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무부장 조병옥이 38선 이남의 8도 경찰부와 61개 경찰서를 30일간에 걸쳐 순시하고 돌아와 4월 6일 군정청출입기자단 회견에서 소감을 발표했다. 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서 이 소감의 흥미로운 부분 일부를 소개한다.


“이번 순시의 소감을 개괄적으로 언명한다면 조선의 경찰진용도 그 조직 운영과 규율, 사기 모든 점에 있어서 완성기에 들어갔다는 사실과 둘째로 치안도 완성 복구되는 최종단계에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

일층 강화된 경찰력을 가지고 정치, 경제, 문화사업 각 방면에 포부와 계획을 실행하려는 여러 동포들의 생명, 권리, 재산을 보호할 결심이니 안심하고 각종 사업에 매진하여 건국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 (...) 그런데 우리 경찰진의 중요한 점은 경찰진용은 사회추천에 의한 민선기관이 아닌 것이다. 경찰직원은 군정장관이 부여한 경무부장의 임면권에 의하여 그 신분은 보장되고 있다. 사회와의 타협과 순합할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다. 사실상 현재까지도 소위 사회적 추천을 받았다고 망징하는 지방경찰기구 몇 개소가 존재하여 명령계통의 암이 되고 있으나 이것도 4월 15일경에는 모두 제거되리라고 믿는다. 끝으로 경찰은 언론기관에 대하여 적극적 협력을 요구하여 마지않는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같은 날자 <동아일보>에는 “경무부, 경찰제도 개혁”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경찰이 “사회와 타협하고 구합할 권리도 의무도” 없다는 조병옥의 말을 인용했다. (4월 7일자 일기) 조선의 경찰진용이 “조직 운영과 규율, 사기 모든 점에 있어서 완성기에 들어갔다”는 그의 말은 자신을 통해 미군정의 명령을 받는 일사불란한 경찰조직이 완성되고 있다는 뜻이다.


조병옥이 “명령계통의 암”이라 한 지방경찰기구는 어떤 것이었는가? 커밍스는 해방 직후 지방인민위원회를 개관하면서 미군이 진주하기까지의 ‘정치적 공백기(interregnum)’가 긴 곳일수록 인민위원회의 역할이 컸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0월 말까지 전라도의 제6사단 배치가 끝나고 11월 10일 제20연대가 제주도에 도착함으로써 점령군의 전술적 배치가 끝났지만 행정과 치안을 확보하는 데는 몇 주 내지 몇 달의 시간이 더 걸렸다. 미군의 권력 장악이 늦은 곳일수록 인민위원회와 치안대의 역할이 컸고, 그런 곳에서 치안대가 경찰로 전환하도록 미군이 도와주거나 허용한 곳도 있었다. 그래서 ‘조병옥의 사람’ 아닌 경찰이 일부 지역에 있었고, 조병옥은 이를 “명령계통의 암”으로 여긴 것이다.


이 암적 존재가 4월 15일경까지는 모두 제거될 것이라고 조병옥은 장담했다. 그의 ‘순시’라는 것은 모든 지방경찰의 자신에 대한 충성을 확인하고 이질적 존재를 제거하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위 소감에서 “현재 1만 9천 명의 경찰직원을 2만 5천 명으로” 늘릴 계획도 밝혔다. 식민지시대 경찰보다 갑절이나 규모가 크고 사회와의 ‘타협’이나 ‘순합’이 없는, 즉 민심과 절연된 폭력조직의 구축을 그는 공언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병옥의 ‘순시’가 이승만의 지방 ‘순회’에 바로 앞서서 이뤄진 것이 우연한 일이었을까? 이승만은 4월 15일 서울을 떠나 5월 9일까지 충청, 경상, 전라도의 21개소의 대중집회에 참석했다. 6월 3일에서 9일까지 5개소 집회를 더했다. 정병준은 이 ‘남선순행(南鮮巡行)’을 이승만이 “자신의 명성을 높이며, 반대 세력을 제압하는 한편 지지 기반을 확충하고 지원금을 확보”한 매우 중요한 작업으로 해석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 543쪽)


정병준의 해석에 나는 깊이 공감하고 남선순행에 관한 생각을 많이 적고 싶다. 오늘은 우선 남선순행의 배경조건에 관한 생각을 정리해 두겠다.


