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남짓 <해방일기>에 매달려 있다 보니 그 카테고리에만 노력이 편중되어 다른 내용이 빈약해졌다. 얼마 전부터 블로그 찾아오는 손님들께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찾아오는 분들도 예전보다 흥겨운 마음이 덜할 것이다.

이런 사정이 앞으로 1년 가량은 계속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다. 내년 이맘때쯤 되면 <해방일기>는 말년 농땡이 단계에 접어들고 <동아시아의 20세기>로 비중이 옮겨갈 텐데, 그쪽은 이야기 범위도 넓고 하니 블로그 내용의 균형도 제법 맞게 될 것 같다.

그 1년 동안을 위해 <미국인의 짐> 카테고리 만들 생각을 했다. <프레시안>에서 박동천 교수와 얘기를 주고받다가 책을 다시 꺼내 보게 되었는데, 10년 전에 쓴 글이라도 지금 독자들에게 보이고 싶은 것이 많다. 원고지 5-6매의 짤막한 글들이니 들르는 분들이 부담없이 훑어보다 보면 더러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있을 것이다.

책으로 냈던 아이필드 유 사장에게 전화해서 블로그 게재에 대해 양해를 넘어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사실 책보다도 블로그 연재가 더 적합한 성격의 글이기도 하다. 원래 일간신문에 한 꼭지씩 올려 읽히던 글이니까. 이 글을 한결같이 아껴준 유 사장에게 감사하며 그 아끼는 마음이 더 많은 손님들에게 나눠지기 바란다.

낚시터에 앉으면 떡밥부터 푸는 법이니 오늘은 1997년 초봄 시작 단계의 글 몇 꼭지를 한꺼번에 올린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매일 한 꼭지씩 꾸준히 올리도록 노력하겠다. 더러 그 동안 <페리스코프>의 "10년 전으로" 시리즈에 활용한 꼭지들도 있는데, 여기서는 원래의 글만으로 다시 내놓을 것이다.

책의 머리말을 여기 붙인다.




나는 중국사를 전공하면서도 중국보다 미국에서 나온 연구서를 더 많이 읽었다. '학문적'으로 적절하고 요긴한 내용을 더 잘 포착하고 잘 서술해주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중국 출신 연구자들 중에도 미국에 건너가 활동하는 이들 중에 좋은 업적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온 분야가 중국사 연구만이 아님은 물론이다.

10여 년 전 교수직을 물러나면서 역사만 파고들던 공부에서 벗어나 오늘의 세상을 공부하는 길로 나아갈 마음을 먹었다. 신문과 잡지에 글을 쓰면서 정치-경제-문화-사회-과학 등 전 분야로 관심을 넓히는 동안 얕고 얇게, 그러나 넓게 세상 보는 눈을 키우려 애썼다. 몇 해 그러다 보니 관심이 저절로 모이는 방향이 떠올랐다. 미국이었다.

몇 해 동안 쓴 칼럼을 모아 책으로 묶으려니 스스로 돌이켜봐도 정말 기웃거리지 않은 동네가 없다. 그러다 보니 제목을 뭐라고 붙일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이렇게 초점 없는 일을 내가 해왔던가, 속으로 탄식하며 모아놓은 원고를 뒤적이다가 아래 글이 눈에 잡혔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을 책의 제목으로 삼기로 했다
.


미국인의 짐

<인디펜던스 데이>, <딥 임팩트>, <아마겟돈>, 지구의 위기를 다룬 영화들이 줄줄이 들어오고 있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만들고, 흥행에도 큰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관객 동원에 짭짤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미국인이 지구를 구한다는 것이 내용상의 공통점이다. 냉전에 승리하고 세계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의 위상이 한껏 부풀려져 있다. 뛰어난 자본력과 기술력이 악과 재앙에 홀로 대항해 인류를 지켜주는 미국의 밑천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힘만으로 위기를 넘기지 못하는 한계점에서 기적을 불러오는 묘약은 동료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휴머니즘이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불굴의 개척정신이다.

<아마겟돈>에서 석유채굴업자를 영웅으로 내세운 것은 그럴싸한 선택이다. 자본력과 기술력, 그리고 개척정신을 아울러 대표하는 직업으로 더 나은 것이 있겠는가. 그러나 휴머니즘을 이 직업에 갖다 붙이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었던 모양이다. 아비보다 애인을 딸에게 남겨주는 편이 좋겠다는 갸륵한 결단도 어색하지만, 부녀 간의 마지막 통화를 위해 인류의 운명은 멈추어놓은 채 관객에게 감동 먹이려 안달하는 노력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영화들이 그리는 인류의 위기가 외계인이나 소행성 등 외부의 것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현실 속에서 높아지고 있는 인류의 위기의식은 내부의 문제를 염두에 둔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심각해지는 환경 문제란 바로 맹목적인 개척정신으로 자본력과 기술력을 무절제하게 휘두르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역사학자 알렉산더 거센크론은 후진국의 독재자가 내부의 모순을 호도하기 위해 외부로부터의 위헙을 과장하는 패턴을 설명한 바 있다. 냉전이 끝난 후에도 인종 문제, 종교 문제 등으로 대외적 긴장을 고조시키려는 경향이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거듭 수긍이 가는 설명이다. 얼마 전까지 북풍이 몰아치던 이 나라에 이제 햇볕정책이 자리 잡아가는 것은 후진국 정치 행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반가운 징조다.

