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답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집단적 결정에 이르는 사회적 과정”은 빠질 수 없는 본질적 요소다. 이 본질적 요소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데 오늘의 한국 정치에 많은 사람들이 혐오증을 갖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사회의 현실을 개선하고 장래의 걱정거리를 줄이기 위한 중요한 과제들에 관한 합리적-실질적 토론보다 진영 논리와 색깔 논쟁이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 정치에는 ‘양극화’의 문제가 있다. 진보 쪽에서든 보수 쪽에서든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의 범위를 너무 넓게 잡는 경향을 말하는 것이다. 양쪽 입장 사이의 토론과 절충을 통해 최선의 진로를 모색하려는 노력이 적고 “밀리면 끝장”이라는 강박 아래 정치의 장을 싹쓸이판으로 만들려는 추세가 있다. “집단적 결정에 이르는 사회적 과정”을 원만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어느 쪽 노선이 옳고 그르냐를 떠나 이런 극한 대립으로는 효과적인 결정 과정 자체가 이뤄지지 못한다.

극한 대립처럼 보이는 이 현상에 적대적 공생관계의 측면이 있다. 두 세력이 상대방 세력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반사이익으로 일정 범위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 공생관계로부터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토론과 절충의 길을 막음으로써 공생관계를 고착시키려한다. 그들은 상대방 세력 전체를 ‘좌빨’ 또는 ‘수꼴’로 부른다. 대체로 ‘좌빨’ 딱지 남발하는 사람을 ‘수꼴’로, ‘수꼴’ 딱지 남발하는 사람을 ‘좌빨’로 볼 수 있다.

공생관계의 이익을 얻는 ‘수꼴’과 ‘좌빨’은 양쪽 세력의 일부 구성원일 뿐인데, 공생관계가 지속되는 것은 그들이 양쪽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헤게모니 장악이 튼튼한 큰 까닭이 역사적 배경에 있다고 나는 본다. 60여 년 전 해방공간에서 극좌와 극우 사이의 적대적 공생관계가 맺어진 이래 긴 세월을 통해 굳어져 있는 것이다.


해방 당시 조선인의 정치적 취향은 사회주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군국주의 일본의 통치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에 바탕을 둔 취향이었다. 우익을 표방하는 정당도 중요 산업의 국유화와 토지 소유구조의 획기적 변화 정도는 내세우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

사회혁명의 필연성을 믿는 노선을 좌익, 믿지 않는 노선을 우익이라 하겠는데, 그 사이의 경계선은 애매하다. 좌익이 추구하는 ‘혁명’과 우익이 추구하는 ‘개혁’ 사이의 차이를 확연히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점진적 변화를(혁명이든 개혁이든) 추구하는 중도파를 즉각 혁명을 주장하는 극좌파 및 혁명뿐 아니라 개혁조차 외면하는 극우파와 구분해서 보는 것이 보다 유효한 관점일 수 있다.

당시의 조선에 민의를 수렴하고 집행하는 민주주의 제도가 작동하고 있었다면 극우파와 극좌파의 입지는 매우 좁고, 중도파 안에서 정책노선이 토론되고 절충되었을 것이다. “집단적 결정에 이르는 사회적 과정”이 작동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제도는 주어져 있지 않았고 점령군의 힘은 너무 강했다.

극좌파와 극우파는 숫자로는 소수였지만 매우 강한 집권 의지, 또는 매우 큰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이었다. 그들은 점령군의 힘을 이용해 중도파를 지지하는 다수 국민의 염원을 봉쇄하는 온갖 책략을 구사했다. 극좌와 극우는 표면상으로 서로를 가장 적대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중도파의 입지를 탄압하고 봉쇄하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

이 노력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사례가 ‘찬탁’과 ‘반탁’의 깃발이다. 중도파의 입장은 신탁통치에는 반대하되 모스크바 3상회담 결정은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극우파는 신탁통치에 반대한다면 3상회담 결정을 전면적으로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극좌파는 3상회담 결정을 지지한다면 신탁통치에도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 가지 입장(<3상회담, 신탁통치 모두 반대> <3상회담 지지, 신탁통치 반대> <3상회담, 신탁통치 모두 지지>) 중 중도파가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았지만, 극좌와 극우는 온갖 수단을 써서 중도파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해방공간을 통해 중도파의 입장을 꾸준히 지킨 대표적 인물이 여운형과 안재홍이다. 두 사람은 해방 당일 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함께 활동을 시작했으나 불과 두어 주일 만에 좌초하고 말았다. 극우파는 풍부한 자금력으로 한민당을 만들어 우익 인사들의 건준 참여를 견제했고, 극좌파는 강한 조직력으로 건준에 침투해 모험주의 노선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 좌절을 딛고 중도 성향의 인민당과 국민당을 만들어 이끌었다.

두 사람은 1946년 봄에서 가을까지 진행된 좌우합작 회담에도 함께 나섰다. 그러나 두 사람의 정치적 기반은 계속 파괴되어 갔다. 안재홍은 우익 통합을 위해 1946년 4월 국민당을 한독당에 합당시켰으나 한독당 노선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그 자신이 이듬해 6월 제명당하기에 이른다. 여운형은 1946년 8월 좌익 통합을 제창했으나 박헌영 일파의 프락치 작전으로 인민당 자체가 먼저 쪼개지고 말았다. 여운형은 남로당 통합을 거부한 좌익 세력의 사회노동당에 참여했지만, 좌우대립의 격화 속에서 사회노동당의 힘은 과거 인민당과 비할 수 없이 미약한 것이었다.

좌우합작 이후 1947년 7월 여운형 저격 때까지 두 사람이 함께 일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사실에서 중도파의 활동 여지가 사라져버린 상황을 읽을 수 있다. 1946년 가을까지의 좌우합작 회담은 미군정의 요구와 지원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므로 미군정의 필요를 넘어서는 성과를 바라볼 수 없는 것이었고, 그 뒤를 이은 ‘한미공동회담’도 미군정의 결정에 성과가 일방적으로 매달려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미군정에 의존하던 중도파의 입지는 1947년 3월 트루먼 독트린으로 미국의 반공-반소 정책이 확립됨에 따라 사라지고 말았다.

안재홍이 해방 직후 힘을 기울여 작성한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는 당시 조선인에게 닥친 정치적 과제에 대한 담론의 실마리로서 의미를 가진 것이었다. “집단적 결정에 이르는 사회적 과정”으로서 정치가 조선에 나타나려면 논의되지 않으면 안 될 주제였다. 그러나 이 담론은 현실정치에 나타나지 않았다. 현실정치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아니라 폭력과 책략에만 좌우되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진정한 정치의 출현을 가로막은 적대적 공생관계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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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의 민세 콜로키움(민세 안재홍 선생의 '중도' 가치 재조명 및 정신 계승 / 21세기 한국의 사회통합과 '중도' 정신의 의미 계승)에서 발표할 내용 구상입니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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