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일기> 작업의 가장 중요한 참고서의 하나인 이 책을 처음에는 번역판 기준으로 활용하려 했다. 연구서이면서도 일반 독자들이 교양서로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1986년에 나온 김자동 번역판 <한국전쟁의 기원>의 번역 수준은 연구자들에게는 이용이 가능할지 몰라도 일반 독자들에게는 곤란한 문제가 있다. 그 번역이 나올 무렵까지 이 분야 연구가 활성화되어 있지 못한 까닭이겠지만, 개념과 용어의 혼란이 가장 두드러진 문제다.


예컨대 머리말에 “해방정권”이란 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원문의 “liberation regime”을 번역한 것이며, 소련군과 미군 진주 전의 몇 주일 동안 나타난 자생적 정치현상을 가리킨 말이다. 여기서 ‘regime’은 ‘정권’보다는 ‘체제’로 생각해야 할 말이다. 당시 상황을 웬만큼 아는 독자라면 용어가 정확하지 못해도 무슨 얘기인지 대충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명확한 개념을 미리 갖고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한 말이다.


그래서 원서를 구해 놓고 인용이 필요할 때는 내 손으로 번역해서 올리고 있다. 정말 아까운 일이다. <해방일기> 독자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책의 하나를 번역판으로 소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알고 보니 역사비평사에서 근 10년 전에 판권을 확보해 놓고 새 번역판을 추진 중이라는데, 어서 제대로 된 판본이 나오기 바란다.


1981년, 한국에서는 반공군사독재가 아직도 서슬 퍼럴 때 나온 책이다. 1986년 시점에서 번역판을 낸 김자동님과 출판 관계자들의 의지와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새 번역판 준비하는 이들이 그 의지와 열정으로부터 배우는 바 있기 바란다.


1985년 영국 체류 중 이 책을 처음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북한 연구자 존 핼러데이를 만났을 때 한국의 역사학도라는 사람이 이 책을 읽어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며 내게 경멸감을 감추지 않는 바람에 읽게 되었다.) 첫 충격 지점은 물론 반공사회의 공식 관점을 정면으로 뒤집어놓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천천히 받아들여졌지만 더 깊은 충격은 정치적 사건을 역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한국전쟁에 관한 반공체제의 관점을 ‘전통주의(traditionalism)’라 하고 커밍스가 제기한 관점을 ‘수정주의(revisionism)’라 하여 평면적으로 대비시키는 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학술적 기준으로 차원이 다른 작업이다. 소위 전통주의는 반공체제의 정치적 선전을 학술적으로 분식한 것일 뿐이며, 그 사실은 그 고찰이 한국전쟁의 ‘현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기원’을 외면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소위 전통주의를 비양심적인 사이비 학문으로 매도하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선의 연구를 행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이 얼마나 엄혹했고, 그 제약이 얼마나 엄연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반공독재정권 하의 한국 학계가 처해 있던 조건은 말할 것도 없고, 냉전시대 미국 학계도 그와 ‘오십 보 백 보’의 조건에 처해 있었다.


소위 전통주의자들도 자기 할 몫을 했다. 다만 냉전시대의 제약을 벗어나지 못했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탈냉전시대에 들어선 지금 ‘전통주의’를 ‘수정주의’와 맞먹는 존재처럼 내세우는 것이 냉전시대의 제약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1981년에 1권을 낸 후 1990년 2권을 낼 때까지 1권을 둘러싼 논의를 보며 커밍스가 자기 작업의 특성을 스스로 돌아본 흔적을 2권 서문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책에 담긴 여러 가진 주장을 놓고 불편해 하거나 불안해 할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제1권에서보다 더 많을 것이다. 문서고와 서류자료 중에서 발견한 증거 중에 나 자신 충격을 받은 것들이 있다. 이 책의 출간이 늦어진 것은 내가 전혀 모르고 있던 어두운 골목과 흐리멍덩한 사정을 살펴볼 필요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방법과 기질의 문제도 작용했다. 나는 도서관 서가에서 먼지나 뒤집어쓰고 있을 책을 쓸 생각이 없다. 20세기 중엽 한국과 미국의 정치는 그런 얌전한 책을 쓰기에 너무나 매혹적인 주제다. 보다 점잖고 침착한 접근을 통해 더 안전하고 논란이 적은 해석을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하면 질문의 영역 중 너무나 많은 부분이 ‘역사’란 이름의 휴지통 속에서 곰팡이나 피우고 있게 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2> xvii-xviii쪽)


