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11. 12:18



화요일(8일)에 가 뵈었으니 사흘이 되었다. 전에는 다녀오면 책상머리에 앉자마자 다녀온 이야기를 적기 바빴는데 이번에는 어찌된 것인가. 겨우 마음을 가다듬고 자판을 당기니 먼저 그 생각부터 든다.


두 가지 문제가 생각난다. 첫째는 지내시는 조건이 불안해 보인 것이다. 간병인 문제다. 근무가 겨우 이틀째라서 아직 익숙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어째서 그렇게 인계-인수가 안 되어 있을까? 모시는 노인들의 습관과 필요 같은 소프트웨어는 말할 나위도 없고, 소지품조차 파악이 안 되어 있다니. 독경집을 찾지 못해서 결국 금강경은 읽어드리지 못하고 말았다. 지내시는 조건에 불만을 느끼는 것이 있으니 어머니 걱정해드리는 분들에게 보일 글에 섣불리 손이 가지 않았다.


지금 계신 곳보다 입원 노인들을 더 잘 배려해 주는 요양원이 따로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따라서 공치사도 할 수 없는 세세한 측면까지 입원자 위주로 생각해주는 자세에 놀라고 감동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돈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인들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해드리기 위해 경영하는 요양원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런데 간병인 고용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 2년 동안 계시던 병원의 안정된 고용 상황과 대비된다. 경영자의 능력과 노력 때문이 아니라 병원과 요양원의 제도적 조건의 차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병원에서는 인력회사의 파견 형식으로 간병인을 쓰기 때문에 실용적 기준에 따라 운용되는 데 반해 요양원에서는 장기요양보험 적용을 받기 위해 보험공단의 운용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보험공단의 운용 기준에 잘못된 것이 없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책상 위에서는. 그러나 현실 속에서 입원 노인들을 편안하게 해드리는 목적에 미흡한 점들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근무시간 문제. 근무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서도, 근무 중의 집중력 보호를 위해서도 근무시간에는 적절한 제한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업무의 특수성을 고려해 ‘저강도 근무(low-intensity duty)’ 같은 개념을 도입할 수는 없을까? 간병인은 노인들에게 생활의 동반자다. 노인들과 24시간 함께 생활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에게 소정의 정규 근무 외에 노인들과 함께 하는 생활시간을 ‘저강도 근무’로 인정해 준다면(주거 간병인 1인 고용을 출퇴근 간병인 1.5인 고용으로 인정해 준다든지) 요양원의 간병인 운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병원의 간병인 파견근무 관행에는 통제가 너무 약한 데서 오는 나름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평균 근무기간이 요양원보다 훨씬 긴 것을 보면 이해당사자 모두에게 더 만족스러운 조건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운용방법의 문제점을 보완해 가며 쓰는 것이 이론상으로만 약점이 없는 전혀 다른 운용방법을 강행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원리보다 현실을 중시해야 하는 것이 복지사업의 특징이다. 똑같은 자격을 가진 간병인의 똑같은 근무시간을 제공하더라도 보살피는 사람과 보살핌 받는 사람 사이의 친근함과 익숙함에 따라 효과에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는 내 어머니 보살펴드리는 사람이 너무 자주 바뀌지 않기 바라고, 그 사실을 보험공단에서도 고려해 주기 바란다.


또 하나 생각난 문제는 ‘시병일기’를 책으로 내기로 한 사실이다. 재작년 11월 중순 회복이 시작되실 때부터 매주 두어 차례씩 시병일기를 쓰다가 작년 6월 요양원에 모신 후로는 한 달에 두어 번씩 가 뵐 때마다 방문기를 적었다. 처음에는 어머니 걱정해드리는 분들께 메일로 보내다가 작년 연말부터는 블로그에 올려놓고 있다. 이것을 보고 어머니를 모르던 분들 중에도 어머니를 아껴드리게 된 이들이 있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도록 책으로 만들자는 권유에 응하기에 이르렀다.


