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에서 청년층은 장래를 담당할 세대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움직임을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의 하나로 당장 작용하고 있었다. 식민지체제 하의 조선인에게 교육의 기회도 경영의 경험도 빈약했기 때문에 기성세대의 지도력이 취약했던 것이 그 배경이었다. 착한 마음으로 새 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 기질의 젊은이에게도, 악한 마음으로 혼란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기주의 기질의 젊은이에게도 부형의 만류와 억제는 큰 힘이 없었다.

 

학교제도의 부실과 높은 실업률도 많은 청년들을 길거리로 내몰았다. 좌우익 정치세력은 이 청년들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일을 큰 사업으로 삼았다. 류상영은 “해방 이후 좌-우익 청년단체의조직과 활동” 맺음말에서 (<해방전후사의 인식 4> 99-100쪽) “좌익 청년단체는 조공-민전-남로당 등의 외곽단체로서 이들의 통일적 지도에 따라 정치활동을 전개”한 반면 “우익 청년단체는 (...) 단일 정치조직에 의해 통일적으로 지도된 것이 아니라 주요 우익 정치지도자들의 노선 분열에 따라 복잡하게 이합집산 되어 갔다.”고 대비했다. 좌익 청년들이 이념에 따라, 우익 청년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 경향이 비쳐진 대비다.

 

우익에 비해 이념을 중시한 좌익 청년운동에서도 청년들 자신과 사회의 미래를 기준으로 운동방법이 정해지지 못하고 정파의 득실에 따른 면이 크다. 현실이 긴박하고 몰지각한 지도자가 많기 때문이었다. 국립대 설치 반대를 명분으로 고등교육 중심부를 초토화한 ‘국대안’ 사태가 대표적인 경우다.

 

해방공간의 청년운동은 좌우 정치세력의 이용 대상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사회의 미래와 젊은이들 자신의 장래를 위해 교육과 훈련에 노력을 쏟는 자세가 정치적 청년운동에서는 전반적으로 부족했다. 이념보다 돈과 주먹의 힘을 중시한 우익 쪽이 더 심했다.

 

그런데 우익 쪽 청년운동 중에 이례적으로 교육과 훈련에 노력을 치중한 단체가 있었다. 광복군 지도자 출신의 이범석이 이끈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이었다. 이 단체는 불과 2년 남짓 존재했지만 대한민국 역사에 큰 자취를 남겼다. 족청 해산 후 30여 년이 지난 때까지도 어느 정치인의 위상이 부각될 때 나이든 분들이 “그 사람 족청계야.” 하는 말을 들었다. 해방공간의 우익 청년단체로서 예외적으로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했던 것이다.

 

“해방일기” 작업 중에 족청 소개도 넣어야겠다고 진즉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계기로 삼을 만한 특정 사건도 보이지 않고 참고문헌도 부족하게 여겨져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가 족청에 관한 사실과 의견을 잘 정리한 후지이 다케시의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역사비평사 펴냄)가 최근 나온 것을 보고, 특정 사건과 관계없이 족청의 존재와 특성을 설명해둘 필요를 느꼈다. 족청은 그 조직과 운영의 원리에 따라 현실 사건에 개입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 존재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1945년 11월 임정 환국 때 이청천과 이범석 등 광복군 간부들은 함께 돌아오지 않고 중국에 남았다. 광복군이 광복군의 이름으로 입국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분간 중국에서 광복군을 유지하고 있다가 더 적당한 시기에 인솔해서 들어오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끝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범석은 1946년 6월에, 이청천은 1947년 4월에 각각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이청천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중국에 들렀을 때 같은 비행기로 데려왔고, 기존 우익 청년단체들을 통합하는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이승만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반면 이범석은 미군정의 지원을 얻어 1946년 10월에 새로운 청년조직 족청을 세우고 독자노선을 걸었다. (무엇보다도 반탁운동에 나서지 않은 것을 이 시기에는 ‘독자노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군정의 족청 지원은 같은 시기 좌우합작의 지원과 같은 동기에 입각한 것으로 보인다. 1946년 5월 미소공위(제1차)가 무기정회에 들어갈 무렵부터 미군정 수뇌부가 조선 정계의 좌우익에 대해 단순한 2분법을 넘어 중도파와 극단파를 구분해서 응대하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극우파 대신 중도우파가 주도권을 쥐게 하고 좌익 탄압을 극좌파에 집중해서 중도좌파를 끌어들인다는 것이 미군정의 좌우합작 지원 목적이었다.

 

미군정 수뇌부는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족청의 설립을 반가워했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엄격한 기율을 추구하는 족청은 온갖 정치공작에 동원되던 기존 우익 청년단체처럼 치안에 위협이 되지 않았다. 둘째, 교육훈련을 중시하는 족청은 우익의 기반을 확충하는 착실한 장치로 보였다.

