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프레시안>에 "진짜 종북주의자"들의 커밍아웃을 촉구하는 글을 올렸고, 더 최근에는 고종석 씨 책의 서평에서 고 씨가 "보수적 민족주의자"로 커밍아웃할 것을 촉구했다. "진짜 종북주의자"의 반응은 보지 못했는데, 고 씨의 반응은 피노팬님이 트위터의 글을 옮겨다 보여주었다.

 

고 씨의 반응에서 "진짜 종북주의자"들의 반응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 같다. 고 씨가 자신이 "보수적 민족주의자"임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는 것 같다. "보수적"까지는 좋은데, 꼭 "민족주의자"라고 이름붙일 필요가 뭐 있냐는 얘기로 들린다. 내가 규정하는 "민족주의자"란 별 쓸모가 없을 정도로 넓은 범위를 가리키는 것인 만큼, 그 규정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내가 생각하는 "진짜 종북주의자"들도, 우리 같은 보통사람들을 "~주의자"로 규정할 필요가 뭐 있냐는 생각을 대개 할 것 같다.

 

고종석 씨는 "민족주의자"를 "위엄의 자리"로 본다고 한다. 존경도 받고 책임감도 가지는 지도자의 자리라는 뜻일 텐데, 물론 내가 생각하는 "민족주의자"보다 좁은 범위를 말하는 것이다. 온갖 인간들이 "민족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온갖 폐단을 일으켜 온 풍조를 생각하면 "민족주의자" 타이틀의 남발을 꺼리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이해가 가고도 남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해방일기> 작업을 하면서 '보통사람'들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안재홍이 "위엄의 자리"를 사양하고 이승만과 김구의 영도력에 기대려 한 것이 보통사람의 마음이다. 이승만이 사이비 지도자였음은 다시 말하기도 입이 아픈 일이고, 지도자로서 김구의 자격은 어떠했는가? 그는 안재홍보다 큰 위엄을 갖춘 지도자였지만 그가 안재홍보다 나은 역할을 수행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지도자의 위엄(요새 말로 '카리스마'에 가깝겠지.)보다 보통사람의 자존심이 세상을 위해 더 필요한 것이라는 사실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하는 일이 많은 것 아닐까?

 

극우와 극좌는 명분과 별개의 실리를 노리는 사람들이었다. 감춰진 목적을 갖지 않은 보통사람들의 입장이 중도파(중간파)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 현상인 것 같다. 어느 사회, 어떤 상황에서나 구성원의 다수는 이런 입장에 선다. 이런 입장이 정치에 잘 반영되는 것이 훌륭한 민주주의이며,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늘리는 길이기도 하다.

 

20여 년 전 유럽에서 지낼 때 취향이 비슷한 그곳 친구들이 지도자의 위엄보다 매력을 더 생각하는 것을 이곳의 권위주의 분위기와 다른 차이의 하나로 여겼다. 지금 생각하면 권위주의만의 문제도 아니다. 스스로 보통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표현을 꺼리는 풍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딱 짚어서 말하기 힘들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20세기 내내 식민통치와 독재통치 아래 그런 풍조가 강요되었다. 직접적 강압이 사라져도 계속되는 '자기검열'의 한 형태로 내면화된 것이라 할지...

 

민족주의건 종북주의건(나는 '중북주의'가 더 적절한 표현이라 생각하지만)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상식적 차원의 이유로 끌리는 것이라면 소신으로든 이념으로든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식민지시대와 독재시대는 보통사람의 의견이 거의 완전히 묵살되는 시대였다. 그래도 지금은 어느 정도 통할 수 있게 된 것 아닌가?

 

지난 주 강연회에서 열혈노인 한 분이 "저자와 같은 생각을 써서 발표하는 분이라면 지금 구치소에 앉아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지금 여기 앉아 있는 겁니까?" 물어서 청중을 웃게 했는데, 나는 어리버리하게 "저는 세상이 좋아진 줄 알고 마음놓고 쓰고 있었는데요?" 대답해서 한 차례 더 웃겼다.

 

나는 정말 세상이 많이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좋아진 의미를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음미하지 못하기 때문에 못 볼 꼴이 아직도 많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와 같은 소박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하자고, 우리 생각을 스스럼없이 표출하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청할 생각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