남들이 별로 않는 일을 하려니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하다. 어머니를 위한 일인가, 나 자신을 위한 일인가? <역사 앞에서>란 책을 통해 아버지가 이 사회에 존재의 일부나마 남기신 것처럼 어머니의 존재를 이 사회에 남기는 책을 만들고 싶은 마음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책에 무엇을 담느냐를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분의 존재를 내가 오히려 침해하는 측면도 있는 일이 아닐까?


시병일기를 쓰던 때와 지금의 어머니 상태가 다르시다. 그때 나는 어머니에게 미래가 없고 현재만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읽는 분들도 같은 인식 위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지금 어머니는 당신의 생활을 늠름하게 영위하고 계시고, 근래의 회복 추세를 보면 의식이 더욱 확대되실 여지도 느껴진다.


이런 상태에서 책을 내는 것만이 아니라 방문기를 계속 쓴다는 것부터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내 블로그나 <월간 불광> 독자 중에는 어머니를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다. 아무리 좋은 뜻에서라도 어머니의 사생활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개하는 것이 온당한 일일까? <월간 불광>에 실린 방문기를 보여드리면 언제나 기뻐하신다고 원장님은 말씀하시지만, 다음 찾아뵐 때 어머니 뜻을 확인할 수 있는 대로 확인해 봐야겠다.


확인은 해 보겠지만 어머니의 지금 의식 수준으로 분명한 뜻을 얻을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나 스스로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어볼 일이다. 어찌 생각하면 ‘사생활 보호’라는 것도 인간의 소외를 부추기는 ‘근대적 관념’의 하나일 수 있다. 블로그의 댓글을 보면 내 눈에 보이는 어머니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읽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음’을 꽤 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잡지에는 그런 피드백 통로가 없지만 비슷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생각할 것은 천천히 더 생각하기로 하고, 해 온 버릇대로 근황은 적어놓아야겠다. 말씀 도중에 사이를 띄우고 생각에 잠기실 때가 많은 것을 보면 의식이 든든해지신 것이 분명하다. 간병인이 곁에 있을 때 쉴 새 없이 노랫가락 화법을 이어 가시는 것은 마음이 상대적으로 불안하시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내외가 모시고 있을 때는 평상 화법을 많이 쓰시고 대화 중의 여백도 많다. 생각에 잠기실 때 가급적 방해하지 않고 있어 보니 긴 시간 혼자 생각에 잠기는 데 익숙하신 것 같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며느리 구박증’이 미약한 형태로나마 나타나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아내보다 10분쯤 나중에 올라갔더니 며느리를 다정하게 대하고 계시다가 나를 반기시는데, 몇 마디 오고간 뒤에 간병인이 아내를 가리키며 누구인지 아시겠냐고 물으니 느닷없이 “이런, 쌍간나!” 하시는 것이었다. 아무런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장난스러운 욕설이었지만, 당시 대화의 맥락에서는 뚜렷한 돌출이었다. 아내가 오랜만에 찾아온 것을 분명히 기뻐하고 계셨다. 그런데도 미묘한 심술을 나타내시는 것은 평생 며느리 재미를 별로 못 보신 결과가 아닐까 하는 짐작이 얼른 떠오른다.


간병인 도움의 취약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걱정스러운 정도는 아니다. 병원에 계실 때 마음에 안 드는 간병인에게 대단히 폭력적인 태도를 보여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신 일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간병인에게도 너그러우신 것 같다. 음식도 방문객도 있으면 즐기고 없어도 크게 아쉬워하지 않으시는데, 간병인에게도 마찬가지이신 것 같다.


'어머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10. 6. 29  (0) 2010.06.29
10. 6. 14  (6) 2010.06.15
10. 5. 25  (2) 2010.05.26
어머님 전 상서  (1) 2010.05.16
10. 5. 11  (1) 2010.05.12
Posted by 문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