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5. 10:50



어제는 지난 주 가 뵙고 엿새 만에 다시 가 뵈었다. 격주로 가 뵙는 틀이 꽤 오랫동안 잡혀 있었는데 모처럼 빨리 간 것이다. 그 사실을 어머니도 분명히 인식하시는 것 같다. “네가 웬일이냐?” 내 얼굴을 보실 때 반응이 이렇게 나오실 때가 더러 있지만 수사적인 질문으로 대개 느껴진다. 그런데 어제는 정말로 놀라신 기색이 역력하셨다. 마구 손을 뻗쳐 내 얼굴을 만져보시는 것이, 실물 확인의 필요를 느끼시는 것 같다.


세 시에 도착해서 한 시간 반가량 모시고 있었는데, 거의 내내 ‘행복’, ‘기쁨’, ‘고마움’을 노래하셨다. 단둘이 앉아 있을 때도 평상 화법 쓰실 틈이 별로 없이 노랫가락 화법이 이어졌다. 노랫가락 화법은 표현이 애매한 내용을 얼렁뚱땅하는 데도 많이 쓰이지만, 어제는 내내 믿음이 가득 실린 ‘인생 찬가’였다. “이곳은 참 좋은 곳이예요. 꽃도 있고, 나무도 있고, 숲도 있고, 바람도 있고, 햇빛도 있어요. 이렇게 좋은 곳인 줄을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이곳”이 처음에는 세종너싱홈을 가리키는 것이었는데, 노랫가락이 이어지는 동안 이 세상으로 바뀐다.


전전날 작은형이 다녀간 것도 기억하고 계셨다. 와서 뭐 하고 갔는지, 누구랑 같이 왔었는지는 기억할 생각도 안 하신다. 자극을 드려 보려고 캐물어 봐도 “내가 그런 거 관심 없잖아.” 잡아떼시지만, 아침 식사 하고 점심 식사 한 것 기억하시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기억하신다. 내가 며칠 만에 온 건지 날짜를 꼽지는 못하시고, 전번에 아내랑 함께 왔었다는 사실도 떠올리지 못하실지 모르지만, 보통보다 빨리 나타났다는 사실 하나만은 분명히 인식하셔서 한없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정말 어머니에게 최고의 기쁨조가 되었다. 누가 찾아와도 기쁘게 맞으시지만, 내 모습은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켜 드리는 것이 분명하다. 쓰러지신 후 3년 동안 꾸준히 접해 온 익숙함이 지금 나에 대한 어머니의 인식에 바탕이 되는 것은 물론이지만, 이곳 오신 후 1년 동안에는 그 인식이 복합적인 형태로 자라난 것 같다. 어릴 때의 내 모습, 아버지의 기억 등 여러 가지가 지금의 내 모습에 겹쳐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착하다느니, 멍청하다느니, 장난스러운 칭찬을 하다가 불쑥 아버지 얘기로 넘어가실 때가 많다. 스물세 살에 만나 서른두 살에 사별하신 그분과의 인연이 어머니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또 무거운 인연이다. 그 인연을 다 풀지 못했다는 미진함 때문에 어머니에게는 이 세상의 어떤 기쁨도 흔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 매듭을 대신 풀어드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몇 달 전부터 들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그렇다. 그 매듭이 풀리지 않고는 어머니 마음이 저렇게 석연하실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 계실 때 두 분 사이에 이런저런 곡절이 없었을 리 없다. 아버지 일기의 행간에서 더러 느껴지는 것도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풀려나갈 길이 막힌 곡절 하나하나가 어머니 마음속에 응어리가 되어 있었을 텐데. 그런데 요 몇 해 동안 어머니와 나 사이의 관계는 극히 단순화된 것이다. 껄끄러운 곡절이 일어날 여지가 없다. 인간관계의 본질에 마음을 놓으면서 묵은 응어리가 풀리시는 것 같다.


