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을 응락하는 메일에 적어 보낸 구상입니다.]


오늘 마음속으로 생각을 좀 더듬어봤습니다.

"한국 민족주의와 <친일인명사전>"이란 제목을 떠올려봅니다.

내용은 세 개 파트를 생각합니다.

 

(1) 한국 민족주의의 위기


식민지시대의 수동적 민족주의를 벗어나 독립민족으로서 능동적 민족주의를 개발하는 과제에 실패해 온 것을 저는 한국 민족주의의 약점이라 생각합니다. '수동적'이라 함은 피해자 입장에서 나(我)와 남(非我)의 대립관계로만 민족문제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능동적'이라 함은 인류사회의 일원으로서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를 입체적으로 파악하고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잉민족주의(hyper-nationalism)는 패권주의를 분식한 사이비 민족주의입니다. 한국 민족주의가 실질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식민지시대 민족주의의 틀 속에 과잉민족주의가 서식하게 된 것입니다. 권력자의 대중조작 수단으로 활용되는 과잉민족주의로 인해 민족주의 자체가 혐오의 대상이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세계화의 진행으로 인해 민족주의의 의미를 폄하하는 추세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민족주의의 중심 역할을 맡아야 할 양심적 지식층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추세입니다. 지금까지 한국 민족주의가 시대에 맞는 능동적 자세를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추세에 대한 저항이 약합니다.

 

(2) 민족주의 정립의 필요성


20세기 전반 파시즘과 군국주의의 경험으로 인해 선진국 양심세력이 민족주의를 죄악시하는 풍조가 일어났습니다. 유럽에서는 민족주의를 근대에 나타난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보는 관점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러나 한민족은 수백 년의 민족국가 경험만을 가진 유럽 민족들과 달리 천여 년간의 민족국가 경험으로 강한 민족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세계적 유행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뿌리깊은 민족의식입니다.

세계화의 시대라 하지만, 국가의 역할이 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국가 단위로 대응하기 힘든 자원, 환경 등 세계적 과제들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로 인해 축소될 국가의 역할은 아주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자본의 지배력을 확장하기 위해 국가의 역할을 축소시키는 경향을 보이는데, 구성원들을 보호하는 국가의 역할을 서둘러 축소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세계화 노선이 아닙니다. 기능이 훌륭한 국가를 가진 사람들이 세계화 시대에도 유리한 조건을 누립니다.

한국인에게는 민족국가를 실현하는 것이 훌륭한 국가 기능을 확보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민족국가'라 함은 꼭 통일된 반도국가가 아니더라도 민족주의 원리를 바탕으로 조직되고 운영되는 국가체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민족정체성과 국가정체성이 서로 부딪칠 경우 국가의 기능이 떨어지고 서로 화합될 경우 국가의 기능이 향상되기 때문입니다. 한국인의 뿌리깊고 강한 민족의식을 국가 조직과 운영의 바탕으로 삼을 민족주의로 키워내면 한국인의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3) <친일인명사전>의 역할


친일 문제는 남북 분단과 함께 한국 민족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아 온 장애물입니다.
과거 청산의 범위와 방법을 사회 구성원들이 토론해서 결정해야 할 텐데, 그 토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은 실질적 청산을 바라지 않는 세력이 좌우 양측의 주도권을 쥐었기 때문입니다. 좌익에서는 "철저한 청산"을 외치며 양심세력까지 친일파에 넣어 경쟁에서 배제하려는 의도로 "친일파 척결"을 구호로만 이용하려는 극좌적 책동이 있었고, 우익에서는 친일파 출신의 극우파가 친일파 범위를 넓게 만들어 비판과 공격을 어렵게 만들려 했습니다. 친일파의 범위를 사회적 필요보다 넓게 잡으려는 데는 극좌와 극우의 정략이 합치했던 것이며, 이것이 양자 간 '적대적 공생'의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극우파 담론의 지배를 받아 온 대한민국에서는 "일제 하에서 숨 쉬고 살기만 했어도 친일파 아니냐?" 하는 억지가 60여 년간 횡행해 왔습니다. 이에 대항하는 민족주의적 주장은 그 반작용으로 넓고 강한 처단을 요구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구호와 핑계가 교착되던 해방공간의 상황이 계속되며, 사회적 필요를 냉정하게 판단해서 절충을 꾀할 길이 막힌 채로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의 표현이 극단으로 흐르는 경향을 가지고 과잉민족주의의 덫에 빠지면서 시대의 흐름과 거리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친일파 문제 자체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더욱더 관념의 영역으로 빠져들어가 왔습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친일 담론, 나아가 민족주의 담론에 실질적 근거를 만들어줌으로써 이 상황을 깨뜨릴 계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Posted by 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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