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선생과는 이야기를 길게 나누고 싶은 생각에서 고비 고비 서두를 생각을 하지 않는데, 이번 편지에는 답장을 서두를 생각이 드네요. 길이 번쩍~! 떠오르게 해드릴 자신은 없어도, 이 선생 생각을 넓힐 방향을 좀 짚어드릴 수는 있을 것 같아서요.
 
역시 학부 때부터 역사학을 전공한 내가 ‘복고’란 말에서 느끼는 함의가 사회과학으로 출발한 이 선생과는 꽤 다른 것 같네요. <황제를 위하여>를 나는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문열이 ‘복고’를 말했다면 역사학도로서 내가 생각하는 ‘복고’와는 다를 것 같습니다.
 
학부 때 따르던 선배 한 분에게 ‘호고지심(好古之心)’ 얘기를 들으며 감명 받은 일이 생각납니다. 한국 역사학이 근대역사학의 겁탈을 당했어도 한 가닥 전통의 순정을 지키고 있는 것이라 할까요? 근대적 가치관과 기준에 매몰되지 않고 전통적 선비의 자세를 지키는 한 모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고(古)’라는 글자에서 이 ‘호고지심’을 떠올리고, 그 때문에 ‘복고’란 말에서도 나름의 깊이를 느낍니다.
 
중국사에는 총체적 개혁(또는 혁명)을 위해 ‘복고’의 깃발을 휘두른 일이 여러 차례 있었죠. 왕망, 북주(北周), 측천무후... 그리고 마테오 리치의 보유론(補儒論)도 송학의 극복에서 개혁의 길을 찾으려 한 중국 학인들의 움직임에 호응한 것이라는 제르네의 학설을 내 학위논문에서 따랐죠. 성호-다산의 수사지학(洙사之學)에 대한 이을호 교수의 논고도 이에 맞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고’를 깃발로 휘두른 것이 평소에 ‘고’를 좋아하지 않던 태도를 갑자기 뒤집은 게 아니죠. ‘고’는 유교문명에서 원래 좋은 걸로 통하는데, 큰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평소보다 쎄게 나온 거죠. 역사의 진보에 대한 보편적 믿음을 가진 근대사회와 달리 발전보다 안정을 늘 앞세우는 유교사회에서는 변화를 제창하는 데도 ‘어정쩡한 고’가 아닌 ‘화끈한 고’로 가자고 표현해야 하는 수사적 프레임이 있었습니다.
 
유교사회에서 ‘공자의 가르침’은 근현대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맡은 것과 같은 역할을 맡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기나 바닷물 같은 환경의 역할, 용매의 역할이죠. 그 사회에서 나올 수 있는 어떤 물체(사상)도 담아주는 역할.
 
그런데 용매로서 두 가지 사이에 기본성격의 차이가 있다고 나는 봅니다. 유교의 용매는 발전보다 질서에 치중하는 이데올로기를 잘 담습니다. 발전 치중 이데올로기에 적합한 개인주의-민주주의는 급격한 기술발달에 의지한 팽창의 시대에만 수요가 있기 때문에 용매의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기간에 한계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죠.
 
21세기 초의 이 시점은 팽창의 시대가 아직 끝나지는 않았지만 한계가 뚜렷해지기 시작한 단계라고 봅니다. 팽창의 시대 안에서 태어난 근대사상은 그 어휘와 문법의 한계 때문에 더 이상 시대변화에 적응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통 속의 어휘와 문법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죠.
 
전통을 되돌아보는 동기가 알맹이를 찾는 데만 있는 게 아니라 국물(어휘와 문법)을 구하는 데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본주의를 지키고 싶은 사람들도 자본주의를 금후의 현실에 적응시키기 위해서는 원래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국물이 아닌 다른 국물을 필요로 하게 된 거죠. 건더기, 즉 질서 위주 이데올로기를 아직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전통의 국물을 떠먹게 되고, 자꾸 떠먹다 보면 건더기까지 떠먹게 되기 쉬운데, 그건 시간이 좀 걸리겠죠.
 
되돌아볼 전통으로는 유교 외에도 이슬람, 힌두이즘 등 여러 가지 있겠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유교가 가장 큰(아마 압도적인) 각광을 받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는 가장 큰 성공을 거뒀던 전통이라는 점. 또 하나는 질서 위주 이데올로기의 수요에 부응할 밑천을 잘 갖추고 있다는 점. 그래서 당분간 전통의 재발견을 얘기할 때 유교로 한정해서 얘기해도 큰 차질 없을 것 같습니다.
 
유교의 부활이 온다면, 그 과정에서 유교는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일 겁니다. 전통시대에도 여러 가지 모습을 보인 것처럼. 그중에는 자본주의 중흥을 위한 역할도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길지 않은 하나의 단계에 그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다고기를 민물에 옮겨놓아도 생존하는 종이 있기는 하지만, 크게 번성하지는 못하는 게 보통이잖아요?
 
나는 산업혁명으로 시작한 급격한 기술발전이 정돈상태에 접어들었고, 팽창의 시대라는 근대적 환경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따라 발전 위주 이데올로기가 질서 위주 이데올로기로 대체되어 가겠죠. 그러나 그 과정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어떤 단계들을 어떻게 겪어 갈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 참여를 가급적 회피하며 생각에만 잠겨 지냅니다.
 
이 선생 생각에서 절박한 느낌이 들어 나도 잘 정리되지 않은 채 바닥에 깔려있던 생각을 열심히 끄집어내서 늘어놓았습니다. 이 선생만이 아니라 블로그에서 보시는 분들도 이 양반이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참고만 하시고, 그대로 인용하는 일은 없기 바랍니다. 이 선생 다음 편지를 받기 전이라도 틈 나면 생각을 더 적어 보낼지 모르겠습니다.
 
생각이 막히고 글이 잘 안 풀릴 때는 약속한 원고도 펑크 내는 게 잘하는 겁니다.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한 쪽으로 환경이 변해가고 있는 것 같아요.
 
김기협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