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3일 국회에서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헌위)가 30인 의원으로 구성되어 그 날로 활동을 시작했다. 헌위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전문위원 10인의 위촉이었는데, 그중 유진오 고려대 교수가 준비해 놓은 초안이 잘 준비된 것으로 인정되어 이것을 중심으로 기초위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유진오 초안의 특징은 아래와 같은 것으로 알려졌다.
1. 제1조에 “한국은 민주공화국으로 함”이라고 국체를 규정.
2. 민의-참의원제를 창설.
3. 제2장에 인민의 권리가 규정되어 있는데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동등 권리를 강화하고 “주권은 인민에게 있음”이라고 되어 있으며,
4. 대통령을 행정수반으로 하고 임기는 6년으로 되어 있으며 책임내각제로 되어 있음.
5. 3권분립을 명확히 하고 법률심사권은 대법원장에게 줌. (<경향신문> 1948년 6월 6일)
헌위에서 헌법 기초안을 결정해서 본회의로 보내면 본회의 토론에서 수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헌위 인원이 30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기초위의 결정이 본회의에서 번복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헌위에서 제일 먼저 결정해야 했던 것은 제1조에 나올 국호였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는 8일까지 본회의에 제출할 초안 작성이 앞으로 약 10일을 더 요하게 되어 8일의 본회의에 제출, 시일 연기를 요청하였거니와 지난 7일에는 하오부터 야반까지 유 씨 초안을 기간으로 하여 이에 사법부 내시(內示)를 기술적으로 참작하면서 축조토의를 개시 제1장 7조까지 완료하였다 한다. 즉 제1장 총강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국호 문제인바 당일 동 문제로 각 위원 간에 격론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표결한 결과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 1표로서 대한민국으로 낙착되었다 한다. 여기서 국호 결정을 위효한 헌위 동향을 보면 이청천을 비롯하여 독촉계에서는 의장 이승만이 개회 당일 식사에서도 대한민국을 천명하였고 그때 이의가 없었던 만큼 그대로 추진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 박사 주장을 지지하였다 하며 한민당 출신의원은 고려공화국을 역설하였던 것이라 한다. 하여간 헌법 작성에 있어서 그 지향이 주목되는 이때 헌위에서 대한민국의 국호 결정을 본 것은 앞으로 헌법구성 기준을 가히 추측할 수 있다고 하며 따라서 대통령제와 책임내각제에 대한 논전이 일층 백열화될 것으로 관측된다. (<조선일보> 1948년 6월 9일)
다음으로 심각한 토론이 벌어진 것은 정부조직에 관한 여러 사항이었다. 국회는 유진오 초안의 양원제를 1원제로 고쳤고, 대통령 선출은 국회에서 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1원제를 채택 - 대통령 선임방법에 논쟁 - 헌법기위 55조까지 기초 완료”
국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에서는 연일 분위를 열고 신국가 건설의 기초가 될 헌법 기초에 노력하고 있거니와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10일 분위에서는 전문위원 측으로부터 제출된 헌법초안 제5장 “정부” 제1절 대통령에 관한 조항 제55조까지의 기초를 완료하였다 한다. 그리고 특히 주목을 끌고 있던 제3장 국회구성에 관한 조항 제31조 양원제는 단원제로 할 것을 12대 10으로 가결하였다 한다. 또한 다음 53조 대통령선임에 관하여 보선(普選) 실시로 선출하느냐 또는 국회가 선출하느냐로 상당히 논의되었으나 결론에 도달치 못하였으며 허정(한민)의원은 보선으로 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다. 또한 현재 헌법 기초에 있어서 제일 주요한 헌법초안 제5장 제2절 내각제에 관하여 대통령책임제로 하느냐 국무총리내각제로 하느냐에 대하여 격론이 벌어질 것으로 예측된다 하는데 만약 대통령책임제가 헌법기초분과분원회에서 기초되는 경우에는 헌법을 초안한 전문위원은 전부 사임할 공기를 보이고 있다 한다. 그런데 유진오 초안과 사법부 측에서 제출된 초안은 전부 국무총리책임내각제로 기초되어 있다 한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2일)
국회의 양원제-1원제, 대통령 선출의 직접-간접선거에 대해서는 전문위원들이 초안을 제출했을 뿐, 헌위의 결정에 맡겼다. 그런데 내각책임제에 대해서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권력구조의 본질적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내각책임제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있었기 때문에 헌법 내용 중 가장 주목을 끄는 문제가 되었다.
