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 소 내 용

박정희의 딸 박근영은 2005년 2월 말에 서울 중앙 지검에 독립기념관장 김삼웅과 도서출판 아이필드 사장 유연식을 고소하였다. 고소내용은 출판물에 의한 사자(死者)의 명예훼손, 그 불씨가 된 것은 류연산 저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아이필드 2004년 2월 출판)에서 서술한 박정희에 대한 문장이다.
이 책에서는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교편을 잡고 있다가 1939년 말에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 입대하며 이듬해 신경육군군관학교에 추천을 받아 들어갔고 1944년 모범생으로 공부를 마친 그는 다시 특설부대의 장교로 열하성에서 중국 항일부대인 팔로군 토벌에 참가했다고 씌어 있다.
그런데 고소자는 박정희가 문경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직접 시험을 쳐서 만주군관학교로 들어갔고 1944년 4월 20일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그 해 7월 중국 열하성에서 근무했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독립군을 때려잡는 간도특설부대에 입대한 사실이 없으므로 명예훼손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서 조갑제 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와 정운현 저 <<군인 박정희>>의 내용을 제시한 동시에 보조증거자료로 연변대 박창욱 교수의 육필 증명자료와 연변동북아경제문화연구소 최용린, 이동만의 자술서를 제시하였다.
이만하면 박근영씨는 이미 타계한 자기의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법정에 당당히 나설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2 창작과 출판 경위

필자는 1995년 7월 요녕성 심양 요녕민족출판사에서 주재덕선생을 취재했다. 주재덕선생은 간도조선인특설부대 출신이다. 그는 특설부대에 입대하여 박정희가 안도현 대사하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공을 세운 덕분에 신경육군군관학교에 추천받아 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고 열하성에서 팔로군 토벌을 할 당시 박정희는 자기의 직접 상급이었고 팔로군에 기의하여 넘어가려고 했을 때 그도 가담했다고 했다.
그것을 취재한 다음 필자는 간도조선인특설부대와 박정희에 대한 글을 써서 1999년 중국에서 발표를 했고 2002년 12월 호 <<말>>에 다시 수정하여 투고하였다.
2003년 <<말>>에 연재를 끝내면서 아이필드와 출판을 약속했고 출판을 앞두고 당시 성균관대 교수로 있었던 김삼웅선생을 만나 책의 내용을 대체적으로 이야기하고 나서 추천사를 부탁했다.


3 박정희 간도특설부대 소속설

박정희가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 있었다는 설은 20세기 80년대와 90년대 연변역사학계의 정설이다.
1987년 5월에 <<내부자료>>로 발간된 <<겨레의 발자취>>(제1집 안도현 조선족 역사 발자취 총서 편찬실)에 게재된 <<주구무장대의 죄악 - 간도특설부대의 죄악사>>(140페지)에는 다섯 번째 부분에서 <<혁명에 가담한 사람, 대통령으로 된 사람>>이라는 소제목 아래 특설부대 제4기병 안기완이가 토벌대에서 도망하여 광복 후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한 사실과 한국 대통령이 된 박정희를 대비하여 서술하였다.
박정희에 대해 이 책에서는 이렇게 서술했다.

<<박정희는 간도특설부대 중대장급 군관이었다. 그는 해방이 되자 국세가 혼란한 때 하북지대 조선청년들을 묶어 세워 조선의용군에 들어가려 탄원해 나섰다. 그러나 받아주지 않자 곧추 남조선으로 내달아가 그 뒤 우익세력을 긁어모아 나중에는 대통령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 그가 해방이 되자 조선청년들을 묶어 세워 조선의용군에 가입하려 한데는 투기적인 일면도 있지만 조선독립을 위한 일면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제149페지)