아버지 일기에 처음 접한 것이 23년 전, 내가 서른여덟 살 때였다. 아버지가 그 일기를 쓰실 때와 같은 나이였다. 내 불초함을 충격으로 느꼈고, 그 충격 덕분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요즘 들어 주변에서 “호랑이 아비에 개자식 없다(虎父無犬子)”는 말을 더러 듣게 되었는데, 어머니에게 아버지 대역을 맡아 드릴 수 있다면 정말 대성공이다.


어머니 하시는 일이 옳지 않다고 생각될 때 나는 비판에 가차가 없었다. 한번은 이모님이 함께 계실 때 무슨 일로 “눈깔을 까뒤집고 대들었”더니 어머니가 이모님을 돌아보며 탄식하셨다. “저놈은 김 서방 귀신이 씐 놈인가봐.” 그때도 대역은 대역인데, 악역이었다. 악역까지 능란하게 소화하던 유능한 배우가 근년에 착한 역할을 해 내니까 어머니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것 아닐까? 원래부터 착해빠진 형들이라면 나보다 백 번 더 잘 해드려도 그런 감동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어제 평소보다 짧은 간격을 두고 어머니 뵈러 간 것은 사실 마음이 좀 불안해서였다. 지금 계신 곳보다 입원 노인들을 더 잘 배려해 주는 요양원이 따로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세세한 측면까지 입원자 위주로 생각해주는 자세에 놀라고 감동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운영 조건의 어쩔 수 없는 어려움 때문에 불안할 때가 있다.


간병인 고용이 두드러진 한 가지 문제다. 2년 동안 계시던 병원에 비해 간병인 평균 재직기간이 짧아 보인다. 경영자의 능력과 노력 때문이 아니라 병원과 요양원의 제도적 조건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병원에서는 인력회사의 파견 형식으로 간병인을 쓰기 때문에 실용적 기준에 따라 운용되는 데 반해 요양원에서는 장기요양보험 적용을 받기 위해 보험공단의 운용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보험공단의 운용 기준에 잘못된 것이 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책상 위에서는. 그러나 현실 속에서 입원 노인들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목적에 미흡한 점들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근무시간 문제. 근무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서도, 근무 중의 집중력 확보를 위해서도 근무시간에는 적절한 제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업무의 특수성을 고려해 ‘저강도 근무(low-intensity duty)’ 같은 개념을 도입할 수는 없을까? 간병인은 노인들에게 생활의 동반자다. 노인들과 24시간 함께 생활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에게 소정의 정규 근무 외에 노인들과 함께 하는 생활시간을 ‘저강도 근무’로 인정해 준다면(주거 간병인 1인 고용을 출퇴근 간병인 1.5~2인 고용으로 인정해 준다든지) 요양원의 간병인 운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원리보다 현실을 중시해야 하는 것이 복지사업의 특징이다. 똑같은 자격을 가진 간병인의 똑같은 근무량을 제공하더라도 보살피는 사람과 보살핌 받는 사람 사이의 친근함과 익숙함에 따라 효과에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자식은 자기 부모 보살펴드리는 사람이 자주 바뀌지 않기 바라고, 그 사실을 보험공단에서도 고려해 주기 바란다.


어제 원장님과 잠깐 그 얘기를 나눴다. 지난 주 다녀온 뒤 생각난 대로 적은 글을 보내드렸었는데, 사실 백 가지 잘해 주는 것 놔두고 한 가지 아쉬운 얘기 내놓는 것이 서운하시지나 않을까,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요긴한 지적이라고 고맙다 하면서 이사장님께 벌써 말씀드려 한 가지 방침은 결정해 놓았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간병인 처우를 대폭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이래서야 정말 불평도 함부로 못하겠다. 재정수지에 아랑곳없이 노인들 잘 모시는 기준에만 전념하는 자세가 존경스럽고 고맙기는 하지만, 길게 해 나가려면 수지도 어느 정도는 맞아야 할 텐데. 내가 해드릴 수 있는 일이 뭔가. 세종너싱홈 홍보에 더욱 매진할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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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