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30일 일본군 각부대로부터 제대가 되어 돌아온 청장년장병들이 일치단결하여 귀환장병대라는 이름으로 현재에는 치안유지에 힘쓰는 한편 장래 국군의 기초를 닦으려고 주야로 맹활동 맹훈련을 하고 있던 중 이번에는 기본 뜻을 가진 단체로 귀환군인동맹과 합류하여 이름도 ‘조선국군준비대’라고 고친 후 앞으로 목표하는 방향을 향하여 일로매진하기로 되었다. 현재 조직된 인원으로는 서울 시내가 5백 명 지방이 1천 명 도합 1천5백 명가량이며 대의 특색으로는 어디까지나 당파에 기울지 않고 꾸준히 훈련에만 전심하였다가 어느 때고 정부가 수립되는 때에 국군에 무조건으로 합류하자는 것이다.

강령과 역임은 다음과 같다.

◊ 綱領

(가) 우리는 現有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여 국군편성의 기초를 준비코자 함

(나) 우리는 軍團的 발전을 편성함

(다) 신정부군대가 편성될 때에는 그에 합류함

(라) 우리는 主義的 혹은 파벌내 분쟁을 배척함

(마) 우리는 自衛治安에 노력함

◊ 隊長:李赫基(略)

매일신보 1945년 09월 17일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


좋은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어찌 생각하면 한국 현대사를 참혹하게 만든 말이다. 크고 건강한 단합은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이다. “뭉쳐야지, 뭉쳐야지,” 마음먹고 뭉치는 것은 이해관계에 따른 작은 단결이기 쉽다. 더 큰 대립을 가져오는 패거리의 뭉침이 되기 쉽다.


질서를 잃은 사회에서 조직이 큰 힘을 발휘한다. 힘에 대한 억제가 약하고 힘없는 자가 폭력에 노출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힘 있는 조직에 속하고 싶어 한다. 자금과 기획력을 가진 야심가들은 이런 사람들을 모아 쉽게 세력을 만들 수 있다.


결사의 자유가 없던 일본 통치가 끝난 후 몇 달 동안 수백 개의 단체가 만들어졌는데, 그중에는 정당 등 정치단체가 제일 많았고 군사단체도 수십 개에 달했다. 군사단체 중 제일 큰 것이 이 국군준비대로, 연말까지 상비군 1만7천 명에 예비군 7만여 명을 조직했다고 한다. 좌익 단체로 지목되어 우익 단체들과 잦은 충돌을 빚다가 이듬해 1월 12일 총사령 이혁기 등 간부들이 미군정에 체포되면서 해산되었다. 이혁기는 경성제대 출신으로 학도병 탈영자였다. (<위키백과> “국군준비대” 조)


인적 자원은 차고 넘쳤다. 수백만 해외동포가 귀국하고 있었는데 일자리는 오히려 줄어든 상황이었다. 북한 지역 일부 주민의 남한 이주도 시작되었다. 류상영은 “8-15 이후 좌-우익 청년단체의 조직과 활동”(<해방전후사의 인식 4> 61쪽)에서 “1946년 8월까지 일본, 만주, 38선 이북 등 전지역으로부터 유입된 인구수는 미군정 정보국의 통계에 의하면 186만1,390명”이라고 했다. 1년간 10%의 순증가였고, 아마 서울은 갑절로 늘어났을 것이다.


유민 상태의 대중 속에서 조직의 가치가 가장 큰 것이 활동력 있는 청년층이었다. 그중에서도 일본군 귀환병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군사조직은 참가자들에게는 일종의 취업이었고, 조직자들에게는 세력 확대의 길이었다.


국군준비대 강령 (라)항에 “우리는 主義的 혹은 파벌 내 분쟁을 배척함”이라 했지만, 이 시기의 어떤 조직도 정치적 지향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지향성을 정말로 가지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지향성이었으니까. 국군준비대는 좌익 성향으로 파악되었다고 하는데, 1945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국군준비대와 충돌한 소위 우익 단체들이 극우 성향이었음을 감안하면 그 실제 노선을 정확히 판단하기 어렵다. 맨 오른쪽에서 볼 때 다른 사람들이 모두 왼쪽으로 보이는 것은 어느 때나 마찬가지니까.