이 책은 1986년 2월 안도현 각계의 대표들로 조직된 안도현 조선족 역사 발자취 총서 편찬 영도소조에서 발간한 첫 자료집이다.
1991년 7월에 발간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제4집 <<결전>>)에는 <<악명 높은 간도특설부대>>(276페지)라는 제목의 글에서도 박정희는 간도특설부대 중대장급 군관이었다고 기술하면서 <<그는 해방이 되자 시세에 편승하여 하북지대 조선청년들을 묶어 세워 조선의용군에 참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받아주지 않자 곧추 남조선으로 내뺐는데 그 뒤 우익세력을 긁어모아 나중에는 대통령으로까지 되었던 것이다.>>(제281페지)라고 명백히 기술하고 있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의 편집위원들은 무려 65명이나 되는데 연변대학 총장이 주임을 맡았고 그 외의 모든 위원들은 전국 각지에 있는 조선족 학자들로 구성되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중국 조선족역사연구에 있어서 가장 방대하고 가장 신빙성이 있는 자료집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므로 박정희의 간도특설부대설은 연변역사학계에서 공동으로 인정한 정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박정희 특설부대설의 현존근거

박정희가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 있었다는 것은 중국에 생존해있었던 특설부대 출신들의 증언에 의해 성립되었다. 바로 필자가 만난 주재덕선생이 그 중 한 분이다.
그리고 제일 처음 박정희가 특설부대에 있었다는 설을 내놓은 차상훈선생 역시 특설부대 출신들의 증언에 근거한 것이라고 증명하고 있다. 1962년 동북사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한 차상훈선생은 1983년부터 1994년까지 안도현 정치협상회의 문사자료판공실 주임을 담당했던 분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는 공산당 위원회에서는 선진인물에 대한 연구를 하고 정치협상회의에서는 반면 인물과 반동조직에 대한 연구를 하는데 문사자료판공실이란 바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까지의 적대세력에 대한 연구를 맡아하는 기관이다. 그러므로 차상훈선생은 당시 안도현의 역사의 진실한 면모를 밝히는데 특별한 공헌을 한 사람이다. 그 분의 말에 의하면 특설부대에 있었던 사람들한테서 박정희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한다.
당시 <<겨레의 발자취>>(제1집) 책임편집을 담당했던 이룡득(李龍得)선생의 말에 의하면 이 책을 편집하면서 박정희의 문제가 제출되자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편찬위원회 분들과 함께 다시 생존한 특설부대 출신 분들의 모임을 가지고 재확인 작업을 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특설부대 출신의 분들이 생존해 있지 않다. 그러나 그 후손들과 그 분들과 접촉했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 박정희는 특설부대 소속으로 남아 있다.
조선족문단의 대표적 시인이신 조룡남선생의 형님 역시 특설부대의 출신이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문화대혁명 때 투쟁을 맞아 세상을 떴다. 그는 자신이 광복과 함께 한국으로 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면서 <<박정희대통령도 우리 부대에 있었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다.
그렇다면 박정희는 언제 특설부대로 왔을까? 주재덕선생은 1939년 말에 안도에 와서 특설부대에 참가했고 항일연군 제2군 제6사의 소속인 최현부대에 의해 대패하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특설부대 대원 중 하나이며 전투의 공로로 무공장을 탔고 신경육군군관학교에 추천을 받아 갔다고 했다. 그쯤에 간도조선인특설부대에서는 16명이나 되는 부대원들을 뽑아서 각종 군관학교에 추천하여 보내기도 했었다. 그리고 군관학교를 졸업하자 다시 특설부대에 왔다고 했다.
안도 명월구에 조일(朝日)사진관이라고 있었다. 그 곳에서 광복이될 때까지 사진사로 있었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항일연군 석동수(광복 후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으로 있다가 김일성의 부름을 받고 북한으로 건너갔음)가 부상을 입었을 때 박정희의 도움을 받아 천인당약방에서 구급약을 사다 주었다고 한다. 일제시기 약은 특별공제품이었다. 특히 항일연군이 출몰하는 안도현 일대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므로 일본군이나 일본경찰의 도움이 없으면 약을 살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석동수가 부상을 당했을 때가 1939년 말경이다. 그리고 그 사진사의 아들의 회억에 의하면 1944년 봄인가 가을인가 박정희가 아사이사진관에 와서 사진을 찍으면서 자기의 부친하고 <<나나 당신이나 모두 조선사람입니다. 민족을 잊지 맙시다.>>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때 박정희는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동전을 꺼내 주더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또 자기의 외숙이 경영하는 간도냉면옥으로 식사를 하러 온 박정희를 보았다면서 외모파기를 자상히 말해주었다. 지금도 안도에서는 박정희가 생소한 인물이 아니다.
그 외에 간접적으로 증명을 할만한 학자들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5 박정희 간도특설부대 부정설

