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의 근대화를 향한 노력에는 애초 예상보다 긴 시간이 걸리기는 했으나 지금은 근대의 의미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1979년에 낸 책 <China and the World Since 1949 1949년 이후의 중국과 세계>에서 중국이 바라본 과제를 “독립”, “근대성”, “혁명”, 세 개 단어로 표시했습니다. 중국은 근대세계에 대응하기 위해 독립 공화국을 세우고자 했고, 쑨원과 그 지지자들은 국가의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민족주의에 호소했습니다. 다음 과제인 근대화는 청나라가 무너진 후 한 세대 지도자들이 최대한 빨리 성취하기 위해 노력한 목표였습니다. 끝으로 혁명을 꼽은 것은 그 지도자들이 독립과 근대성을 이루기 위해 중국의 국가와 사회를 바꿀 필요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국에게는 두 개 혁명이 필요했고, 세 개 단어의 위 순서는 잘못된 것입니다. 1911년의 정치혁명은 왕조국가를 근대적 공화국으로 바꾸는 데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혁명을 뒤따른 것은 군벌이 난립하는 무질서와 혼란이었습니다. 1928년 국민당이 대부분 군벌을 평정하고 난징에 정부를 세운 뒤에도 통치가 가능한 것은 국토의 3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는 일본이 쳐들어와 정부가 내륙으로 피해가서 생존에 급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족이란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중국인에게 민족주의가 일어난 것은 전쟁 덕분이었습니다. 고대문명 이래 많은 사람이 공유해 오면서도 고정된 경계선이 없던 일련의 가치관으로부터 민족 정체성이 떠올랐습니다. 영토 주권에 근거를 둔 서유럽에서 발생한 민족의 개념은 중국인에게 낯선 것이었습니다. 중화민국이 중화민족의 이름으로 중국을 만주족의 지배에서 풀어냈을 때 두 가지 중대한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청나라의 영토를 물려받았는데, 그 주민들이 스스로를 하나의 민족으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청나라가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回族), 티베트족의 오족(五族)으로 이뤄진 나라라는 관념에서 벗어나는 데서 중화민족의 근대적 개념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물리친 뒤에는 이 나라가 56개 민족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근대적 관점이 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새로운 형태의 국가를 세우는 정치혁명이 먼저 일어났습니다. 근대화의 열망은 더 먼저 20세기 초부터 일어났다고 할 수 있지만, 근대화란 많은 사람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복잡한 현상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국의 근대화는 지금도 진행 중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립의 과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에야 이뤄진 것이고, 지금도 계속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과제입니다.
오늘날의 주류 역사 담론에서 근대가 1500년경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고 서유럽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그 계기로 중시합니다. 18세기 이후 더 큰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16-18세기 3백 년을 “초기 근대”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국에게는 명나라 중엽인 1500년에 시대구분의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변화가 없었던 시기입니다.
1920년대 이래 중국에서는 아편전쟁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아 왔습니다. 그 이후의 조약들을 통해 중국의 교역 체제가 바뀌었고 서양의 근대사상이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중국의 근대사가 1840년경에 시작한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그 시점에서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청나라 관리들은 아편전쟁에서 큰 위기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고 해방(海防)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을 뿐입니다. 19세기 내내 그들이 느낀 왕조국가에 대한 위협은 내부에 있었습니다. 남중국을 석권한 태평천국과 서쪽 변경지대에서 일어난 회족(回族) 반란 같은 것들입니다.
1870년대 말까지 30여 년 동안 이 반란들의 진압에 막대한 인력과 자원이 동원되었습니다. 근대화랑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습니다. 청나라 관리들은 오히려 2천년간 물려받아 온 유가적 가치를 더욱 강화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자기네 권력에 대한 온갖 도전에 잘 대처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이 자기도취는 머잖아 처참하게 깨어지고 맙니다. 1894-95년의 청일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국가만이 아니라 문명까지도 위험에 처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몇 년 후 의화단의 난으로 위기의식이 더 증폭되었습니다. 영국, 독일, 러시아와 일본이 이끄는 8개국 군대가 베이징에 진군해 난을 제압하고 서태후(西太后)는 또 한 차례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해야 했습니다. 그 후 제국 체제가 통째로 무너지는 데 십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법률과 교육의 근대적 사상을 도입하려는 뒤늦은 노력도 있었으나 확실한 근대성을 가진 제도가 처음으로 세워진 것은 1912년의 공화국이었습니다. 쑨원과 그 지지자들의 공화국 수립은 하나의 혁명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혁명가들에게는 공화국의 의미를 인민에게 설명할 숙제가 있었습니다. 십년이 걸려 작성한 답안은 민족, 민주, 민생의 3대 원리를 담은 삼민주의였습니다.
새 공화국은 191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전쟁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각지를 할거한 군벌 간의 내전으로 시작되었고, 해외 열강의 이해관계가 여기에 얽혀 있었습니다. 1928년 이후 난징을 수도로 한 국민당 정부가 국제적 승인을 받았으나 남은 군벌들과 공산당과의 싸움을 끝내지 못하고 있다가 일본의 침략 앞에 장강 상류 내륙의 충칭으로 쫓겨가기에 이르렀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승전국 편에 섰던 덕분에 난징으로 돌아왔지만, 공산당 인민해방군과의 내전이 곧 재개되었습니다. 이 내전에서 국민당이 패퇴하고 타이완섬으로 쫓겨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습니다.
