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70세인 대만의 완미주(阮美姝) 여사는 피아노연주, 그림, 소설, 각 방면에서 일가를 인정받은 바 있는 특이한 예술가다. 그 완 여사가 연전 타이페이의 한 건물에 사재로 ‘2-28 문물실(文物室)’을 만들면서 화제를 모았다.


60여 평의 문물실을 채운 자료는 완 여사가 1947년 3월 12일 아침 집을 나간 후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 완조일(阮朝日)의 행적을 찾는 과정에서 20여 년간 수집해 온 것이다.


아버지가 2-28로 희생된 사실을 어머니가 극구 감춰왔기 때문에 완 여사는 70년 일본에 체류할 때에야 일본 문헌을 통해 비로소 2-28의 진상과 부친이 ‘반란수괴’로 체포되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완 여사는 행여 부친이 아직 살아있지는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조사작업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근년 2-28 진상규명운동이 일어나자 개인의 문제를 뛰어넘어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뜻으로 문물실을 차린 것이다.


1947년 초, 공산군에 밀리고 있던 장개석 정권은 대만에 최후의 거점을 구축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장개석의 심복인 대만 행정장관 진의(陳儀)는 폭압통치로 주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2월 28일 대규모 평화시위의 유혈진압으로 시작된 사태 속에 수만 명 주민이 학살당했다.


국민당정권은 이 일을 ‘공산폭동’으로 규정, 일체의 논의를 금해 왔다. 80년대 들어 민주화 바람 속에 진상규명과 희생자의 복권-보상 요구가 일어났다. 지난 달 사태 50주년을 맞아 타이페이 중심부에서 새로 준공된 기념관의 개관식과 2년 전 세운 기념비의 제막식이 열린 것은 이 운동의 결실이다.


이 비석은 그 동안 ‘무문비(無文碑)’였다. 여론에 밀려 비석을 세우면서도 당시 정부측 책임을 명시하는 문제로 본문을 확정할 수 없어 본문을 비워놓은 채 비석을 세웠던 것이다. 이번에도 기념일 이틀 전에야 겨우 명각작업을 끝냈지만, 결국 책임문제는 명시되지 않고 말았다.


개관식과 제막식에는 연전(連戰) 행정원장이 참석하고 이등휘(李登輝) 총통은 초연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완미주 여사가 작년 9월에 총통으로부터 받은 개인편지를 얼마 전 공개하고 그 편지에 담긴 총통의 곡진한 뜻이 알려지자 총통의 어쩔 수 없는 입장을 이해하는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느리지만 확실한 과거청산의 길에 접어들었다고 대만 시민들은 믿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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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