“내각제는 찬성 못하나 국회서 통과되면 추종 - 이 박사 행동통일을 강조”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는 7일 오전 10시 시내 각사 기자단과 회견하고 8일부터 속개되어 상정될 예정인 헌법과 국회 내의 사상통일에 언급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정부 수립과 내각제에 대하여: 정부 수립 기한에 대하여서는 신국회에서 제반 문제를 처리함에 따라서 결정될 것인 만큼 여기선 나로서는 그 기일을 확언하기 곤란하다. 현재 기초 중인 헌법에 내각제는 국무총리를 둘 책임내각으로 되어 있으나 이것은 국회에서 결정할 것이며 나 개인으로는 미국식 3권분립 대통령책임내각제를 찬성한다. 유럽의 프랑스나 영국이나 혹은 일본에서 국무총리를 두는 책임내각제로 하는 (?) 대통령을 국왕과 같이 하는 신성불가침으로 하게 하는 것은 진정한 민주정체와는 좀 다른 것이며 이와 같이 하면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과 같은 독재정치가 될 위험이 있으므로 나는 찬성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국회에서 국무총리를 두고 책임내각제의 헌법이 통과된다면 나도 이에 추종하게 될 것이다. (...) (<동아일보> 1948년 6월 8일)
이승만의 추종자들도 이 얘기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이다. 프랑스, 영국, 일본 얘기하다가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은 왜 나오지? 분명한 것은 이승만이 대통령책임제를 원한다는 사실뿐이다.
“국회서 통과되면 추종”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가만히 앉아서 국회의 결정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는 6월 15일 헌위 회의에 임석해서 “직접선거에 의한 대통령책임제”가 현 정세에 적합하다는 의사를 표명했다고 한다.
“경제조항을 논의 - 헌법 85조까지 기초”
(...) 한편 국회의장 이승만 박사는 15일 동 기초회의에 임석하여 정부조직에 있어서는 대통령책임제를 채택할 것을 거듭 역설하였다고 하는데 이미 책임내각제를 규정한 이때에 동 초안이 그대로 본회의에 상정된다 하더라도 이 박사가 대통령제를 주장하는 이상 앞으로 정부조직 1조항을 중심으로 국회에서는 상당한 물론(物論)이 있을 것으로 일반은 관측하고 있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17일)
헌위의 초안 검토는 6월 15일에 일단락되어 6월 16일부터는 초안 전문이 신문에 게재되기 시작했다. 6월 19일에는 모든 토론을 끝내고 21일 본회의에 상정할 초안을 확정했다. 그런데 21일 본회의에서는 상정이 23일로 연기되었다. 그 경위가 이렇게 보도되었다.
“전원위원회 안 부결 - 헌법 상정 23일로 연기”
신생독립국의 기본법인 헌법 초안은 그동안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전문위원의 안을 중심으로 진지한 토의가 계속되어 오던 바 19일 제3독회가 종결됨으로 전문 105조가 완성되었다. 이리하여 헌법안은 21일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었으나 인쇄가 미비하다는 이유로 상정을 23일까지 연기하게 되었는데 측문한 바에 의하면 실상은 21일 본회의에서 의원 대다수의 반대에 봉착한 비공개 전원위원회 개최설과 관련하여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연기되었다 한다.
즉 첫째로 정부수립이 시급히 요청되는 이때에 헌법을 그대로 상정하여 의원들의 논쟁에 방치한다면 헌법 심의에 장구한 시일이 소비되어 정부수립에 지연이 염려가 있다는 점에서 공개회의 전에 대체로 조속한 심의방법을 강구해 보자는 간부의원 측의 견해인 것이다.
