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보다 먼저 손가락을 보라.”


“손가락을 보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보라”고들 말한다.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근-현대 세계에서 역사학이 맡아 온 역할을 생각하면 이 말을 뒤집어 하고 싶다. “달을 보지 말고 그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라”고.


역사 사실을 손가락에, 역사관을 달에 비유해 말하는 것이다.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선택된 역사관을 뒷받침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역사적 사실을 바라볼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 근대역사학의 분위기였다. 언제 어디서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역사의 연구와 교육만이 사회의 지원을 받았고 그 반대의 경우는 억압을 받았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가 함께 겪어온 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라는 것은 민족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한국사) 자유민주주의의 궁극적 승리를 믿도록(세계사) 강요하는 내용뿐, 인간의 사회가 어떤 속성을 가진 것인지 진지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었다. 다른 나라 경우도 지키는 내용과 막는 대상이 무엇이냐 차이가 있을 뿐, 절대적 ‘신념’과 ‘결의’로 울타리를 쳐서 사람들의 관점을 편협한 방향으로 묶어놓고 외부와의 대화를 단절시키는 역할을 역사교육이 맡아왔다.


손가락을 무시하고 달만 쳐다보라는 구호는 파시스트와 근본주의자들에게 너무 많이 이용당해 왔다. 손가락이 왜 달을 가리키는지, 그 구체적 사연을 살피지 못하게 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세계는 다른 자세를 모색해 볼 계기를 맞고 있다. (<역사의 원전>(바다 펴냄) “역자 후기”에서 발췌)


안철수의 주식 사회 환원을 놓고 “기부라는 행위 그 자체보다는 그 이면에 숨은 정치적 의도를 과잉 해석하기에 급급한” 언론보도에 대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때, 그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것”이라고 하는 논평을 봤다. (한귀영, “안철수 대통령! ‘희망’ 혹은 ‘망상’?”)


비유가 좀 이상하다. 달을 못 보고 손가락만 본다는 것은 행위 자체만을 보며 그 행위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이야기 아닌가. 정치적이든 뭐든 의도를 해석하려는 것은 달을 보려는 노력이다. 한귀영의 뜻은 지나친 해석이나 비뚤어진 해석을 경계하는 데 있는 듯한데, 달과 손가락의 비유는 거꾸로 된 것 같다.


굳이 그 비유를 쓴다면, 달에만 정신이 팔려 손가락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 문제로 봐야겠다. 안철수의 기부는 매우 희한한 행위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희한한 행위다. 의도를 해석하기에 앞서 이 행위의 특성을 정확히 이해해야 지나친 해석이나 비뚤어진 해석을 피할 수 있다.


이 기부행위의 특성은 여러 각도, 여러 층위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겠거니와 나는 자발적이면서 규모가 크다는 점을 가장 두드러진 특성으로 본다.


이 사회에서 자발적 기부는 많이 행해진다. 몇 만 원 정도 기부를 일상적으로 하는 이들은 독자 중에도 많을 것이다. ‘프레시앙’ 회비에도 기부의 성격이 있다. 마음이 크게 움직이면 허리띠 졸라맬 생각 하고 한 달 생활비쯤 내놓는 일도 적지 않다.


그런데 자발적 기부가 억대를 넘어서는 일은 우리 사회에 극히 드물다. ‘기부’라는 명목으로 억대 이상의 금품을 내놓는 일은 거의가 다 부득이해서 하는 것이다. 이명박과 이건희의 재산 출연이 대표적인 사례이고, 예전에는 ‘준(準)조세’란 말도 널리 쓰였다. 그러다 보니 곽노현이 누구에게 억대의 돈 준 데 대해 그 지지자들까지 눈살을 찌푸리는 일이 많았다.


대규모의 자발적 기부가 없다는 것! 안철수의 기부가 특이한 일이기에 앞서 한국만큼 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큰 기부’가 이토록 없다는 것이 정말 특이한 사실이다. 소규모 기부가 널리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로 보면 사회 전반의 도덕성이나 심성에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억대 이상 내놓을 능력이 있는 계층의 사회를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나는 본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니 뭐니 그럴싸한 이름 갖다 댈 필요도 없이, 사회의 혜택을 많이 보는 유력계층이 덜 보는 계층보다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더 많이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덕성 이전에, 자기네 유리한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도 사회의 안정성을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한국의 유력계층은 안보(security)에 대한 책임감이 없다. 대외적 안보, 내부적 안보, 양쪽을 다 말하는 것이다. 한국 지도층은 안보를 일본이나 미국에 맡겨놓고 지내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완전한 독립국이라고 할 수 없다.


안철수의 기부행위에서 다른 의미도 읽을 수 있지 모르나 내가 보기에는 이 안보불감증에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의미가 크다. 안철수의 기부를 보며 “아! 내가 속한 사회를 위해 저런 행위도 할 수 있는 거구나.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더 열심히 찾아봐야겠다.” 깨우침을 받은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이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어 왔나, 더 넓고 깊은 반성이 이뤄지기도 할 것이다.


어떤 문제가 있어 왔나? 이명박 정권의 사고방식을 대표하는 뉴라이트 이데올로그들은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는 명제에 집착한다. 이 명제는 몇 해 동안 자기충족적인 방식으로 실현되어 왔고, 그 결과 이런저런 게이트가 줄 서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 사회를 아끼는 정상적인 태도는 병신 동네에서 병신 취급 받는 꼴이 되었다. 안철수의 행동에 우리가 얼마나 놀라고 있는가? 진짜 ‘사회 환원’ 한 번 봤다고 이렇게 놀라는 우리 사회, 진짜 이상한 사회다.