이승만이 귀국 후 만든 가장 큰 조직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중협)였다. 독촉중협의 조직력은 그리 크게 자라나지 않았지만 이승만은 이것을 정치공작에 잘 활용했다. 1946년 1월 중순 임정 주도의 비상정치회의가 좌익 포용에 한계를 보일 때 이승만은 독촉중협의 합류를 제안, 비상국민회의로 방향을 돌려 민주의원 구성에 이르게 했다. 그 과정에서 임정 비주류가 이탈, 임정의 권위가 훼손된 반면 이승만은 비상국민회의 영수와 민주의원 의장 자리를 확보했다.


이렇게 한 차례 팔아먹고도 독촉중협은 그대로 이승만의 수중에 남아 있었다. 그는 2월 초순에 이것을 다시 한 차례 팔아먹을 길을 찾았다. (정병준은 독촉중협이 그에게 ‘도깨비방망이’ 같은 존재였다는 표현을 썼다.) 반탁운동을 계기로 결성된 대중조직 반탁총동원위원회와의 통합을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통합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독촉국민회)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이승만의 수중에 바로 장악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독촉중협 조직을 4월까지 독촉국민회에 넘겨주지 않았다. 그 동안 독촉국민회는 임정 계열을 중심으로 총동원위원회 체제 그대로 운영되었다. (정병준 위 책 545-546쪽)


이 시기에 김구와 이승만은 겉으로는 단합된 태도를 표명하면서도 속으로는 각자의 주도권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4월 9일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한 기사가 보인다.


9일 경교통 金九는 돈암장으로 李承晩을 방문하여 민주정당 합동이 지연되는 작금의 사태로 보아 李 박사가 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출마하여 난국을 수습하기를 요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李 박사는 오늘의 정정으로 보아 정당에 구니하지 않는 거국적 초당적인 국민운동의 필요를 역설, 金九도 동당에서 탈당하기를 종용하였다. 金九는 李 박사의 소신에 호응하는 바 있어 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을 사임할 결의를 표명하여 이로써 정당 문제는 일단락을 고한 듯한 감이 있는데, 10일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지방지부결성대회에 임한 金九는 나는 나의 소신이 있으며 또 李 박사와 혼연일체인 만큼 세평의 여하에 구니할 것 없이 국민운동으로서 활발히 발족하기를 바란다는 격려사로써 결심의 일단을 보인 것도 독립당의 소장파 의견과는 달리 정계의 신국면이 전개될 것으로 자못 주목되는 바이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1946년 04월 11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9일이면 광산 스캔들로 민주의원 의장직에서 물러나 있던 이승만이 조병옥으로부터 지방 사정에 관한 보고를 받으며 ‘남선순행’ 계획을 굳히고 있을 때였다. 한편 한독당 중심의 4대 우익 정당 통합 움직임이 7일 한민당의 거부 결정으로 한계에 부딪쳐 있을 때였다. 김구가 이승만에게 한독당 중앙집행위원장 취임을 권한 것은 이승만의 영향력을 이용해 한민당까지 끌어들이려는 뜻으로 보이고, 이승만이 김구에게 초당적 위치를 권한 것은 조직력에 있어서 김구의 우위를 해소시키려는 뜻으로 보인다.


우익 정당 통합 운동은 결국 한민당이 이탈한 채 한독당, 국민당, 신한민족당이 한독당의 이름으로 합당하고 몇 개 군소정당-단체가 합류하는 것으로 18일에 결정되었다. 23일에는 중앙부서와 간부까지 결정되어 합당 작업이 끝났다. 김구는 9일 이승만의 탈당 권유에 중앙집행위원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중앙집행위원장 자리를 지켰고, 부위원장은 조소앙이 맡았다. 그 외에 조경한, 엄항섭, 양우조, 최용덕, 안재홍, 명제세, 김여식, 최익환, 김경태, 박용희가 중앙상무위원으로 참여했다. 한독당을 보강한 모습이었다.


10-11일의 독촉국민회 지방지부결성대회가 총동원위원회와 독촉중협의 조직을 통합하는 자리였다. 이 대회에서 이승만과 김규식이 불참한 가운데 김구가 자신이 작성한 중앙위원 명단을 제출하며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런데 이 직후 이승만은 지방 각지를 누비며 대중 동원과 연설을 통해 지방의 우익 세력을 자신의 지도하에 결집시켰다. 독촉국민회의 중앙부는 김구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지만, 지방의 기반은 이승만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이승만의 순행은 각지에서 엄청난 성황을 불러일으켰다. 이 성공의 평가에서 정병준은 다소 인색한 태도를 보인다.


