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아내와 함께 영월로 향했다. 극히 막연한 희망이지만 산속으로 옮겨 살 희망을 일궈내기 위해, 그런 데 가서 살면 어떤 이들과 어떻게 어울리며 살 수 있을지, 정찰을 위한 하룻밤 여행이었다. 어제 만날 상대는 박물관의 박 관장님 부부와 이건화님 부부였다. 아내에게는 특히 이건화님 부부의 인상이 강렬했던 것 같다. 사실 나 자신도 '친구'라기보다 '지인' 수준으로 알고 지내던 이건화님을 보는 시각이 이번에 많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숙소는 백 교수에게 추천받아 예약해뒀다. 이건화님에게 추천을 부탁했다가는 자기 집 놔두고 돈 내고 잘 집을 추천해줘도 되는 건가, 입장이 난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제 저녁식사를 함께 할 형편이 된다는 사실만 미리 확인해뒀다.

 

점심 후 박물관으로 먼저 가서 수인사를 하고, 저녁식사 장소가 어디가 좋을지 의견을 청했더니 자기네 사택에서 고기 구워먹자고 한다. 마침 좋은 막걸리 재고가 넉넉하다며. 주천마을은 '다하누촌'이라 해서 고기집이 빽빽한 '구워먹기 체험관광' 명소가 되어 있다. 거기서 고기를 사오면 된다고 하기에 고기 한 가지만은 우리 부부가 제공하겠다고 고집을 세웠다.

 

세시반쯤 이건화님 집으로 갔다. 집 바로 밑 내가 차를 세워놓곤 하던 곳에서 포클레인 한 대가 움직이고 있었다. 꽃밭을 만들고 있단다. 조금 큰 화단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50평 정도) 자연 흙을 그대로 써서는 가꾸는 수고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바윗돌로 경계를 만들고 마사토를 까는 공사라고 한다.

 

세상에 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건화 님처럼 꽃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진짜 '사랑'이다. 그에 따르는 책임과 고통까지 알뜰히 갖춘 '사랑'이다.

 

무슨 얘기를 하다가도 그의 얘기는 꽃 쪽으로 흘러간다. 나는 꽃에 관해 아는 것도 적고 생각한 것도 적으니 얘기 상대가 되어주기 힘들다. 그런데 아내한테는 얘기가 잘 통한다. 아내는 어렸을 때 장인의 하방으로 산골 생활을 몇 해 한 적이 있어서 자연에 관해 아는 것이 꽤 많다. 풀 이름, 꽃 이름에 연변과 이곳 사이의 차이가 꽤 있지만, '저연의 문법'이랄까, 생각의 계통이 세워져 있다. 모처럼 얘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는 사람을 만나 이건화님도 더 신명이 났다.

 

다섯시쯤 먼저 일어서며 공사 빨리 끝내고 박물관으로 오도록 당부했다. 주천마을에 들러 고기를 사 갖고 박물관에 가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가 일곱시쯤 이건화님 부부도 도착해서 여섯 사람이 함께 앉았다. 산을 여간 좋아하지 않는 백 교수 내외가 인근의 산행에 관한 정보를 얻는 문답이 많았고, 이건화님 내외의 경험 진술에서 그들이 살아온 과정과 자세가 새어나오는 것을 우리 부부는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우리 숙소 얘기가 나왔을 때 그 집을 좀 시원찮게 보는지, 아니면 펜션 영업 행태를 못마땅하게 보는지, 이건화님이 말한다. "그런 데보다 우리 집에 묵으시지! 빈방도 있는데." 빈말이라도 이런 말엔 오금을 박아놔야 한다. "알았어요, 다음 올 땐 건화님 집으로 들어갈게요." 사실 빈말도 아니다. 빈말 잘 못하는 사람이다. 어제 오후와 저녁때 이야기를 나눠보며 우리 부부를 가족처럼 대할 사람으로 붙여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내의 식물학 소양과 순박한 태도가 점수 따는 데 결정적 요인이었겠지만, 내 동물학 소양도 한 몫 했다. 그 집에 진도개 세 마리가 있는데, 묶어놓은 위치에 따라 다른 성질을 보여준다. 현관 앞에 있는 녀석은 사교성이 좋은데, 몇 발작 건너편에 있는 녀석은 무척 사나운 기색이다. 그리고 그보다 십여 미터 아래 묶여 있는 놈은 때 아닌 털갈이가 진행 중으로 몰골도 지저분한데다가 심한 정서불안 기색이다.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그대로다.

 

십분도 안 걸려서 세 녀석을 내 손길에 평정시키는 걸 보고 이건화님도 탄복하는 기색이다. 잠깐 개 이야기를 하다가 아래 있는 어글리 녀석이 스트레스가 심한 것 같다고 했더니 그도 동의한다. 내가 자주 나타나면 개들의 정서 함양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저녁때 자기 집에 와서 묵으란 말 한 것은 막걸리에 취해서도 아니고 마음 없는 빈말도 아니라고 나는 굳게 믿는 것이다. 하루이틀 놀러와서 묵으라는 정도를 넘어, 집을 길게 비울 때 우리한테 연락하면 집봐주러 올 수도 있다고 하니까 부부가 모두 반색을 한다. 이것도 진심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

 

그 정도도 넘어섰다. 지금 꽃밭 만드는 아래쪽으로 몇백 평 판판한 곳이 있어서 비닐하우스도 한 동 만들어놓고 채소밭도 가꾸고 있다. 그곳을 떼어 팔라는 이들이 있는데, 자기는 그럴 생각이 절대 없다고 하기에 내가 끼어들었다. "그건 남한테 떼어줄 땅이 아니죠. 건화님이 거기다 행랑채를 지으세요. 우리가 전세들게요." 했더니 진짜로 눈을 반짝거리며 부인에게 그 길을 잘 검토해보자고 한다.

 

보름 전 왔을 때는 내 이름도 잘 기억 못하던 친구, 나로서도 강한 인상에 비해 그 생활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던 친구가 몇 시간 사이에 아주 가까이 느껴지게 되었다. 아내도 그 부부에게 호감이 가고 정이 이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도 출발 전에 그 집 가서 차 한 잔 하자니까 좋아서 따라나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 도시 탈출의 길을 전보다 넓게 열어준다. "이런 데 틀어박혀 살 생각은 절대 없어요. 하지만 형편 봐서 오락가락하며 절반쯤 여기 와서 지내는 건 괜찮아요." 이 글을 이건화님 내외가 보면 문을 너무 많이 열어준 거 아닌가 걱정할지도 모르겠다.

 

꽃을 450종가량 키우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많이 가서 지내게 돼도 그쪽으로는 얼마나 배우고 따라가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도 같이 놀 진도개 세 마리가 있을 것이고, 골짜기 건너편으로 내다보이는 산봉우리가 있다. 아침에 커피 마시면서 이건화님에게 이 집 처음 와서 잔 이튿날 아침 저 건너편 경치에 반했다고 하니까 빙그레 웃는다. "그렇죠? 정말 예쁘죠?"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