하와 박주식은 이것이 민사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강태섭의 청탁을 받아 사기죄로 몰아넣고 김용태 외 2명을 종로서 유치장에 20일 이상이나 불법감금하고 게다가 김용태에 이득금 반분의 권리까지 포기하라고 공갈협박하여 권리포기의 서약서까지 받아놓아 2천만 원을 강태섭에게 독점시킨 후 36회에 걸치는 향응을 받고 11월 14일 최운하는 현금 30만원 박주식 25만원을 받았으며 각각 시가 5만원의 양복도 한 벌씩 받아 입은 것이라 한다.
수사국에서는 인적 물적 증거를 잡고 준열한 취조를 한 결과 죄상이 판명되어 21일 오전 11시에는 민동식 판사로부터 영장까지 교부를 받았으니 송청은 시간문제라 한다. 이에 앞서 수사국장 조병설은 19일 서울지방검찰청을 방문하고 모종 의논을 하는 듯하더니 21일 오전에는 수도청장 장택상이가 역시 지방검찰청 청장과 차석검사를 만나고 돌아가는 등 자못 복잡 미묘한 공기 속에 사건은 진전되고 있는 모양이나 참다운 경찰의 확립을 위하여 모처럼 칼집을 벗어난 전가 보도에 기대는 크다. (...) (<조선일보> 1948년 6월 23일)
전형적 비리사건의 하나일 뿐으로 보이지만 뭔가 심상치 않다. 장택상의 심복이 저런 정도 일로 걸려든다? 장택상의 위상이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장택상은 6월 24일 이 사건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엄밀 조사 후 규명 - 최-박 양 경관 사건 수도청장 담”
수도청장 장택상 씨는 24일 기자단과 회견하고 수도청 내 간부 독직사건에 언급하여 다음과 같이 담화를 발표하였다.
“근일 중 각 신문지상에 수도청에 관한 부정확한 기사는 매우 유감된다. 배후에서 고의적으로 수도경찰의 강력한 조직을 약체화하려는 목적으로 이 같은 선전을 하고 있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본청 간부 중 독직사건이 엄연히 존재하고 또 취조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경무부장의 지시에 의하여 당연히 본청에서 취조할 사건으로 현재 취조 중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아닌 기사를 과장하고 증거 없는 보도재료를 조작하여 수도청장이 군정장관에게 불리었느니 게재 금지를 강요하였느니 하는 보도로 민중의 이목을 현혹케 함은 무슨 일인가.
법치국에서는 사건 문초가 결말을 짓기 전에는 추측적으로 피의자를 사직의 이목에 불리하게 하지 않는다. 시기심과 인기주의로 이와 같은 정보를 정당한 경로를 피하고 곡선을 밟아 민중의 이목이 될 보도계에 제공함은 매우 유감되고 양해키 어려운 일이다. 본청은 그 사건을 엄밀 조사하여 추호도 사건을 도호치 않고 처리할 것이며 그 사건 내용은 유감없이 우리 보도계에 제공할 예정이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25일)
“시기심과 인기주의” 같은 말은 조병옥을 겨냥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장택상은 이 사건이 “경무부장의 지시에 의하여 당연히 본청에서 취조할 사건”이라고 주장했는데, 며칠 후 경무부 수사국 이만종 부국장이 이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장 수도청장이 수도청 간부 독직사건에 대하여 지상에 담화 발표한 바에 의하면 그 사건을 엄밀히 조사하여 처리하겠다고 언명한 바 있으며 또한 수도청의 강력한 조직을 약화시키려는 모략이 배후에 개재하였다고 운운하나 동 사건은 상급관청인 수사국에서 적발 문초한 결과 인적 물적 증거로써 범죄사실이 역연히 판명되어 이미 검찰당국에 송청 심리 중임에 불구하고 재조사한다는 것은 하등 법적 근거가 없을뿐더러 더욱이 피의자가 수도청 간부임에 비추어 이해하기 곤란하며 이는 경찰의 명령계통을 문란시키는 동시에 전례 없는 해괴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경찰의 부패한 분자를 단호 숙청함으로써 도리어 명랑하고 강력한 진용이 엄존하는 동시에 민중이 기대하는 민주경찰이 구현될 것을 의심치 않는 바이다.” (<경향신문> 1948년 6월 27일, “재조사 권한 없다 - 부패분자는 단호 숙청”)
같은 날 <조선일보> 기사에는 이만종의 발언에 “서류가 수도청으로 간 것은 지난번 수도청장이 경무부장실에 왔을 때 참고로 본다고 가져간 것으로서 부장이 준 것도 아니요 따라서 사건이 수도청으로 이관된 것은 아니다.” 하는 한 마디가 더 붙어 있다. 장택상이 조병옥을 찾아가 항의하다가 관계서류를 막무가내로 들고 나왔단다. 장택상이 경무부의 기습을 당하고 검찰로 송청된 뒤에 쫓아가 뒷북을 친 것 같다. 아무튼, 경무부에서 이미 수사한 일을 지방경찰청인 수도청에서 조사하겠다니, 장택상은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최운하와 박주식이 불구속 상태로 송청되고(<경향신문> 1948년 6월 25일) 기소 역시 불구속으로 된 것은(<동아일보> 1948년 7월 4일) 그나마 장택상의 힘 덕분이었을까? 그런데 이 독직사건의 파장이 진행되는 동안 이와는 비교도 안 되게 끔찍한 상황이 장택상과 그 심복들에게 닥친다.