정작 생각하면, 천억대 재산을 내놓았다는 사실 이전에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이 이 사회에서 그만한 재산을 모았다는 사실부터가 놀라운 것이다. 정직하게 살아서는 큰 권력도 큰 재산도 쥐어볼 수 없다는 것이 이 사회의 상식이다. 남부끄러운 일 않고 천억대 재산 모았다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는 기적과 같은 일이다. 그만큼 큰 재산으로 그만큼 당당한 재산이 오늘의 한국에 다시 있을 것 같지 않다.


그 당당한 재산의 절반을 뚝 잘라 사회에 돌려보내는 것이기에 놀랍고 충격적인 것이다. 이기주의 인간관에 대한 명쾌하고도 강력한 반증이다. 박원순에게의 후보 양보와 합쳐져 이 반증의 뜻이 더 분명하고 힘이 더 강한 것이다. 정치적 의미가 매우 큰 행동이다. 개인의 행동으로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동의 하나로 남을 것이다.


한귀영은 안철수의 행동을 ‘달’로 보고 정치적 의도를 ‘손가락’으로 보았다. 정치적 의도를 나쁜 것으로 보는 잠재의식과 손가락을 덜 중요한 것으로 보는 잠재의식이 합쳐진 결과 같다. 내 보기에는 두 가지 잠재의식을 모두 벗어나야 안철수 행동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정치라는 직업 또는 활동이 존경보다 멸시의 대상이 된 가장 큰 까닭이 제로섬게임 내지 마이너스섬게임의 성격에 있다. 이것은 정치의 바람직한 성격이 아니다. 한국 정치가 총의 힘 또는 돈의 힘에 억눌려 사회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에 빚어진 성격이다. 그래서 멀쩡한 사람도 정치판에 휩쓸리면 망가지거나(물이 들면) 바보 되는(물이 안 들면) 일이 꼬리를 물고 벌어진다.


정치에 대한 사회의 불만이 한계점을 넘는다 싶으면 ‘물갈이’를 한다. 그 정도로 안 될 것 같으면 ‘판갈이’를 한다. 지금 안철수가 행동으로 제안하는 것을 더 차원 높은 ‘틀갈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아예 ‘얼갈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안철수는 이번 기부가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것을 실천한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했다. 그럴 것 같다. 정치적 행동보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던 일이 저절로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목적으로 기획된 행동보다 그 함의(含意)가 크고 충격이 강한 것이다.


<안철수 경영의 원칙>을 읽어보지 않았지만 한귀영의 소개를 봐도 정치를 향한 안철수의 의지가 읽힌다. “왜 사람들이 모여서 일할 필요가 있는가?” 자문에 “한 사람이 할 수 없는 크고 의미 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여럿이 모여서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자답. 그는 자신의 개인적 행동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참여를 바라는 것이다. 그게 바로 정치다. 아주 제대로 된 정치다.


안철수의 행동은 한국 사회에 다양한 방법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김부겸의 대구 출마 선언도 그런 사례의 하나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30여 년 전의 만남을 통해 나는 김부겸의 인간적 품성과 정치적 이념에 경의를 품게 되었다. 그 후 그의 활동 소식을 통해 그가 망가지지 않은 사실은 확인하면서도 가끔은 그가 바보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다. 최소한의 역할은 지키고 있지만 합당한 존중을 받지 못하는 채로 생존에 급급한 느낌까지 받는 것이다.


그가 떨치고 일어나 대구로 향한다니 속이 다 후련하다. ‘유의미한 득표’ 이상을 그 자신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대단히 하고 싶은 일이리라고 나는 짐작한다.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일에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내는 일,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도 안철수에게서 확인한 것이 아닐까?


안철수가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한귀영의 논평에 깊이 공감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보기 드물다고 하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도 생각하는 대로 사는 편이고 한귀영도 그런 편으로 보인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 사회에 비뚤어진 압력이 너무 많고 커서 그 본성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생각이 형편에 얽매이는 추세가 있기는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본성을 마음껏 펼치지는 못하더라도 잃어버리지 않고 있다. 안철수의 정치적 행동에 성공의 희망을 가지는 것은 이 사람들이 본성을 펼칠 계기를 준다는 점에 있다.


행세하는 사람들 중에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보기 드물다는 것은 사실이다. 오홍근이 말하는 “그레셤 법칙의 나라”에서 안철수가 그만한 성공을 거둬 왔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에 틀림없다. 그 위치에서 안철수는 신분과 재력을 함께 하는 ‘또래’들에 동화하는 대신 세계관과 인생관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그의 정치적 성공을 가름할 일차적 지표는 그가 일으킨 영감을 공유할 사람들의 범위에 달려 있다.


안철수 얘기를 입에 올린 이상 그가 대통령이 될지 안 될지에 대한 의견도 밝히는 것이 독자들에 대한 도리일 것 같다. 다들 궁금해 하는 일이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모른다. 다만 그가 대통령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 마음만 밝힌다.


안철수는 서울시장 선거에서 ‘불용지용(不用之用, 실제로 쓰이지 않으면서 쓰임새의 가치를 지킴)’의 의미를 보여줬다. 박원순이 더 잘할 사람이라며 양보했는데, 실제로 박원순의 경험과 인맥이 서울시장직 수행에 더 적합하게 맞춰져 있는 편이었다. 안철수가 맡는다 해서 박원순보다 꼭 못하라는 법은 없지만 그는 ‘군자불기(君子不器, 군자의 역할은 특정한 영역에 제한되지 않음)’의 경지를 택한 것이다.


대통령에도 더 잘할 사람이라고 안철수가 양보할 만한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품성과 능력이 대통령직에 적합하면서도 기존 역학관계 때문에 그 직에 접근하기 힘든 인물이 안철수의 도움으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었으면. 그러면 안철수도 편안한 생활을 계속 누리면서 동시에 이 사회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직책 없이도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