둘째로 앞으로 정식으로 심의될 때에 문제가 될 중요 조항 즉 국호 문제, 양원제 단원제 문제, 경제조항 문제, 정부조직 문제 등을 토의하기 전에 전원위원회에서 대체로 이에 관한 의견통일을 기하기 위한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정부조직에 있어서 원안에는 내각책임제로 되어 있으나 이승만 박사는 자초로 대통령책임제를 주장하여 왔으며 지난 15일에는 기초위원회에 임석하여 대통령제를 주장하였고 또 20일에는 헌법을 기초한 의원들을 이화장에 초청하여 그러한 문제 등을 중심으로 한 헌법 전반에 관한 토론을 하였다고 하며 헌법 심의를 위한 전원위원회 개최의 주장도 그러한 의도의 연장이라고 보이는데 결국 비공개 전원회의는 비민주주의적이라 하여 16차본회의에서 압도적 다수로 부결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1948년 6월 22일)
‘전원위원회’란 새로 제정된 국회법 제15조에 따라 설치된 것인데 유엔총회의 소총회처럼 같은 구성원으로 구성되면서 운영방법을 달리한 것 같다. 헌법안 토의를 비공개로 하기 위해 전원위원회를 활용할 궁리를 했던 모양인데 이것이 부결되자 인쇄 미비를 핑계로 상정을 연기해 놓고 상정 전에 상정할 초안 내용을 바꿀 공작에 들어간 모양이다. 결국 6월 23일 상정된 초안은 대통령책임제로 되어 있었다.
헌위에서 이승만의 ‘의사 표명’에도 불구하고 초안의 내각책임제를 지킨 데는 한민당 의원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5-10선거를 치르기까지는 이승만과 한민당이 한 뜻이었지만 이제 권력 앞에서 경쟁관계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가 아니면 대통령을 맡을 수 없다는 ‘벼랑 끝 전술’로 한민당 의원들의 뜻을 돌려놓았다고 한다.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역사비평사 펴냄) 30쪽)
국가원수로서 '대통령(president)' 제도를 처음 둔 나라는 1776년 독립한 미국이었다. 그 후 새로 독립하는 나라와 왕정을 폐지하는 나라에서 흔히 대통령제를 채택, 지금은 150개국에 이른다. 공화정을 시작하는 나라에서 대통령제가 인기 있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왕의 존재를 대통령이 대신해 주기 때문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하지만, 국민은 누군가가 과거의 왕처럼 포괄적 책임을 져주어야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제 국가 중에도 대통령의 역할에는 큰 편차가 있다. 선진국에서는 대통령의 권력이 크지 않다. 대개 국가 원수로서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나라는 대개 정치적 후진국들이다. 이 점을 놓고 보면 미국도 정치적으로는 후진국가다. 18세기에 만들어진 대통령중심제가 19세기에는 세계인의 선망 대상이었고 20세기까지도 큰 허물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21세기에는 미국 정치의 자산이 아니라 큰 짐이 되어있다.
대통령중심제의 근본적 폐단은 과도한 권력집중에 있다. 아무리 3권분립의 원리를 분명히 세워놓는다 하더라도 행정권의 현실적 힘이 다른 2권을 압도하기 쉽다. 전쟁선포권이 단적인 예다. 미국 헌법상의 전쟁선포권은 의회에 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개입한 수많은 전쟁에서 의회가 이 권한을 행사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최근 에드워드 스노든의 폭로 사태도 미국 권력구조의 병리적 문제를 드러낸 것이다.
미국의 절대적 영향 아래 진행된 대한민국 건국과정에서도 공론은 내각책임제로 모여 있었다. 이승만은 이 공론에 맞서 대통령책임제를 관철하기 위해 ‘현 정세’를 내세웠다. 원칙상으로는 내각책임제가 옳다고 인정하면서 당장의 상황 때문에 대통령책임제가 필요하다며 구걸하듯 얻어낸 것이다.
지난 65년을 돌아보면 대통령중심제가 이 나라에 혜택보다 재앙을 더 많이 가져온 것이 분명하다. 질 나쁜 인물이 권력을 쥐었을 때 해악이 엄청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괜찮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도 그 엄청난 권력에 따르는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모든 정치활동이 대통령선거라는 단판 승부에 집중되는 바람에 정치의 실질적 기능이 마비되고 순조로운 발전이 봉쇄되었다.
이승만이 내세운 ‘현 정세’가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일까? 이승만의 고약한 유산을 내다버릴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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