 

당시의 ‘극우’가 갖고 있던 기형적 성격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표방한 족청은 이념적으로 확실한 극우였다. 그런데 반탁운동에 나서고 있던 현실의 극우는 반동세력일 뿐이었다. 미군정은 이 반동세력의 친미-반공 구호가 구미에 맞아 진주 이래 그 힘을 키워줬는데, 민심의 이반 등 그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좌우합작 지원에 나선 것이었다. 좌우합작을 지원하면서도 좌익을 키워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미군정은 ‘정상적 우익’의 성장을 원했기 때문에 족청을 반긴 것이었다.

 

족청은 미군정의 방대한 물적 지원을 받으면서 미군정의 눈치를 보는 입장임에도 반 외세 성향을 강하게 보였다. 정치체제에 대해서도 자본가 독재와 무산자 독재를 모두 반대하는 주장이 강했다는 점은 극좌와 극우를 배척하는 주체적 노선으로 볼 수 있다. 해방 당시 조선인에게 이민족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주의와 경제적 불평등을 완화하려는 사회주의가 가장 강력한 염원이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족청이 가능성을 보여준 ‘사회주의적 민족주의’ 내지 ‘민족주의적 사회주의’가 유력한 대안으로 받아들여졌을 것 같다.

 

해방공간 남조선의 조직 활동 가운데 족청이 가장 탁월한 성공을 거둔 데는 확고한 민족주의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중간적 노선이 환영받았다는 점이 큰 작용을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1948년 8월 건국 당시까지 족청 단원 수는 백만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도 이름만 걸어놓는 단원이 아니라 초보적 훈련이라도 받은 단원이었으니, 구성원들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 조직으로는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이 다시 가져보지 못한 최대의 조직이었다(종교조직을 제외하고).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로 발탁된 것도 이 조직의 배경 위에서였다.

 

족청은 해방공간의 남조선에서 최대의 정치운동이었다. 그리고 극좌(공산당-남로당)와 극우(반탁-반공세력)가 휩쓸고 있던 남조선에서 강력한 중간노선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 정치적 유산에 기대할 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승만의 반민족적 반민중적 독재체제를 이념적-조직적으로 뒷받침해준 것 외에는 눈에 띄는 효과를 남기지 못했다. 어디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절반쯤 읽은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를 마저 읽고 생각을 더 정리한 뒤에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우선 밝혀둘 것은 이범석이 족청에 도입한 기본 이념이 파시즘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범석은 1939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중국국민당 중앙훈련단의 당정훈련반에서 훈련받은 일이 있었다. 중앙훈련단은 장개석이 교육훈련을 통한 국민당 간부층 양성과 전국적 조직 강화를 목적으로 만들어 스스로 단장을 맡은 역점 사업이었고, 당정훈련반은 그 핵심 과정이었다. “민족지상 국가지상”의 이념부터 훈련방법까지 이범석이 베껴서 족청에 도입한 사실을 후지이는 폭넓게 밝혀놓았다.

 

장개석의 중앙훈련단은 소련공산당의 간부 훈련제도와 독일-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조직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이범석이 1933년 봄(히틀러 집권 직후) 독일에 잠깐 체류한 일이 있어서 그때 나치즘을 접해봤을 수 있지만, 체류 기간이 너무 짧았다. 그의 파시즘 학습은 장개석의 국민당을 통한 것이라고 봐야겠다.

 

이범석이 장개석을 모델로 삼았다는 후지이의 설명이 무엇보다 실감나게 느껴지는 것은 이승만과의 관계에서다. 자신과 이승만의 관계를 장개석과 손문의 관계와 닮은꼴로 만들고 싶어 했다는 설명이다. 장개석은 손문과 삼민주의를 숭배의 대상으로 떠받들면서 자신은 그 실천을 위해 조직과 군대를 장악하는 역할로 내세웠다. 안호상, 양우정 등 이범석 주변의 이데올로그들이 이승만의 일민주의를 만들어줬는데, 장개석이 손문과 삼민주의 팔아먹은 것처럼 자신이 이승만과 일민주의 팔아먹는 날이 오기를 바란 것 아니겠는가. 정말 그럴싸한 설명이다.

 

이범석과 족청을 살피면서 한국사회의 파시즘에 대해 생각을 더 많이 할 필요를 느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파시즘’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말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파시즘은 전쟁 한 차례로 그 의미를 잃어버릴 존재가 아니다. 혼란스럽고 암담한 상황의 사람들에 대한 파시즘의 소구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1948년의 조선에서도 소구력이 있었고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도 소구력이 있는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