커밍스의 서술은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연구에서는 논란을 두려워하되 서술에서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바람직한 역사 서술에 대한 내 생각인데, 커밍스의 자세는 여기에 부합한다. 그의 책이 연구서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독자를 위한 교양서로서 가치를 가지는 기본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를 휴지통 이름으로 갖다 댄 데 순간적으로 반감을 느끼는 것은 내 직업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 차례 생각을 굴려보며 쓴웃음을 금할 수 없다. 커밍스의 해방공간 연구가 종래 한국전쟁 연구의 차원을 바꾼 결정적 요점은 역사적 관점을 적용시킨 데 있다. 그런데 그가 자기 작업의 의미를 ‘역사’라는 휴지통으로부터 의미 있는 질문들을 해방시킨 데 있다고 하는 데서 역사학이 미국 사회에서 지키고 있는 초라한 위치를 알아볼 수 있다.


학문 수준이 어느 정도 발달해 있는 사회 중 미국처럼 역사학의 역할이 빈약한 곳이 별로 없다. 현대사의 전개에 대해 사회과학적 설명에 치중하고 역사적 관점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전쟁에 가장 큰 직접 관심을 가진 사회가 한국 다음으로 미국인데, 그 관심이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는가?” 하는 평면적 수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이유의 일부는 냉전체제의 압력에 있었지만, 미국 사회의 ‘비역사적’ 성향에도 있었던 것이다. 커밍스 자신이 제2권 서론에서 이 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북경 정치학(Pekingology)’이란 두 마리 거대한 고래가 물밑에서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시어더 화이트가 말한 적이 있다. 어쩌다 한 번씩 수면에 올라와 물을 뿜어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근거는 그것뿐이다. 그런데 미국의 정치도 ‘중국’ 정치와 비슷한 양상을 보일 때가 많다. 신문을 조심해서 읽고 핵심 인물의 부침을 관찰하면서 권력투쟁을 찾아내는 ‘워싱턴 정치학(Washingtonology)’이 필요한 대목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입 밖에 내는 것은 미국 사상의 체질에서 크게 벗어나는 짓이다. 정치와 역사, 인간의 행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우리 사회의 통념에 어긋나는 것이다. 음모 이론(conspiracy theory)을 꾸며내는 짓이다. 우리처럼 비역사적 성향을 내재적으로 품고 있는 사람들은 뒤를 캐는 일, 양탄자 들춰보는 일, 물밑의 힘과 움직임을 알아보는 일에 적성을 보일 수가 없다. 제1원리에 대한, 그리고 파헤치기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사람은 좌우익의 과격파밖에 없다. 니체가 말한 “미로(迷路)를 향한 운명”은 미국인의 영혼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같은 책 13쪽)


한국의 지식층은 한편으로 반공독재정권의 억압을 받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 사회의 ‘비역사적’ 성향에 영향을 받아 왔다. 그렇게 수십 년을 지낸 결과 미국보다도 더 ‘비역사적’ 성향을 띤 사회가 되어버린 것 같다. 해방공간을 탐색하는 <해방일기> 작업을 벌이면서 절실하게 느낀다. 반공독재정권의 공식적 관점이 가진 극심한 편향성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대항하는 관점에서도 또 다른 편향성과 자주 마주치게 되는 것이 ‘좌우익의 과격파’만이 과거사에 대한 열정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