How To Be “Modern” / "근대화"란 무엇이었나?
이처럼 참혹한 전쟁 시기를 거친 중국인이 “근대”라는 알듯말듯한 개념 앞에서 겪은 어려움은 이해가 갑니다. 교육받은 중국인들이 근대화의 과제에 합의하는 데부터 많은 시간이 걸렸는데, 막상 근대화가 어떤 것인지는 합의가 없었습니다. 20세기 초에서 중엽까지 근대화는 흔히 서양 학문의 학습과 서양화라는 의미로 통했고 그 후에는 “시대와 함께 나아간다 與時同進”는 뜻으로 대개 받아들였는데, 시대가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는지는 확실치 않았습니다.
문인계층이 “서학(西學)”의 실용성을 중시하던 태도는 20세기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일본이 부강(富强)을 위한 새로운 수단을 갖추고 거둔 성공에 감동해 이에 맞선 사람들도 소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쟁과 평화, 과학과 경제에 관한 일본어로 번역된 새 글을 읽고 자기들도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가장 뚜렷한 현상은 1차대전과 동아시아에 대한 그 영향에 자극받은 새 세대 지식인의 출현이었습니다. 그중에서 5-4운동 지도자들이 나타나 근대성의 본질을 깊이 캐묻고 나섰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유럽 낭만주의 문학의 번역 소개가 큰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것을 읽은 중국 청년들은 개인과 가족의 관계, 그리고 대가족을 넘어서는 인간관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며 커다란 해방감을 느꼈습니다.
떠오르고 있던 새 담론 중에서 두 개 단어가 한 세대 중국인의 상상력을 사로잡았습니다. <신청년> 잡지를 발행하던 베이징대 교수 첸두슈(陳獨秀)가 민주주의와 과학을 의인화해 소개한 것이었습니다. 이 두 단어가 횃불이 되어 밝혀준 근대화의 길에는 “공자 타도”, “완전 서양화” 같은 극단적 구호들이 난무했습니다. 힘을 잃은 과거의 극단적 배척으로 기세가 오른 급진적 애국자들에게는 중국의 구원을 위해 못할 짓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서양의 가치체계를 극단적으로 받들다 보니 그 체계 속의 모순을 간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모순들이 정치화되면서 근대를 향한 진보 속에서 유럽의 민족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파시즘과 아나키즘이 제창하는 구호들이 두루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중국의 역사가 맡는 역할이 있습니다. 학인 계층 출신이든 개항장의 매판적 사업가 집단이든 중국의 지도층은 중국의 해안을 외국 경제세력에게 개방하는 해양의 힘과 러시아 등에 의해 되살아나는 대륙의 힘 사이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쪽 힘이 더 오래갈 근대로 이끌어줄 것인지 중국 정치지도자들의 결정이 중요했고, 191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나타난 여러 가능성은 결국 해양의 서양과 대륙의 서양 사이의 선택으로 좁혀졌습니다.
여기에 중국 본토에 대한 일본의 야심이 변수로 떠올랐습니다. 만주와 몽고에서 제국 러시아에 이어 소련의 반격에 마주친 일본은 중국 침략에 착수했습니다. 일본의 침략 앞에서 많은 5-4세대 중국인이 해양의 자본주의를 등지고 대륙의 공산주의 쪽으로 기울어진 것은 일본의 의도와 반대되는 결과였습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소련의 지원을 받은 중국공산당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을 물리치고 내전에서 뜻밖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마오쩌둥이 이 승리를 대륙의 서양이 제공한 근대의 성공으로 여긴 것은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공산주의는 이론상 지배계층을 노동계급의 대표자로 대치하는 사회구조의 전면적 재조정에 목적을 둡니다. 산업노동자가 적은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은 농민의 지지에 목표를 두었습니다. 러시아의 당과는 전혀 다른 차이였습니다. 초기의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국민당군에게 살해되거나 농촌으로 쫓겨났습니다. 동남부 지역에서 세력 회복에 실패한 후 그들은 일본군과 국민당군의 위협을 덜 받는 서북방의 내륙을 향해 대장정에 나섰습니다. 일본의 패배 후 그들은 만주 등지에서 소련의 직접 지원을 받게 되었고, 그것이 궁긍적 승리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습니다. 그에 따라 공산당 내의 민족주의자들도 소련에 더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공산당은 조국 근대화의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중국의 정통성 있는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사회혁명에 그 특색이 있었고 그가 추진하는 근대화는 진보적 방향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직선적 발전의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따른 면이 있으나 평등한 주권국가의 새 세계질서 안에서 소비에트 진로를 꼭 따르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예상 밖의 무력통일 시도를 계기로 유럽에 이어 아시아에서도 냉전의 심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유엔 안보리는 북한군 격퇴를 위해 맥아서가 이끄는 군대의 파견을 결정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양분된 세계의 경계선이 중국 동북지방으로 옮겨질 것을 걱정했습니다. 그는 중국의 안보를 위해 미군을 물리칠 “의용군”을 보냈습니다.
이로 인해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처럼 소련에서 벗어난 자립적 위치를 찾는 것이 중국에게는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중국을 주적으로 간주하고 한국과 일본에 큰 병력을 유지하며 동아시아에 대한 개입을 강화했습니다. 미국 지도자들은 나아가 장제스의 국민당 지원을 미국 국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며 타이완에 대한 군사지원을 늘렸습니다. 다른 층위에서는 근대화의 목표가 이념전쟁의 한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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