“드러난 수도청 고문치사 사건 전모 - 장살(杖殺) 후 사체유기 - 수사과장 등 어제 송청”
대 서울 장안 한복판에서 형사사건 혐의자에게 악독한 고문을 가하여 이를 죽인 다음 한강물에 띄워버린 천인공노의 전율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여 그 책임자로서 수도청 사찰과장 노덕술 등 간부를 경무부 수사국에서 문초 중이라 함은 기보한 바어니와 이 믿지 못할 사건이 노덕술 등의 자백으로 백일하에 사실화되는 동시에 26일 일건서류와 함께 폭행 능욕 상해치사 사체유기 죄명으로 일당은 구속 송청되었다.
사건의 내용은 이러하다.
금년 정월 24일 수도청장 장택상 씨를 저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수도청에서는 27일 그 혐의자로 박성근(25)이를 사찰과에서 체포하여 중부서 형사실에서 취조 중 수도청 수사과장 노덕술 동 사찰과장 최운하는 27일 오전 10시 취조 현장에 출두하여 소위 임화(본명 박성근)의 자백을 강요하기 위하여 노덕술 자신이 곤봉으로 난타 고문하여 중상을 입힌 후 다시 노덕술 지휘로 사찰과 부과장 박사일 수사과 부과장 김재곤 사찰과 경위 김유하 사찰과 경사 백대봉 등 4명에게 물을 먹이는 고문을 하라고 지시하여 드디어 사망케 하였는데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노덕술은 김재곤 박사일을 수도청 관방장실로 불러놓고 3인이 모의하여 도주를 가장키로 하고 박사일 등이 28일 오전 2시경 중부서 형사실 들창문으로 뛰어나가며 저 놈 잡아라 고함을 쳐서 다른 직원에게 임화가 도주한 것 같이 오인시킨 다음 박사일 김재곤이는 구급용 자동차에 시체를 싣고 한강으로 가 인도교와 철교 사이의 얼음 파는 구덩이에 집어넣어 버린 것이라 한다.
“책임자 인책 필요 - 수도청장은 부인해 왔다 - 수사국 조-이 양씨 기자단 회견 담”
고문치사 사건에 관하여 수사국장 조병설 부국장 이만종 양씨는 26일 오전 11시 기자단과 회견하고 다음과 같은 일문일답을 하였다.
문: 수도청 책임자는 이 사건을 아는가?
답: 알 것이다. 2월 3일 당시 경무부장이 직접 장 총감을 불러 고문 사실을 물었는데 그때 장 씨는 극력 부인하였다.
문: 사건 단서의 경위는?
답: 고문치사 했다는 노덕술의 진술로 취조에 착수했으나 장 청장의 부인으로 지금까지 내사해 왔던 것이다.
문: 책임자의 책임규명은?
답: 당연히 인책 사직해야 될 것이다.
문: 고문취조 경관을 수도청에서 치하했다는데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답: 2월 5일 오전 11시 수도청 회의실에서 고문치사에 관련한 직원과 현장을 본 기타 직원 등 14명을 불러 치하 훈시하고 최고 2만 원 최저 5천 원을 주었다.