박정희가 간도특설부대에 있지 않았다고 하는 주장은 지난 세기 90년대 말부터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주장의 근거는 기록이 없다는 것으로 아주 빈약하다.
그렇다고 박정희가 특설부대에 있지 않았다는 역사적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박정희가 특설부대에 있었다는 것은 특설부대 출신들의 증언을 통해서 이루어진 설이다. 그렇다면 우선 먼저 간도특설부대설이 조작된 것임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와 함께 했던 특설부대 출신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그 주장을 펴는 학자 역시 일찍 간도특설부대설을 믿었던 사람들이다. 특설부대 출신들이 생존해 있었을 때에는 그들의 구술을 믿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다가 썩 후에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박정희에 대한 한국의 주장을 받아들였다고 본다.
만주에 있을 당시 박정희는 보잘 것 없는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역사의 기록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에 가서 별을 따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만큼 현대사연구에 있어서 구술자료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 아닐 수 없다.


6 박정희 따님의 변명

박근영은 고소에서 박정희는 특설부대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을 사실화하기 위하여 중국에서 증인들을 찾는 노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박창욱교수도 <<조선민족발자취>> 총서의 부총편으로서 당시에 차상훈선생이 쓴 박정희와 관련된 특설부대에 관한 글을 총서의 제4집 <<결전>>(민족출판사 1991년 7월 출판)에 그대로 게재하였다는 것은 그 분도 그 설에 동감이었음을 말해준다. 만약 그 분이 당시에 스쳐버렸다고 하면 그것은 학자로서의 엄숙성을 잃은 것이고 그 당시에는 그것을 믿었으나 그 후의 연구를 통해 그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면 그 설이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조작되었는지 하는 전 과정에 대해 부정할만한 근거를 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용린 연변대 부교수는 조선어문학부에서 역사와는 먼 과목을 강의했던 사람이고 이동만은 기업인으로 학술과도 먼 사람이다. 이 두 분의 증명은 오히려 박근영씨한테는 혹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혹 떼러 왔다가 혹을 붙이고 간 셈이다.
지금까지 조선족 역사학계에서 박정희의 특설부대설을 부정할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학자는 없다. 그렇다고 일본관동군 목단강부대에 있었다는 주장을 펴면서 그럴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한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간도조선인특설부대 역시 일본군 목단강부대 소속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가 목단강부대라고 해서 특설부대와 갈라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사실을 명기하기 바란다.
만약 고소자의 주장대로 박정희가 특설부대가 아니고 목단강부대가 특설부대하고 관련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박정희가 일본관동군 군관으로서 열하에서 팔로군 토벌에 참가한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러므로 특설부대에 있지 않았다고 하는 고소자 박근영이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일본관동군 군관으로 친일행위를 했던 치욕에 대한 변명은 성립되지 않는다. 특설부대에 있었든 없었든 고소자가 말하는 명예훼손은 가당치도 않다.
박정희의 친일은 그 부대의 소속이 달라진다고 해서 달리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박정희가 특설부대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명예훼손으로 한다면 박정희가 다른 일본군에 있으면서 항일군 토벌을 한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중국에 생존했던 신경육군군관학교 박정희의 동창들의 회상에 의하면 박정희는 중국인 동창들의 눈에 날 정도로 학교 내에서 모범생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주재덕선생의 회상에 의하면 박정희는 하북성 전각장, 동전각장, 주가장전투에 참가했고 팔로군 선전원과 부상을 입고 백성의 집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구장을 체포하여 정보반(주재덕선생은 정보반장이었음)에 넘겼다고 한다.
그리고 주재덕선생이나 차상훈선생의 글에서나 그리고 다른 증언자들의 말은 박정희에 대해 무조건 부정하고 있지 않다. 박정희는 팔로군에 기의(起義)하려고 했고 광복 후에는 조선의용군에 참가하려고 했고 안도에 있을 때에는 약도 구해주고 민족을 잊지 말자는 말도 했다는 등 박정희의 이중성에 대해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필자 역시 <<일송정 푸른 솔에 선구자는 없었다>>에서 들은 그대로 박정희의 이중성격을 기술했다.
반공으로 친일을 미화하던 때에 관동군 출신들은 공공연히 팔로군 토벌을 자랑으로 떠벌여 왔다. 그러나 오늘 날 당시의 반공의 실질은 친일이라는 역사의 진실 앞에서 다시 궤변을 부리고들 있다. 그러나 종이로 불을 쌀 수 없다.
가랑잎으로 얼굴을 가리는 것은 오늘 날 일본 극우세력들의 비열한 수단이고 동시에 친일파들의 일관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이나 친일파의 변명은 똑같은 맥락이다. 그리고 일본군국주의가 전쟁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듯이 어느 친일파가 국민 앞에 사과를 한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 어느 자손이 부끄러워한 적이 있는가? 오히려 재산찾기에 분분하고 명예훼손을 부르짖고 있지 않는가?
박정희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공과는 자손과는 무관하다. 박정희의 공을 내들고 자식이 영광을 누려도 안되고 박정희의 과오로 말미암아 그 자손한테 책임을 추궁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오늘 죽은 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고소하는 것을 보면 분명 그 따님은 그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죽은 아버지의 한 단락 역사를 가지고 호들갑을 떨기 앞서 자신의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는가 하는 데 대해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부전자전이라는 말의 뜻을 박정희와 그 따님을 통해서 통감한다.
2005년 5월 7일