뛰어난 자본력과 기술력으로 만든 웅장한 화면 위에 내부의 문제를 외부의 위협으로 덮어버리는 프로파간다가 더 큰 스케일로 펼쳐지고 있다. 세계 정복에 나선 유럽인이 인류를 야만으로부터 구원하겠다고 내세운 '백인의 짐(White Man's Burden)'이 바로 19세기 휴머니즘의 기조였다. 할리우드가 내세우는 '미국인의 짐'에서는 그만한 휴머니즘의 냄새도 안 난다. 그래도 '짐' 얘기 하는 걸 보면 뭔가 정복에 나선 모양이다
.


'미국인의 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존재해 왔으며 소련 붕괴 후 더 부각되었고, 지금의 부시 정권이 들어선 후 더욱 무겁게 느껴지고 있는 짐이다. 미국인에게만 무거운 것이 아니다. 미국 밖의 많은 사람들에게 더 부담이 되고 있는 짐이다. 우리도 지난 가을 이후의 이른바 북핵 위기 속에서 그 무게를 크게 느끼기 시작한 짐이다.

지금 사람들의 관심은 '세계 경찰'을 자임하며 '예방 전쟁'을 주창하는 미국의 '전쟁광' 측면에 모여 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면에서 멀쩡한 나라가 전쟁 하나에만 광분하는 증세를 보일 수 있을까? 미국이라는 나라의 병리적 현상은 포괄적 고찰을 필요로 한다.

미국은 문명 발전의 모든 측면에서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좋은 측면이든 나쁜 측면이든. 이것이 바로 '미국인의 짐'이다. 미국이 개발하는 기술과 제도 그리고 미국이 겪는 병리적 현상, 양쪽 다 얼마간의 시차를 두고 다른 나라들에 전파된다. 그 시차는 전체적으로 계속 짧아지고 있으며, 우리나라는 전파 시차가 그중 짧은 나라의 하나다.

깊이 따져보면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이 별개의 것일 수도 없다. 양쪽 다 하나의 문명 발전 방향에서 파생되는 것일 뿐이다. 좋은 것만 배우고 나쁜 것은 버린다는 취사선택에는 근본적 한계가 있는 것이다.

미국이 보이는 병리적 현상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라 온 세계가 걸려가고 있는 질병을 앞장서서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 비판과 평화 운동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문명의 진행 방향을 총체적으로 반성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미국인의 짐'에 감사해야겠다.

19세기 당시에 '백인의 짐'은 하나의 숭고한 이념이었다. 유럽 문명 발전의 열매 가운데 '힘'만으로 세계를 정복할 것이 아니라 '도덕'으로 세계를 감화시키자는 주장이었다. 갸륵한 주장이었지만, 그로 인해 세계가 더 좋은 곳이 되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지금 별로 없다. 오히려 위선의 상징으로 매도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백인의 짐'은 왜 실패했는가? 문명 진행 방향에 대한 근본적 반성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인도주의자들은 유럽 문명의 발전 방향에 제국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는 신뢰를 가지고 있었고, 스스로를 그 문명의 '좋은 대표자'로 자임했을 뿐이다.

19세기에 비해 지금은 문명 진행 방향의 근본적 반성이 가능한 상황이다. 문명의 주체가 상당한 범위로 확산되어 있어서 가해자와 피해자, 시혜자와 수혜자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한국처럼 중간 수준의 산업화를 이룩한 나라는 여러 나라에 대해 가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가 하면, 시혜자가 되기도 하고 수혜자가 되기도 한다.

'미국인의 짐'은 미국인이 앞장서서 지고 있는 것일 뿐, 지금의 문명 세계 전체에 얹혀 있는 짐이다. 미국을 지지한다고 해서 이 짐이 행복의 보따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미국을 반대한다고 해서 이 짐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짐이 왜 생긴 것인지 철저하게 따져보아, 피할 수 없는 짐이 확실하다면 가능한 한 나도 괴로움을 덜 겪고 남에게도 덜 끼치면서 함께 지고 갈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문명의 진행 방향을 바꿔 이 짐을 아주 없앨 수는 없을까? 다른 방향을 잡더라도 그에 따른 짐이 어떤 것이든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100여 년 전에 비해서는 대안을 생각할 수 있는 폭이 크게 넓어졌다. '문명의 짐'으로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 '더 나은 세상'을 찾는 길에서 핵심이 되는 질문일 것이다.

'미국인의 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정한 고수(高手)  (0) 2011.11.23
꿈 만드는 기계 (97. 3. 30)  (0) 2011.11.23
황제의 꿈 - 人治와 法治 (97. 3. 23)  (0) 2011.11.23
진보의 액셀러레이터 (97. 3. 16)  (0) 2011.11.23
臺灣의 과거청산 (97. 3. 9)  (0) 2011.11.23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