해방 후 연말까지의 기간 중에 좌익 쪽 민중 조직이 우익 쪽보다 활발했다는 통설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류상영의 위 논문 64쪽에는 나주 치안대의 상황을 예시하며 “이처럼 8-15 직후에는 자발적인 청년조직들에 의한 일제 잔재 청산과 친일파 제거 주장이 매우 지배적으로 대두되었기에 이에 대항할 우익 청년조직의 움직임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했다.”고 했는데, 여기서 ‘자발적 청년조직’은 민족주의 조직이지 좌익이 아니다. 따라서 ‘이에 대항할’ 조직이라면 우익이 아니라 극우라 해야 할 것이다.


심지어 대표적 좌익 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도 노동자의 이익을 추구할 뿐이지, 극좌를 배제한다는 노선을 표방했다. 해방 직후 상황에서 중도 노선이 인민에게 환영받던 상황을 알 수 있다. 미군정이 자리 잡은 뒤에야 ‘우익’을 표방하는 극우 단체들이 조직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단체가 1946년 1월 7일 결성된 반탁전국학생연맹(학련)이었다. 서중석의 서술을 보면 학교를 많이 장악하고 있던 한민당 주류 세력이 학생들을 동원하기 쉬웠던 사정을 알아볼 수 있다.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사비평사 펴냄) 333쪽)


우익의 최고 지도자로서 우익 청년-학생운동단체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학생연맹의 후신인 전국학생총연맹을 가장 믿음직한 활동단체의 하나로 아끼고 사랑했다고 하며, 각종 우익 청년-학생단체를 지원하고 그 소속원들을 격려하였다. 김구와 조소앙은 청년-학생단체의 소속원들이 체포되면, 장택상 수도경찰청장 등에게 전화를 걸어 석방시켰다. 이들 단체에 대한 자금의 지원은 ‘인촌의 주머니가 바로 이철승의 주머니’라는 말이 있었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김성수와 ‘전국학련의 금고’로 자처한 전용순이 가장 많이 하였고, 이승만, 박흥식 등도 지원하였다. 이철승은 꼭두새벽이면 일어나 김성수 댁을 거쳐 전용순 댁에 가서 활동자금을 타내고, 김구 댁인 경교장, 조소앙, 신익희 등 임정요인들이 묵고 있는 한미호텔을 방문하는 것이 일과였다. 이밖에 정인보, 장덕수, 엄항섭, 김도연, 안호상, 이선근, 박순천, 김활란, 임영신 등이 물심양면으로 전국학련 등에 대해 지원하였다고 한다.


미군정이 한국 현대사에 끼친 부정적 영향에 대한 비판은 미군정이 ‘한 짓’에 많이 집중되는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데 더 큰 문제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통치건 점령이건 한 사회의 운영을 책임지는 입장에서 최소한의 질서 유지를 위해 꼭 해야 할 일은 돈과 주먹의 힘이 날뛰는 것을 억제하려는 노력이다.


한민당 주류 세력이 폭력에 의지함으로써 극우의 길로 흘러가는 것을 군정이 방치 내지는 방조까지 한 것이 한국 정치 수준을 타락시키고 중도파의 길을 봉쇄한 기반조건이었다. 좌익 쪽의 폭력성은 군정을 등에 업은 극우파의 폭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적어도 미군정이 질서 유지의 책임을 가지고 있던 남한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을 수 없다.


장준하가 광복군 시절 존경하고 따르던 이범석이 1946년 6월 귀국 후 조선민족청년단(족청)을 조직하고 활동하는 모습에 실망한 이야기가 있다. (박경수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돌베개 펴냄) 225-227쪽) 이범석과 함께 광복군의 찬란한 지도자였던 지청천 역시 귀국 후 대동청년단을 만들어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광복군을 대표하던 이런 인물들조차 극우 테러리즘밖에 진로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미군정 하에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국군준비대 총사령이던 이혁기는 1948년 2월 22일 인민혁명군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 안에 국군준비대 출신 장병들을 중심으로 좌익 조직을 만들었다는 사건이다. 1944년 학병 거부운동에 함께 앞장섰던 이철승이 학련의 맹장으로 나선 것과 대비되는 행로였다.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