문: 이런 사건의 빈발을 어떻게 보는가?
답: 고문하지 못하게 지시 단속하고 있는데 말단 제1선에서는 이 지시를 무시하고 있는 곳이 있어 여러분에게 미안한데 앞으로는 이를 계기로 철저 단속하겠다.
“노덕술 도주”
이 고문사건의 수괴라고 할 수도청 관방장 겸 수사과장 노덕술은 그 동안 경무부 수사국에 구금 문초 중이던 바 25일 수도청 부청장으로부터 신원은 책임질 터이니 잠시 돌려보내라고 요청한 바 있어 수사국에서도 사건 문초를 다 끝내고 돌려보냈는데 노덕술은 뻔뻔스럽게도 도주하여 종적을 감추었다 한다. 이에 수사국에서는 도주 사실을 탐지한 즉시로 전국 각 관구에 체포령을 내렸다 하므로 체포는 시간문제라고 보고 있다. (<경향신문> 1948년 7월 27일)
한 달 후에 있을 고문치사 사건 탄로 이야기를 미리 꺼낸 것은 지금 진행 중인 최운하 등의 비리 적발과 같은 맥락의 일로 보기 때문이다. 조병옥-장택상 간의 권력투쟁 맥락이다. 조병옥은 한민당 사람인데, 장택상은 이승만에게 매달린다. 한민당과 이승만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조병설과 이만종은 사건 단서를 묻는 기자들에게 “노덕술의 진술”이라고 대답했다. 짐작컨대 노덕술의 진술은 취조를 통해 새로 나온 것이 아니라 사건 당시부터 주변사람들에게 자랑삼아 해온 이야기일 것 같다. 사람 하나 죽여도 이렇게 끄떡없다고 자랑했을 것이다. 자기네 세상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사건 직후 조병옥이 장택상을 불러 고문 사실을 물었다는 이야기도 위 문답 중에 있다. 소문이 나 있었던 것이다.
경무부 수사국장과 부국장이 장택상을 놓고 “당연히 인책 사직해야 될 것”이라고 장담하는 데서 조병옥의 의지가 느껴진다. 조병옥은 6월 초부터 ‘독불장군’ 장택상의 제거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의지가 세워지자 수사국이 수도청을 정조준할 수 있었고, 고문치사 사건 관계자 중에서 진상을 폭로하는 ‘증인’이 나올 수 있었다.
1949년 1월 25일 새벽 노덕술은 효창동의 한 사업가 집에서 반민특위의 손에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운전기사와 무장경관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한다. 반민특위 부위원장 김상돈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경향신문> 1949년 1월 26일, “특위 활동 본궤도에 - 노덕술을 체포, 영등포서에 수감”)
“고문치사 사건으로 반년을 두고 잡으려던 것을 천하가 다 알고 있는 노덕술에게 무장경관이 공공연하게 배치되었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이다. 조사위원회에는 무기와 자동차가 없어 일을 못하고 있는 때, 노(덕술)는 자동차와 권총을 6정이나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재미삼아 뒷이야기 하나 붙인다. 노덕술이 체포 당시 경찰 자동차와 호위경관 6명을 대동하고 있다는 소문에 여론이 악화되자 서울시장 윤보선이 변명이랍시고 했다는 이야기다. (<동아일보> 1949년 1월 27일)
“내가 듣기에는 노덕술이가 가지고 있던 자동차는 경찰의 것이 아니다. 그 찝차에 ‘나쇼날 폴리스’라고 써있어 경찰책임자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찝은 노 씨가 경찰에 재직할 때 자기 소유의 찝차였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호위경관이 6명이나 있었다는 것은 실은 노 씨가 과거 3년 동안 경찰에 재직하였을 때 좌익을 탄압한 사실이 있어 그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경관 1명을 배치한 사실은 있다. 그리고 그 나머지 5명은 아마 사적으로 놀러갔던 것이 아닌가 본다. 어쨌든 그의 진상을 조사하여 발표하겠다.”
결국 이 고문치사 사건은 1949년 4월 29일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증인인 백대봉이 재판 막바지에 자취를 감췄고, 수사과정에서 백대봉에게 신변 보장과 경위 승진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의 증언에는 증거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경향신문> 1949년 4월 30일) 반민특위에 대한 반격이 준비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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