박정희가 특설부대에 있었든 없었든 일제시기 일본군에서 있었던 박정희의 한 단락 역사의 성질을 개변시킬 수는 없다. 똑같은 일본제국주의 침략군의 성원이었고 일제의 침략의 수요에 의해 전선에서 싸웠던 것이다. 그러므로 특설부대설을 가지고 박정희의 명예훼손죄를 운운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반공으로 친일을 미화하던 때에 박정희는 스스로 공공연히 팔로군 토벌을 자랑으로 떠벌여왔다. 그러나 오늘 날 당시의 반공 역시 친일이라는 역사의 진실 앞에서는 그 후손들이 극력 회피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종이로 불을 쌀 수 없다.



분명히 박정희는 독립군을 잡는 일에 참가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자원하여 일본군에 참가하였다. 중국에서는 친일파를 획분할 때 일본군에 참가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는데 강제징병 이전과 이후로 갈라본다. 강제징병 이전에 참가한 것은 자원적인 친일이고 강제징병 이후는 어쩔수 없는 친일로 본다. 박정희는 자원적인 친일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는 신경육군군관학교에서도 모범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참가하여 독립군 토벌에 열성을 보였다.
이 면에 대해서는 박정희 생전에 전체 한국 국민 앞에 고백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박정희의 광복전의 수치스러운 역사를 미화하여 한국 교과서는 대통령께서는 인류의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주의 보다 공산당을 소멸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자각하고 일본군 소위로서 공산당 토벌에 앞장섰다는 식으로 기술한 바 있다.

5 박정희는 친일파인가?

박근영의 고소의 중심은 박정희는 독립운동가를 잡은 적이 없다는 것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다. 박정희는 독립운동가가 아닌 공산당 토벌에 나선 일본군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공산당이 당시 중국에서는 항일군이다. 고소자의 표현을 든다면 항일독립군인 셈이다. 1937년 국민당과 공산당이 일치단결하여 항일을 시작하면서 조직된 부대가 팔로군이며 이 팔로군이 공산당이 영도하는 부대이다. 바로 열하에서 팔로군이 활동했던 것이며 일본관동군 목단강부대는 1944년에 열하에 파견되어 팔로군 토벌에 참가하였다.


6 박정희의 특설부대설은 법적 재판으로 해결될 문제인가?

만주국시기 박정희의 일본관동군 역사는 학술문제이다. 학술을 통하여 규명되어야 할 역사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학술문제를 법정에 끌어들이는 것은 역시 박정희자신의 일인독재의 수단이 아닐 수 없다. 천부당 만부당한 것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