이승만의 남선순행은 ‘뜻밖에’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의 방문을 계기로 지방 우익들이 결집하여 독촉국민회 지회를 결성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정은 이승만의 지방 순회 강연이 엄청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으므로, 지방 구석구석까지 이승만이 찾아가 우익 조직을 확대한다면 한국의 정치지형을 변화시킬 수 있을 정도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가 대중들의 자발성이나 이승만의 명성으로부터 기인한 것만은 아니었다. 미군정 헌병과 한국인 경찰-지방관리-지역유지, 우익 청년 단체는 한편이 되어 지방의 정치 지형을 바꾸는 데 주력했다. 경찰은 이승만 보호를 내세워 순방 지역의 좌익에 대한 예비검속과 공포 분위기를 형성했고, 한인 지방관리와 유지들은 접대비와 기부금을 징수하고 태극기와 환영 전단을 가가호호 내걸게 하는 한편, 학교를 휴교시키고 학생들을 동원하기까지 했다. 현지의 우익 청년 단체들은 좌익 정당-사회단체를 노골적으로 습격하고 좌익 인사들을 폭행했다. (<우남 이승만 연구> 549-550쪽)


경찰이 이승만 보호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 띄운 것으로 보이는 두 차례 발표가 이승만의 출발 직후 나왔다.


15일 밤 하오 10시경 시내 모처에서 행동이 수상한 수명의 일당을 경기도 경찰부 관하의 순경이 불심검문하자 일당은 들었던 손가방 하나를 떨어뜨리고 도망하였는데 트렁크 속에는 기관총 한 자루, 실탄 50여발이 들어 있어 곧 도 경찰부에서는 사건의 전말을 엄밀히 추궁한즉 일당은 38이북 전곡으로부터 침입하여 민주의원 요인 암살의 임무를 띤 전곡인민위원회 파견의 암살대인 것이 판명되어 방금 엄중 수사 중인데 범인체포는 시간문제일 듯하다.

(...) 이 사실의 발표는 수상상 곤란한 관계가 생겨 관계 각 방면에 중대한 지장이 있으므로 본사에서 탐사한 정보를 계속하여 보도할 수 없음은 유감이나 (...)

◊ 張 경찰부장 담

요인 암살계획사건에 대하여는 수사상 중대한 관계가 있느니만치 그런 사건이 있느니 없느니 일체 말할 수 없다. 나는 이 사건에 함구해 왔을 뿐이요 위조니 날조니 하는 담화를 발표한 일이 없다. (...)

(<동아일보> 1946년 04월 19일자)


(경무부 발표) 남조선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을 암살하려는 계획인 반대정당의 당원인 7명을 대전에서 체포함으로서 무서운 계획은 미연에 방지되었다.

체포된 범인 중 2명은 암살음모에 관련하였다는 것을 자백하였고 그 뒤에서 교사한 자로 인정되는 2명은 방금 엄사 중이다.

이승만 암살의 음모가 발각되었을 때에 이승만은 지방강연차로 대전에서 2만여 명에게 강연을 끝마치었는데 7인 중 1인은 16일에 잡히고 6명은 19일에 체포된 것이다.

암살단 일당은 정당관계의 사설군대의 한 분대를 조직하기 위하여 충남도(충남도 경찰부 보고)에 잠입하였었으나 수사당국에 탐지되어 미연에 실패되어 범인 수명은 충남을 떠나버리고 나머지 범인 6명은 무기소유의 혐의로 검거된 것으로 그들은 두 개의 총검과 일본제 수류탄을 가졌고 방금 수사 중에 있는 범인의 자택에서는 약간의 소총과 피스톨 그리고 탄환 4백 발이 발견되었으나 이 탄환을 사용할 만한 무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조선일보> 1946년 04월 20일자)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일개 군의 인민위원회에서 암살단을 보냈다는 얘기도 휘황하고, 위조, 날조 얘기가 나도는 가운데 장택상이 자신은 “함구해 왔을 뿐”이라고 우기는 모습도 재미있다. 아래 기사에 나오는 범인들의 ‘이승만 암살’ 목적을 어떻게 확인했는지도 알 수 없다. 조병옥이 정비해 놓은 경찰조직을 이승만의 순행에 동원할 명분을 만들려는 의도만 뚜렷이 보일 뿐이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